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만에 운동이랍시고 산책을 하던 중에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병원에서 온 설문조사라 나중에 해야지 하다 깜박했는데 자정이 넘은 시간에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생각이 났다. 전이암 환자대상 연구자료 모집과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로 약속을 한 터라 또 잊기 전에, 이메일 제출이니 담당자를 깨우진 않겠다 싶어, 설문에 응답을 시작했다. 내 정보를 입력하자 "암 생존자 자기 효능감 척도..."라고 설문이 시작되었고 암 생존자의 일상생활 만족도에 대한 질문이 길게 이어졌다. 답을 하다 보니 5년 전 10월 18일에 입원해서 19일에 첫 암제거 수술과 임파선 조직 검사를 시행한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당시 수술 전에 유방암은 5년 생존율이 초기 발견의 경우 90% 이상이지만 암 2기부터 생존율이 대폭 떨어져 임파선 전이가 심한 3기의 경우 절반으로 뚝 떨어진 통계를 보고 덜컥 겁부터 났었는데, 아직 암이 내 안에 있어 표적항암치료를 받고 있지만 내가 5년 이상 암과 잘 싸워 암 존자가 되었다는 생각에 삶의 의욕이 솟아났다.
암 생존자란 암을 진단받은 시기부터 남은 일생에 걸쳐있는 모든 사람을 의미하며, 가족 구성원, 친구, 돌봄 제공자도 이러한 정의에 포함될 수 있으나 흔히 암 치료 이후 건강하게 살아있는 암 환자를 암 생존자로 정의한다.
변혜선 외, 「암 생존력에 대한 개념분석」, 『종양간호연구』 12권 3호, 대한 종양 간호학회, 2012, (283-284)
잠도 오지 않아 작년에 비혼 암환자의 일상을 여러 시점으로 구성한 『쿠마이의 무녀』를 쓰며 찾아보았던 논문을 다시 들쳐보았다.그리고 완치판정도 못 받은 내가 암생존자가 맞눈지 정확한 의미를 되짚었다. 올여름 시작부터 이사와 여러 일들이 겹쳐 몸이 굉장히 힘들었다. 아직 그 여파가 지속되고 있어 만사가 귀찮고 시 큰 퉁 했는데 암생존자가 되었다 생각하니 어깨가 좀 으쓱했다. 담당 의사가 지난달 진료에서 삶의 질 향상을 강조한데에는 이런 이유도 이었으리라.
갑자기 머릿속이 분주해졌다. 만성질환처럼 암을 끼고 사는 사람으로 어떻게 잘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 했다. 내 삶의 목표도 있고 간간히 일도 하고 있으니 내가 원했던 고상하고 우아한 삶은 아니어도 삶을 우울하게 견디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뭔가 아쉬웠다. 체력도, 경제적으로도 바닥을 치고 있으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이 뭐 있을까? 우선 생활에 불편한 점부터 해결하자는 생각에 그동안 짐을 늘리지 않겠다고 사지 않았던 물품들을 온라인 장바구니에 휙휙 담았다. 돈들이지 않고 삶을 질을 높이는 법을 고민해 놓고 돈 쓸 일을 만들고 있었다. 이건 진정한 삶의 질 향상이 아니다. 우선 현실의 불평불만이 쌓인 무거운 머릿속부터 정리하자. 그런데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다.
아침에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암 생존자가 되었음을 알리며 삶의 질 향상을 위해 고민 중이라 했다.
"뻔데기 앞에서 주름잡고 있네. 하던 대로 살아. 괜히 부산 떨다 병나지 말고...."
아, 언니는 암 생존 27년 차다. 역시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 진리다. 하던 대로, 좀 더 잘 먹고 잘 자고 활기찬 몸을 유지하는 게 삶의 질 향상에 으뜸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