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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가혹한 당신

나도 누군가의 악마였으니

by 까칠한 펜촉 Mar 0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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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 오브 꼰대, 꼰대의 화신(化身), 꼰대 대마왕


내가 H그룹에 있을 때는 말이야.
H그룹 기획실에 있는 애들은 말이야.
H그룹 본사였으면 말이야.
H그룹 기획실은 Best of Best of Best of Best of Best야
라떼는 말이야.


이런 코멘트를 늘 달고 살았던 분이 있다.
어떤 보고를 하러 가도 늘 이 중에 있는 문장 중 하나로 코멘트를 시작하는 분이었다.


벤처기업에 입사해서 대기업에 이르기까지 몇 개 회사를 거쳤다.
웹 기획에서 시작해서 한 회사의 미래 전략 수립과 성장 동력 확보를 책임지는 전략기획 담당의 자리를 맡기까지 대부분의 기획 업무를 섭렵하고 경험했다.

뻔뻔스러운 자뻑 일 지 모르지만, 그 자리에 이르기까지 위, 아래, 주변 어디에도 경쟁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1 Top이었다. 누가 가르쳐 주는 이 없었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 노력하고, 성장했다. 물론, 자극을 주거나 어떤 모멘트가 된 사건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코칭 또는 티칭을 받았다는 느낌은 커리어 내내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그렇게, 15~16년을 살다가 ‘꼰대 오브 꼰대, 꼰대의 화신(化身) 꼰대 대마왕’을 만남으로써 인생 처음으로 코칭과 티칭, 그리고 고된 훈련을 받는다는 게 이런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기획자 대 기획자로의 첫 대면


첫 보고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를 많이 예뻐하셨고, 서비스 기획에서 전략기획자로 안착하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셨던 실장님께서 그룹 본사로 복귀하시고, 처음으로 재무통이 아닌 본사 기획실 출신의 실장님이 내려오셨다. 본사에서도 나름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첫 대면 인사 후, 오후에 보고서를 들고 방으로 찾아갔다.

대충 본다는 느낌을 가질 만큼 빠르게 보고서를 스캔하신 후에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이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맥락을 짚는다고?’ 속으로 좀 놀랬다. 그리고, 질문에도 예기(銳氣)가 있다. 첫 보고는 말 그대로 얼렁뚱땅 넘어갔다. 찜찜한 면은 있었지만, 입사하신 첫날이나… 그리고, 내 보고서에 흠결이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몇 시간 후, 팀장과 차석인 나를 포함하여 기획팀 인원들이 전체 호출하셨다.

“H그룹 기획실은 말이야”로 시작된 코멘트.

생전 처음 느껴보는 모멸감과 당혹감, 수치심.
거의 그로기 수준에 이르기까지 내 보고서에 대한 피드백을 전체 인원에게 하셨다.

마치, 내 옷을 한 겹, 한 겹 벗겨가며 조롱하고는 마구잡이로 채찍을 휘둘러 어디 하나 방어할 곳 없게 만드는 듯한 질책이 이어졌다.


그렇게 인연이자, 악연이 시작되었다.




비교하고, 무시하는 관리자


한 번도 겪어 본, 아니 당해 본 적 없는 질책과 비난이 거의 매일 이어졌다. 보고할 건 많은데 보고서마다 족족 반려되었다.


실장님은 H그룹의 기획서를 많이 갖고 계셨는데, 어떤 유형의 기획이든 일단 갖고 들어가면 H그룹 기획서에서 비슷한 유형을 찾아 그것과 비교를 하셨다. 그러면서, 늘 똑같은 멘트를 한다. “H그룹 기획실은 말이야. 이런 기획은 기획도 아니야. 우리는 Best of Best of Best of Best 야.”,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건 이래서 문제고, 저거 저래서 문젠데, H그룹 기획실이었으면 말이야.”, ‘그래서 어쩌라고???’


팀장은 항상 묵묵부답이고, 실장님과 나의 실랑이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나는 무시를 당했고, 항상 비교 대상은 일면식이 없는 본사 기획실 P부장, L차장, C과장 이런 사람들이었다. 내 눈으로 보고 어떤 유형의 기획자들인지 좀 알면 도움을 청하든, 뭘 배워보든 할 텐데 가상으로만 존재하는 유니콘 같은 인물들과 나는 늘 비교를 당하고 있었던 터였다.


이 당시는 회사의 정책과 제도, 전략 입안을 혼자 도맡았고, 거의 모든 C레벨 회의를 주관하고 있었으며, 신성장 동력 프로젝트 지원, 전사 프로젝트 관리(PMO) 등 담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요 C레벨 회의마다 신규 보고 및 진행 경과를 발표했는데, 발표 후에는 늘 많은 분들이 격려해 주시고 차기 업무에 이어지기까지 잘 지원해 주셨던 게 루틴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서조차 팀킬을 하는 게 우리 실장님이셨다.


그 보고 자리에서조차 또 나오는 코멘트 “본사 기획실에서는 말입니다.”, “본사 기획실 보고서에는… “, ‘그래서, 어쩌라고!!!’ 오히려, 대표이사님과 타 부서 임원들이 나를 감싸 줄 정도였다.

비단, 보고하는 자리 나 회사에 있을 때만이 아니었다.

회식자리에서조차, 소주병에 라벨을 가리지 않고 술을 따른다. 두 손을 공손하게 모으지 않는다. 건배사가 약하다. 등등 뭐 이런저런 트집을 잡는다.


그러던, 어느 날 터질 게 터졌다.

차기 연도 사업계획을 마무리하고 팀 회식을 하는 자리에 실장님께서 늦게 합류하셨다. 근처에서 임원 회식을 하다가 마무리하고 오셨단다. 실장님이 오시니 곧 팀장은 꽁무니를 빼고 도망가 버렸다. 어쨌든 차석이니 내가 후배들을 데리고 모셨다.


그 자리에서도 또 H그룹, H그룹 기획실 얘기가 터져 나왔다. 그러면서, 우리 회사 사업계획 방식이 마음에 안 들고, H그룹 본사 같았으면 이렇게 저렇게 했을 거란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치면서 그렇게 잘나고 그렇게 훌륭하신 분이 왜 여기에 오셨냐 로 시작해서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여기는 여기대로 정책과 문화라는 게 있다. 왜 우리가 본사와 비교를 당해야 하나. 도대체 뭐가 불만이냐… 뭐 이런 식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실장님도 노발대발했고, 마침 함께 오셨던 연구소장님께서 실장님을 끌고 가셨다.


파국이었다.




태도가 불량한 녀석


너 일 잘한다는 얘기는 알고 있었다. H그룹 기획실과 비교해도 별 손색이 없다. 그런데, 너의 그 태도가 문제다.


다음 날, 일찍(거의 새벽에) 출근을 했는데 실장님 방 불이 켜 있었다. 어젯밤 실수에 대해 사과 말씀을 드려야 했다.


첫마디가 “자네가 실수 있다면, 그전에 나도 실수가 있었겠지.”였고, 이 첫마디를 시작으로 본인이 느꼈던, 나에 대한 말씀을 솔직하게 해 주셨다. 가장 여러 번 지적받은 건 ‘태도 불량’이었다. 그리고, 그 태도 불량은 본인이 먼저 느낀 게 아니라, 타 팀의 선배들이나 C레벨에서도 지적된 문제라고 했다.


듣고 보니 이해되는 것도 있었다. 한 참 잘 나갈 때였으니 누구에게나 말을 곱게 할 때도 아니었고, 선배든 뭐든 내 마음에 안 들면 회의 석상에서 다소 심하게 지적할 때가 많았던 것 같다. 회사의 거의 모든 정책, 제도, 전략 이런 것을 다루다 보니 내 마음에 내키는 대로 하고 어차피 대표이사나 C레벨은 2~3년이면 바뀐다는 생각으로 막 나갔던 것은 부인하지 못한다.


그렇게 서로를 터 놨더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둘 관계가 별로 달라진 건 없었다.
실장님의 지적은 늘 똑같은 멘트로 시작해서 똑같은 비교를 하셨으니.




가혹한 트레이너, 그러나 배울 점이 많은


정반합이라 했던가.
비교하고 무시하는 관리자와 싸가지 없는 ‘태도불량’의 담당자의 불편한 관계는 계속되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피드백을 대하는 서로의 태도였다.


실장님의 지적은 늘 날카로웠다. 짧은 순간에 많은 것을 간파하여 좋은 대안을 주실 수 있는 혜안과 경험이 있으셨다. 보고하는 자리는 늘 불편했지만 한 편으로는 기대를 안고 보고에 임할 수 있었다.

같은 보고서를 몇 번의 수정을 거칠 때마다 일관된 지적과 명쾌한 지침을 주셨다. 속으로 ‘아, 상위 기획자라는 건 이런 거구나!’ 하고 느끼는 바가 많았다.


그래도, 늘 비교하고 무시하는 멘트가 바뀐 건 아니었다.
그래서, 내 스탠스도 바꾸지 않았다. (ㅎㅎㅎ)


몇 개월이 지난 후, 대표이사님과의 술자리에서 실장님께서 나와 내 후배를 지목하시고는 H그룹 기획실과 비교해도 Top Class 인재라는 칭찬을 해 주셨다. 대표이사님께서 아직도 그놈의 기획실, 기획실 운운하시냐 핀잔을 주시는 바람에 함께 자리한 모든 분들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던 기억이 선명하다.




IF에 늘 등장하는 우리 기획실, 기획팀


K실장님은 몇 개월 후, 품질지원실로 발령받으셨다.
통상, 우리 그룹에서 품질지원 총괄로 간다는 얘기는 임기가 곧 끝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실장님께서 품질지원실로 가신 후에 또 다른 글로 등장할 인물이 우리 실장으로 오시고, 내 보직도 차석에서 팀장으로 진급을 하게 될 터인데, 이때를 돌이켜 보면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새로운 실장은 본래 재경 팀장이었는데, 승진 발령을 받은 것이고, 재경은 전통적으로 상위관리자를 중심으로 일단의 무리를 형성하고 밀고 당기는 맛이 있는데, 우리 기획통들은 늘 나만 잘났다.

실장, 팀장, 차석, 그리고 그 밑에 인원들까지 모두들 내가 제가 똑똑하고, 일 잘났다.
그래서, 밀어주고 당겨 주는 게 전혀 없었다.

이 글의 주제와는 관련이 없지만 가끔 이때, 우리가 이랬다면 어땠을까…라는 가정을 해보곤 한다. 그리고, 이분께 몇 년만 더 배웠다면 내 역량과 스킬은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본다.




기획자의 길


나는 기획(企劃) 자로서 살아가는 것에 자긍심을 갖고 있다.


기획은 ‘어떤 일을 꾸미어 계획’하는 것이 사명이자 역할이다.
어떤 일이든 꾸미어 계획하지 않으면 무엇도 실행되지 않는다.
따라서, 기획자는 5W 1H 관점으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다는 자세가 기본이 되어야 하며, 역설적으로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할 능력이 없으면 기획자가 아니고, 기획자란 타이틀만 가진 ‘시다바리’ 이다.


내 후배들은 나의 이 견해를 잘 알고 있을 테다.

이런 견해의 배경이 된 분이 바로 K실장님이고,
“기획자는 대표이사라는 작두를 타고 노는 무당과 같다.”라는 명언을 남기신 분도 K실장님이다.


같은 회사에서 퇴사한 후, 한 번도 연락을 드린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다른 동료를 통해서 들은 것은 어디 중소기업에서 임원으로 재직하시고, 간간히 나에 대한 얘기도 하시며 한 번 보고 싶다고 하셨다더라.


아마도, 타이밍이 문제였고 서로의 감정이 끈끈하다 할 정도가 아니었기에 먼저 연락하시지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마음을 짐작하기에.
나 역시 어떤 이들에게 실장이었기에.


내가 보고 싶을 때는 용기 내어 보고 싶다고 먼저 연락하려 한다.

그때 후배들이 반갑게 맞아주면 참 고맙겠다는 생각을 한다.



- 까칠한 펜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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