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에서 궁싯거리는 것이 못 견디게 갑갑해졌다. 떠나자. 혼자 떠날까. 차도 없고, 혼자 버스타기는 무섭고, 오래 걷지도 못하니, 기차역에서 택시이동으로 부담 없고 적당히 쉬면서 자연을 느끼며 혼자 여행을 다닐 만한 곳, 그리고 내가 안 가본 곳을 인터넷으로 검색하니 전남 곡성과 순천이 추천지로 가장 많이 떴다. 순천으로 가보자. 혼자.... 문득 여행을 좋아하지만 작년까지 고삼 엄마라 배제를 했던 친구가 생각났다. 연락을 하니 바로 오케이, 게다가 직장을 다니니 부담스러울까 연락할 생각도 안 한 친구까지(내 생각이 짧았다, 하지만 친구는 말하지 않아도 행간을 읽었다)월차를 내 순천여행에 합세를 했다. 혼자 떠나려 인터넷 뒤져보다 여행하기도 전에 이미 전국일주하고 돌아온 사람 마냥 지쳐 버리곤 했는데 여행 베테랑들과 함께 하니 기차, 렌터카, 여행지 순서 정하기, 맛집탐색까지 빠르게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이 되었다. 아, 그랬지. 이 추진력. 젊은 날의 우리들이 우리 속에 여전히 있었다.
"네가 요즘 웬일이니? 어디 돌아디는 거 별로 안 좋아하더니 요즘 여행을 자주 계획하네."
"그전엔 나중에 시절 좋을 때 가려고 미룬 거고, 아프면 여유가 있어도 못 가니 그 나중이란 게 이승을 떠나는 여행이 될 수도 있겠더라."
이른 아침 만나 기차를 탄 설렘에 내가 찬물을 끼었었나. 아니 그럴 리가. 상황은 다르지만 우리 나이가 이미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나이다. 오늘의 셀렘을 지킬 줄 안다. 소곤소곤 셀렘이 수다로 끓임 없이 흘러나왔다.
"그래, 상태 좋을 때 이렇게 콧바람 넣어야 활력도 생기지. 다닐 곳 많으니 어서 움직이라고 네 몸도 회복을 했나 보다. "
KTX로 세 시간을 넘게 달려 도착한 순천, 지도로 보던 거리감이 우리나라에서 보기 어렵다는 지평선이 보이며 와닿았다. 이른 점심을 먹기로 하고 찾아간 도토리 전문점 나눌터, 그러나 이미 대기 인원이 엄청 나서 30분가량 기다려 보쌈과 임자탕을 허겁지겁 먹었다. 그 음식들을 사진으로 남겨둘 걸 후회가 된다. SNS에 사진 올리는 취미가 없는 친구들이라 사진 찍는 데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먹는데만 충실했다. 음식은 눈이 아닌 입으로 먹는 거니, 그래 잘 먹었으니 됐다.
우리의 계획은 순천만과 국가 정원을 먼저보고 낙안읍성과 드라마 촬영장등을 둘러볼 요량이었으나 국가 정원 박람회 기간 중이라 주차장이 만차이고 단체 관람온 사람들이 땡볕아래서 긴 줄을 선 것을 보고낙안 읍성으로 차를 돌렸다. 이때 친구들과 차를 렌트해 함께 온 것이 얼마나 감사하던지. 이런 변수덕에 산중 벚나무가 만들어낸 초록터널을 달리며 눈 호강을 했다.
낙안읍성 가는 길
평일 한 낮 낙안읍성은 한적하게 새소리를 들으며 걷기 좋았는데 성곽으로 올라서려니 그늘 한점 없는 한여름 강렬한 태양과 옛날 돌로 쌓은 계단이 나를 아찔하게 하였다. 친구들이 나를 끌고 받치고 성곽에 올라 내려다본 전경에 방구석에 처박혀 끙끙대던 아픈 신음대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대도시와 다른 풍경에, 공기에, 새소리에 압도되었다.
순천 낙안읍성
오후 3시를 넘겨 순천국가 정원으로 돌아오니 한결 한산해졌다. 이미 낙안읍성에서 기운을 뺀 터라 고민 없이 관람 열차로 국가 정원을 돌아봤다. 생각보다 걸을 일도 없었고 편리하게 세계 각국의 잘 가꿔 논 정원을 볼 수 있었지만 큰 감흥이 일어나진 않았다. 인공적이서 인지 여행은 고생에 참맛이 있는 건지 아니면 우리가 낙안읍성에서 성곽에 오른다고 너무 기운 뺏나, 그러나 실망하지 말라는 듯 광대한 규모에 눈이 휘둥그레 해질 조형물들이 있으니 보는 재미가 없지 않았다. 인공미 싫다 어쩌고 떠들어 댔지만 순천만까지 오분이면 도착할 스카이 큐브를 타니 다시 흥분이 밀려들었다. 인터넷으로 보고 케이블카 같은 것인 줄 알았는데, 공중 택시를 개발하던 기술을 적용해 만든 현대문명의 최첨단 기술의 집약체란다. 안내 직원의 배려로 우리 셋만 스카이 큐브에 올랐는데 타보니 공중을 달리는 것 같아 정말 신이 났다. 반백년 산 여자들이 아이처럼 내뱉는 환호성, 잠자던 젊음이 깨어났다
순천 국가 정원
드디어 도착한 순천만 그 푸르름은 편하게 하염없이 바라봐도 질리지 않는 가슴 펑 뚫리는 풍광이었다. 유럽에서 봤던 풍경보다 오히려 낯설던 우리나라의 풍경에 드디어 내가 들어선 느낌이들었다. 친구들도 나도 기차표를 캔슬하고 더 머무르고 싶었으나 내 다리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친구들에게는 미안했지만 나는 여기까지가 최적이었다.
여행이란 홀가분하게 떠나지만 결국 일상으로 다시 돌아는 것, 그리고 갑갑했던 방의 침대가 다시 그리워지게 만드는 일상의 피로회복제 아니던가.
어떤 유명인이 여행은 사치라고 했다. 고개가 끄덕여진다. 여행은 생산 활동을 지지해 주는 일상을 떠나 소비에 초점이 맞춰지니, 어쩌면 꼭 필요하지 않은 일에 돈을 쓰니 낭비인지도 모른다. 사치란 필요이상으로 분수 맞지 않는 것을 취하여 생활하는 것이니 사전적 관점에서 보면 여행은 사치이지만, 지친 삶에 휴식과 활력소가 필요하다면 여행이 주는 활력은 앞으로 우리를 지속할 힘을 비축하는 저축이리라.
암환자의 버킷리스트도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깨닫는 놓친 기회, 생활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놓친 기회를 누려보려는 삶의 발버둥 아닐지. 어쩌면 인생을 즐길 기회를 미루는 사이 스트레스가 암이 되었을 수도 있고. 사실 여행에 가장 중요한 것은 돈과 시간인데 여유가 없으면 여행은 언감생심이다. 유학길에 해외에서 장기간 체류했고 시간강사로 풍광이 유명한 여러 지방에 강의를 다녔지만 일과 연관 되면 부담이 앞서고 나 자신보다는 내 강의를 들을 타인에게 집중하니 풍광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마 경치 좋은 곳에 사는 농부도 그곳을 떠나 보고 싶지 않을까. 여행의 묘미는 일걱정 없이 일상에서 떨어져 보고 다시 돌아와 일상을 재음미하는데서 오는 색다름 아닐까. 숲을 보려면 숲 속에 있지 말고 밖으로 나와 떨어져야 하듯 일상을 보려면 일상에서 잠시 떠나보는 것이 최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