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질병관련한 에세이가 그렇듯 나도 발병일(진단일)부터의 감정을 서술하고 싶으나, 나는 뇌출혈이 발생한 당일 아침부터 한 달여간의 기억이 없다.
예기치 못하게 간질발작을 동반한 뇌출혈을 일으켜 급하게 회사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대학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출혈 규모가 너무 커 동공이 열렸기 때문에 바로 응급으로 머리를 열었다. 7시간이 넘는 수술이 끝났지만, 뇌압이 안 떨어져 결국 두개골을 닫지 못했고, 머리를 일부 떼어먹은 호빵맨 상태로 한 달을 지냈다.
머리를 덮은 배껍질 안에는 두개골 없는 부분이 함몰되어, 친구에게 얼굴 일부를 떼어준 호빵맨처럼 움푹 들어가있다.(고 한다. 난 기억안남..)
수술 후 머리에관을 꼽아 피를 빼고는 있었지만, 출혈당시 흘러나온 피에 적셔진 뇌는 본래 하던 기능의 상당 부분을 수행하지 못했다.뚜껑을 열고 있으니 뇌압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상태여서 더욱 그러했다.
기억력에도 영향을 미쳐 낮에 있었던 일을 저녁에 기억하지 못했다. 사고하는 기능은 정상적이었는가? 알 수 없다. 그때 당시 나는 말을 못 했고, 언어를 구사하지 못해 글도 못썼다. 그때가 기억나지도 않는다.다만 흐릿한 파편 같은 기억들이 몇 조각 있어 더듬어보건대, 지금과 같은 인지 수준은 아니었던 것 같다.
- 말을 못 했고, 마비가 없는 왼손으로도 글을 쓰지 못했다. 언어기능이 상실된 상태였다.
- 반가운 얼굴이 보이면 웃었고, 아프거나 맘대로 안되면 짜증을 낼 뿐이었다.
- 음식물을 넘기지 못해 콧구멍에서 위로 연결시켜 놓은 '콧줄'을 자꾸 빼려 해 왼손마저 묶어놓았다. 자신이 영양분을 섭취하는 유일한 통로인 콧줄을 잡아 빼려 했다는 건, 지금 같은 이성적인 사고가 어려웠다는 뜻일지도 모른다.(물론 나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시기를 멀쩡한 정신으로 겪었다면, 나는 견딜 수 있었을까?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고능력이 서서히 회복되어 나의 상황을 판단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이미 발병하고 한 달이 지난 후였다. 그래서 눈떠보니 '의사양반, 그게 무슨 소리요. 내가 고자라니..!'와 같이 충격받는 일은 없었다. 기억나지 않는 어느 때부터 나는 내 몸상태에 대해 알고 있었다. 혹은 충격받았던 순간마저도 까무룩 잊어버렸거나.
뇌에 동정맥기형이라는 꽈리(혈관기형)가 있었고, 혈류가 빨라진 순간 그 속도를 못 견디고 터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그 자리의 뇌세포가 녹아내려 커다랗게 빈 공간(뇌연화증)이 생겼다. 움직임을 관장하는 부분이 주였고,그 기능을 못쓰게 되었다.
-출혈부위는좌뇌였고, 그래서 오른쪽 몸에 마비가 왔다.
뇌에서 이어지는 신경이 목 뒤에서 좌우로 교차한다나. 학창 시절 생물시간에 배웠던 것도 같고.
이제 내게 오른쪽 몸은 그냥 없는 것이었다. 그게 당연했다.
뇌를 다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당연한 것이 당연히 아니게 되는 것.
예전엔 마비란 게 막연하게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는 건 줄로만 생각했었는데, 그보다는 '통제력을 잃는다.'에 가까웠다.손상부위에 따라서도 통제력을 잃는 양상이 다르다. 나의 경우는 움직이는 법을 잊어버렸다. 왼손은 내 생각대로 움직일 수 있는데, 오른손을 움직이려고 하면 '어떻게 움직이지?' 도무지 모르겠다.
힘없이 축 늘어진 채 오른쪽 팔, 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오른쪽 허리근육을 못쓰니 등받이 없이는 앉지도 못했다. 기립기라는 기구를 이용해 온몸을 묶은 채 세워두면, 내 근육들은 중력을 이기지 못해 있는 대로 소리를 질렀다.
양치를 하려고 물을 머금으면 오른쪽 입술 틈새로 물이 줄줄 새어 나온다. 아니, 사실 그때는 이를 닦을 필요도 없었다. 음식을 삼키는 기능이 동작하지 않아 코로 식도까지 관을 연결해 영양액을 넣어주는 콧줄식사를 했으니까. 혼자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얼마 전부터 가능하게 된 숨쉬기. 그뿐이었다.
천벌 받을 일은 크게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나. 수백 번, 수천 번 생각했다. 답은 당연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어두운 감정은 예고 없이 하루에도 몇 번씩 고개를 쳐들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지? 내 삶을 앗아간건 누구지?
쓰러지기 직전에 맛본 인생은 너무 달콤했다. 인생이 어찌 달기만 할 수 있었겠냐마는, 이정도는 견뎌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정도 의지와 능력은 있다고 자신했었다. 그런데,맛을 볼 수 없게 혀를 뽑아버리면 어쩌자는거지?
중학교 가정수업시간인가, 나의 인생곡선 그리기를 했던 기억이 있다. 선생님께서는 삶의 다양한 모습을 예로 들며 '삶의 질 중 최저는 장애가 생기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마비'니, '장애'니 그런 것 나에게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상상이나 해본 적있을까? 철없던 열다섯의 내가 그린 인생곡선은 자잘한 굴곡들을 무시하면 끝없이 우상향하고 있었다. 그 어느 시점에도 '장애'는 포함되어있지 않았다.
15년 동안 잊고 살았던 그 문장이 바로 어제 들은 듯 생생히 떠오르는 이유는 무얼까. 상관없는 일이라고 흘려들었던 나의 어리석음을 꾸짖고 싶었나.
2019년 2월 23일
매일 아침, 의식이 잠에서 깨어나면 눈을 뜨기 전에 '지금까지 겪었던 일들이 모두 꿈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오른손가락을 움직여본다. 움직여지기는커녕 눈을 감고 있으면 오른손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다. 당연히 내 오른쪽 팔 끝에 달려있겠지. 하지만 위치가 느껴지지 않는다.
드라마나 소설에 보면 '하..슈발, 꿈..' 하고들 깨어나던데, 나는 왜 그렇지 못한가.
떠오르는 해가 희망의 상징이라고들 하는데, 나는 일출만큼 슬픈 게 없다. 3달 여가 지난 아직까지도 깨어나면 모두 꿈이었길 바라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그렇게 부질없는 기대를 매일 하면서도 또 하고 있는 오늘이다.
참 많이 울었다. 간질예방약 부작용으로서의 잦은 우울감이라고 자위해보지만, 그게 다가 아님을 알고 있다. 그저 현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고 생각해 보기로 했다. 하루아침에 몸 반쪽이 안 움직이게 되었는데 태연한 게 더 이상하지 않나? 슬플 땐 울어야지.
살아있음에 감사하단 말은 아직 못 하겠다. 나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서 위로받는 것도 한계가 있지. 나보다 정도가 심하면 뭐, 내 장애가 나아지나? 바뀌는 것 하나 없는데 사람들은 자꾸 '아래'를 보란다. 상대적인 경중에 관계없이 나에게 닥친 불행은 있는 그대로 불행이다.
'아래'를 인지하는 순간 '위'도 자연스럽게 존재하게 된다.'위'를 보지 않는 것만으로 내 정신력은 다 소진했다. 인생에서 가장 높이 올라왔다 생각한 곳에서 수직으로 떨어진 나는, 그 '갭'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허우적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