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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박 Jul 24. 2023

좋은 공간의 이유

영원의 건축 - 크리스토퍼 알렉산더


6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읽으면서 나에게 남은 것은

‘공간은 기능과 사용자에 따라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의무 같은 것이 있다는 점’과

‘어떤 공간이 좋았다면 분명히 그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것은 건축의 패턴으로서 발현된다는 점’과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좋은 공간을 발견하고 분석하고 해석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너무도 명쾌했다. 난 지금까지 좋은 공간을 그저 좋다고만 표현했고 그것이 왜 좋은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부끄러웠다.


[공간의 마땅한 의무]

각각의 기능은 그것에 맞는 형태와 크기 같은 것이 있다. 절대적인 지표는 아니겠지만 그것의 형태 안에서 사람들의 행위와 공간의 특질(크기, 형태, 향, 개구부의 위치 및 크기, 가구의 배치와 크기 등)이 결합되어 알맞은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공간은 기능 및 이용자의 행위에 따라서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의무 같은 것이 생겨난다. 다만 그 의무는 절대적이지 않다(‘기능’같은 경우에는 어느 정도 절대성이 부여될 여지가 있다. 사람들의 직접적인 사용성과 결부되는 기능은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들이 존재할 수 있기에). 공간의 의무는 사용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조합되어 기존의 것, 그리고 주변에 만연한 것과는 다른 모습을 가지게 된다. 마치 나뭇잎이 전부 같아 보이지만 결코 단 하나도 같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왜 좋았을까?]

길을 걸어가다 마주한 어떤 건축의 입구가, 비 오는 날 어느 건축 안에서 마주한 아주 조그마한 중정이, 점심시간이면 사람들이 커피를 들고 삼삼오오 모여드는 건축 전면의 넓은 공지가 계속해서 끌리는 경우가 있다. 지금까지는 그저 좋다고만 생각했고 나의 생각은 거기서 끝이 났다. 하지만 책을 덮고 의문이 들었다. 그 공간들이 좋았다고 생각한 이유가 뭘까?


공간의 느낌이 좋았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섬세하게 조작된 그 순간의 환경일 수도 있고 만약에 그렇다면 그것은 건축가의 의도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공간이 가져야만 하는 의무를 충실히 수행했을 수도 있고 한계라고 생각했던 법규를 가능성으로 치환한 공간일 수도 있다.


건축으로의 진입이 좋았다면 그 이유가 있을 것이고 건축 속의 중정이 좋았다면, 객실의 화장실이 아주 쾌적했다면, 도시의 어딘가, 핵심적인 결절점의 역할이 아주 충실하게 수행되고 있다면, 주방 싱크대가 사용하기에 너무나 편리했다면 그것은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들은 좋은 공간의 패턴이 된다. 좋은 공간이라면 마땅히 가져야만 하는 그런 조건 같은 것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러한 패턴들이 그저 습득되진 않는다는 것이고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좋은 공간의 근거]

패턴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건축이 좋은 공간으로 거듭나기 위해 품어야만 하는 그 패턴들이 이미 충분히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패턴은 과거에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졌고 새로운 것은 또다시 그다음의 시간으로 이어진다. 이 불멸의 특성은 좋은 공간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언어화하고 실체화하기에 아주 적절한 근거이다.


항상 궁금했다. 공간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과연 좋은 공간은 무엇일까, 내가 만든 공간이 좋은 공간이라고 사람들에게 도대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다시 한번 그 공간은 정말 좋은 공간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이로써 내가 좋은 공간의 패턴을 수집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해졌다. 나는 그 근거들을 모아야지만 좋은 공간을 만들 수 있다고, 그리고 그래야만 그것이 좋은 공간이라고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있다고 거의 확신했다.


[추상적 개념의 실체화]

과거에서부터 이어진 ‘좋은 공간’들의 패턴은 지금의 수많은 건축 속에 잠들어있다. 그것을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나는 그 패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어야 하고 그러한 공간으로의 발걸음을 미루지 않아야 한다. 좋은 공간들을 경험하겠다는 의지는 좋은 공간과 그 속에 숨어있는 패턴들을 ’발견‘하게 한다. 그리고 그것을 인지하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공간에 대한 추상적인 개념을 분석하고 해체하여 패턴들을 실체화하고 기록하고 다시 조합하여 적용하는 일련의 과정이 필요하다.


난 좋은 공간을 만들고 싶다. 도시의 끝에서 마주하는 기분 좋은 현관을 만들고 싶고 넋 놓고 바깥을 바라볼 수 있는 중정을 만들고 싶고 개별적인 특성과 공동체적인 특성이 함께 존재하는 가족이라는 존재가 마음껏 섞이고 분리될 수 있는 그런 거실을 만들고 싶고 어느 누군가가 와도 편안하게 머물 수 있고 지나갈 수 있는 그런 광장을 만들고 싶다. 이런 공간들은 분명 어딘가에 있다. 그리고 아주 다양하게 변형되어 존재할 것이다. 내가 해야 할 것은, 그저 경험하고 해석하고 상상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좋은 공간들이 무명의, 불변의 특성을 지닌 채 전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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