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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정 Sep 27. 2021

일제가 꿈꾼 여성 교육의 목표 : 현모양처론(1)

일제시대 여성 교육에 관심을 가진 이유

이 글은 <표류사회: 한국의 여성 인식사>라는 책자로 곧 출간될 예정입니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서 창작지원작에 선정되었고,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텀블벅 펀딩도 300%를 달성하며 성공리에 막을 내렸습니다. 일제 식민사관과 산업화시대의 폐단으로 왜곡된 현재의 전통문화/가족문화의 원형을 밝히고, 당당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갔던 한국 역사 속 여성문화와 양성조화의 문화를 밝히는 데 앞장서는 책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책에는 이보다 더 알차고 많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여성 교육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 |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중반까지, 혼란에 빠진 대한제국에서 ‘교육’은 중요한 열쇠였다. 마침 조선팔도를 뜨겁게 달군 동학(천도교)과 서학(천주교)의 영향으로 많은 조선의 여성들도 ‘배워서 새사람이 되자’는 열망을 갖게 되었다. 우리 민족에게는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위해, 기독교 세력에게는 기독교의 확산과 지지를 위해, 침략자에게는 용이한 식민 지배를 위해, 국민의 절반이자 2세 교육의 주체인 ‘여성’의 교육 문제는 늘 뜨거운 감자였다. 

 규방에서 가사에 전념하며 외출 시에도 장옷(여성들이 착용했던 쓰개의 일종으로서 부녀자의 얼굴을 가리려 했던 풍속에서 유래된 의복)을 쓰던 대한제국에서 ‘여성 교육’은 매우 생소한 문제였다. 하지만 어느 입장에서나 여성 교육은 각자가 원하는 밑바탕을 까는 중요한 문제였다.      

때문에 각기 다른 세력에 의해, 각기 다른 목적의 여학교들이 세워졌다. 그것은 대략 네 부류로 나눠볼 수 있었다. 첫째, 기독교적인 근대 여성을 배출하고자 한 서양 선교사들, 둘째, 여권 신장에 뜻을 둔 조선의 여성 단체들, 셋째, 항일독립운동의 기반을 공고히 하고자 했던 독립협회나 천도교 등의 민족자본, 넷째 황국신민화 정책을 더욱 뿌리내리고자 하던 일제였다.           


| 최초의 여학교 설립사 |


 여성 교육 문제를 가장 먼저 주목하고 실천에 옮긴 것은 개신교 선교사들이었다. 선교사들은 1886년 이화여학교를 시작으로 1887년 정신여학교, 1894년 정의여학교 등을 잇달아 세웠다. 1900년대 초에는 천주교의 신부와 수녀들도 가세해 서울뿐 아니라 다양한 지역에까지 여학교를 세워 갔다. 

이처럼 기독교계 여학교가 늘어가자 서울의 양반 부인들도 뜻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400여 명의 서울 북촌동 부인들이 중심이 되어 한국 최초의 여성 단체인 ‘찬양회’(1898년 9월)가 만들어졌다. 찬양회의 주축은 왕실과 상류층 양반 부인들이었다. 이들은 대개 전통적 유교 교육을 충실히 받던 계층이었다.     그럼에도 남녀가 같아지는 세상을 꿈꾸며 여성 교육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생각을 담아 「여학교 설시 통문」이란 글을 《독립신문》에 게재했는데,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단체에 의한 여성 인권 통문’이라는 의의를 갖는다.      

“우리 2천만 동포 형제가 성상 폐하의 성스런 뜻을 지키고 순종하여 예전의 나태하고 게으르던 구습은 영영 버리고, 각각 개명한 신식을 좇아 행할 때, 사사롭게 첫발을 내디뎌 ‘날로 새로워지고 또 나날이 새로워 짐’은 어린아이라도 저마다 아는 바이거늘, 어찌하여 우리 여인들은 한결같이 귀먹고 눈 어두운 병신처럼 깊은 방구석만 지키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혹 신체와 수족과 이목이 남녀가 다름이 있는가. 어찌하여 병신 모양으로 사나이의 벌어 주는 것만 먹고 평생을 깊은 방 안에 처하여 그 제한만 받으리오. 이왕에 먼저 문명개화한 나라를 보면 남녀가 매한가지의 사람이라. 어려서부터 각각 학교에 다니며 각가지 재주를 다 배우고 이목을 넓혀 장성한 후에 사나이와 부부의 뜻을 정하여 평생을 살더라도 그 사나이의 조금의 제한을 받지 아니하고 돌이켜 극히 공경함을 받음은 다름 아니라 그 재주와 권리와 신의가 사나이와 매한가지인 까닭이라.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리요. 슬프다. 돌이켜 전일을 생각하면 사나이의 위력으로 여편네를 누르려고 옛말을 빙자하여 ‘여성은 집안에 거하며 말이 바깥으로 나가지 않게 하라’며 ‘오직 술과 밥과 옷을 베풀어야 할 뿐이다’고 하니 어찌하여 신체와 수족과 이목이 남성과 다름없는 똑같은 사람으로서 깊은 방 안에 처하여 다만 밥과 술이나 지으리오. 우리도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따라 타국과 같이 여학교를 실시하고, 각각 여아들을 보내어 재주와 규칙과 행세하는 도리를 배워 일후에 남녀가 매한가지의 똑같은 사람이 되게 할 차, 곧장 여학교를 실시하오니 뜻있는 우리 동포 형제 여러 부녀 중 영웅 호걸님네들은 각각 분발한 마음을 내어 우리 학교 회원에 드시려거든 곧 이름을 적어주시길 바라옵나이다.” _(《독립신문》 1898년 9월 9일자 기사를 이해하기 쉽게 현대말로 고쳐 옮겼음)     

 이에 대해 《황성신문》은 “하도 놀랍고 신기하여 이를 기재한다”라며 대서특필했고, 《제국신문》도 “우리나라 부인네들이 이런 말을 하며 이런 사업 창설할 생각이 날 줄을 어찌 뜻하였으리오. 진실로 희한한 바이로다”라며 진기한 구경거리 보듯 했다. 

 

 다음 달인 10월, 찬양회 회원 약 100여 명은 직접 궁궐 앞으로 가 고종에게 여학교 설립을 상소했다. 장옷을 쓰고 가마를 타야 외출이 가능했던 양반 부녀들의 이러한 행보는 더욱 ‘놀랍고 희한한’ 일이었다. 고종은 즉시 비답을 내려 여학교의 설립을 약속했지만, 주자학적 사고로 무장한 관료들에 의해 재정을 핑계로 무산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찬양회 회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십시일반 마음을 모아 이듬해, 끝내 한국 최초의 여성 단체에 의한 사립 여학교인 ‘순성여학교’(1899년)를 설립했다. 더불어 독립협회와 함께 만민공동회와 자유민권운동 등에도 참여하여 조선의 근대화를 여는 데 참여하였다. 


 독립협회는 ‘자주독립’이란 외세에 의존해서는 안 되고 국민 계몽을 통해 스스로 해내야 한다고 믿었다. 특히 국민교육, 나아가 여성 교육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당시 여성들의 부당한 현실을 통탄하면서 여성 교육의 열망을 자극하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여편네가 사나이보다 조금 낮은 인생이 아닌데 사나이들이 천대하는 것은 사나이들이 문명개화되지 못하고 다만 자기 팔 힘만 믿고 압제하는 것이며, 사나이들은 수없이 축첩하면서도 여성이 개가하는 것을 천히 여김은 부당한 것이다. 조선 부인네들도 차차 학문이 높아지고 지식이 넓어지면 부인의 권리가 사나이 권리와 동등함을 알고 무리한 사나이들을 제어하는 방법을 알 것이다.”_(《독립신문》 1896년 4월 21일자)     

독립협회(1896년 설립)와 소속 언론지인 《독립신문》은 근대사회의 여성상을 만들어 가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국민의 절반이자 가정경제와 자녀 교육의 주체인 ‘여성’을 교육하는 것은 독립 자주의 정신을 널리 퍼뜨릴 밑바탕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일찍부터 다양한 교육 활동과 여학교 설립에 힘을 기울였다.      


어진 어머니와 착한 아내의 큰 관계가 아니면 결단코 일등국과 일등인을 만들어내지 못하는지라. 이러함으로 그 여자의 학식과 도덕이 있고 없는 것으로 곧 그 국가의 문명과 야만의 구별을 가히 판단할지어늘…. _(1908년도 윤치오 씨의 글을 현대말로 옮김)     


이들 외에도 왕실 기금으로 설립된 진명여학교(1906, 현 진명여고), 숙명여학교(1906, 현 숙명여중·여고) 등, 그리고 천도교 등의 민족종교와 뜻 있는 민간 지사들에 의해 동덕여자의숙(1908, 현 동덕여고) 등의 사립학교 등이 잇달아 문을 열었다.           


| 일제가 최초의 관립 여학교를 세워준 까닭  |


 그리고 1908년에는 최초의 관립 여학교인 한성고등여학교(현 경기여고)가 세워져 여성 교육이 제도적으로 확립되었다. 하지만 일제는 관립 학교에 대한 제도를 입맛에 맞게 손보아 여성 교육의 방향성을 통제해 갔다. 더불어 황국신민화 교육과 맞지 않는 사립학교들을 억제해 갔다. 기독교 계열과 여성 단체, 항일운동 세력에 의해 세워진 사립 여학교들은 모두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시킨다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1915년 「사립학교 규칙」을 대폭 개정하여 사립학교들을 탄압했다. 조선 여성들을 전략물자화하려는 계획과 황국신민화 교육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일제가 의도한 조선 여성들의 전략물자화 계획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첫째 계획은, ‘현모양처’ 교육을 통해 남편과 자녀들을 천황을 위해 멸사봉공(천황과 전체를 위해 사적인 것을 희생하라는 일제식 표현)하도록 내조하고 교육하며, 황국신민화의 선동대가 되게 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일본 전통적인 성 인식을 조선 여성에게 전달해 부족한 성적 자원을 보충하는 것이었다.(일제의 성적 자원 보충에 관한 이야기는 이후 다시 서술)

 

 때문에 일제가 세운 관립 여학교에서는 일본식 성 역할론인 ‘양처현모론’을 교육의 우선 목표로 삼았다. 양처현모론은 이후 ‘현모양처론’으로 변용되었다. 얼핏 ‘현모양처’는 전통적 여성상이자 유교의 여성상으로 오인되기도 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현모양처는 일본이 유교식 용어를 따다 만든 ‘일제식 근대 여성상’일 뿐 유교와는 큰 상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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