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누군가의 악마였으니
팀장 발령을 받고 출근하는 첫날이었다.
어제까지는 동료였던 후배들이 “팀장님, 안녕하세요!”라고 씩씩하게 인사해 주었다. 같은 팀에서 거의 4~5년을 함께 지냈던 동료들에게 팀장님이라는 칭호를 들으니 생경하면서도 입가에 번지는 미소는 참아지지 않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보고하기 위해 찾아갔던 그 자리는 이제는 내 자리가 됐다. 팀장 자리는 일반 직원들 자리보다 2배 가까이 넓었고, 간이 이동 통로를 사이로 팀장과 팀원들 사이에 위계(位階) 공간을 두었다. 팀장 자리 뒤, 창 너머에는 햇살에 반짝이는 눈부신 한강이 너울거렸다.
이런 감격스러운 기분을 음미하고 있는데, 한 여직원이 아침 인사를 하면서 잠시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고는 나를 회의실로 이끌었다. “팀장 진급하신 지 얼마 안 됐는데, 좋지 못한 말씀을 드려 죄송합니다.”라는 얘기로 운(韻)을 띄웠다.
피해자는 총 3명이라 했고 가해자는 HR팀장이었다.
처음에 그 얘기를 듣고는 내가 잘못 들었기를 바랐다. 그는 그룹 본사에서 온 분이었고 인사 업무를 총괄하였기에 임원들도 한 수 접어주는 그런 분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팀장이 되도록 뒤에서 돕기도 했고 함께 회사의 미래를 그려보고 싶은 분이기도 했다. 당시는 연예인 미투 사건이 매일 같이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했을 뿐 아니라, 이 분의 전임도 성추행으로 퇴직하셨기에 그룹 차원에서 사건을 다룰 경우, 이 파장이 작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빠르게 상위 보고를 하고 처리 절차를 상의했다.
보고 받으신 분들의 표정을 보니 사건 접수를 했을 때의 내 표정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보고 과정에 사건 상황이 업데이트 됐다. 사건 신고를 했던 내 팀원이 주말에 이미 블라인드 그룹방에 이 사건을 올려놓았던 것이다. 간접적으로 그룹에 보고된 것과 다름이 없었다.
업데이트된 상황을 포함하여 보고 라인을 거쳐 탑 매니지먼트에게 직접 상황 설명을 드렸다. 그 자리에 다른 임원도 있었다.
“정작 가장 큰 피해를 봤다는 직원은 가만있는데, 왜 너희 팀원만 이렇게 설레발이냐, 너는 왜 사건을 잘 정리(덮지) 하지 못했냐, 여자들만 성추행 당하냐 남자들도 당한다. 나도 여직원들에게 성추행을 당해봤다.”라고 한 임원이 나무라듯 내게 얘기했다.
나는 잘못한 것 없이 무언가 잘못한 사람이 되었다.
성추행 가해 팀장은 한 달 뒤 회식 자리에서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며 퇴사 인사를 대신했다. 많은 임원들이 ‘참 아까운 사람이야.’라면서 장탄식을 했다. 공식적으로 인사위원회를 거친 징계 절차가 이뤄지지 않았기에 그는 그저 조용한 퇴사를 했을 뿐이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분의 전임 팀장도 그룹 본사에서 와서 입사한 지 3개월 만에 성추행으로 퇴사를 했던 전례가 있었다. 이런 사건이 연이어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은 회사가 매우 이례적인 상황에 놓여있었고, 이 이례적 상황을 해소할 임무를 가진 이들이 자신들의 역할과 책임을 권력과 권능으로 사용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권력과 권능 실행을 주변에서 견제하거나 통제할 마땅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부 고발로 그룹 본사에서 감사(Audit)가 진행됐다. 직원 사찰(伺察)을 종종 지시하셨던 대표이사는 반대 상황에 닥쳐 퇴사를 하시게 됐다. 그 외 C레벨 몇 분도 옷을 벗게 됐다. 주요 계열사의 이런 상황을 빠르게 수습하려면 유능한 매니지먼트와 경영 부문을 단속하고 지원, 관리할 리더가 필요했다.
그룹에서도 유능하다고 정평이 났고, 우리 회사를 잘 알고 계셨던 매니지먼트가 오셨다. 그러나, 함께 온 리더는 그렇지 못했다. 그 리더는 인사 부문을 총괄하면서 내부 감사를 통해 정리한 C레벨 외에 잔존 세력들을 추출하는 임무를 가진 듯했다. 눈빛은 늘 서늘했고 임직원 할 것 없이 모든 구성원이 그 앞에서는 큰 소리를 내지 못했다. 가끔 술자리에서 자신이 우리 회사로 오게 된 상황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했고, 어떤 중요한 임무가 뒤에 숨어 있음을 암시했다고 들었다. 수개월 간 이런 분위기가 이어지던 터에 사고가 터졌다. 역시 술자리가 문제였다. 사업부 여직원 몇 명을 성희롱한 것이다. 그것도 ‘채용과 직무’를 조건으로. 당시 피해자 중 일부는 계약직이었고, 정규직 전환에 대한 언급이 그 자리에서 있었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첫 번째 사건이 발단이 되었고, 2~3주 후 이 분은 퇴사를 했다. 훗날 다른 분들을 통해 들은 소식은 여전히 다른 대기업에서 HR업무를 담당하신다고.
이 분이 가신 지 일주일 후에 두 번째 사건의 가해자가 우리 회사로 ‘내려온’ 것이었고, 그 역시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전임자의 뒤를 밟게 됐다.
마치 이솝우화의 ‘개구리와 그들의 왕’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지 않은가?
기실 이들은 그룹 본사에 있을 때는 그 업무 실적과 품행에 대해서 문제가 없었던 분들이었다. 그런데, 왜 계열사로 ‘내려와서’ 이런 사건의 가해자가 되고 결국 불명예를 안게 됐을까?
내가 ‘내려온, 내려와서’라는 표현을 강조한 이유가 있다. 일반적으로 영어식 표현으로는 Move to, Transfer to가 맞는 표현이겠지만, 이들이 느꼈던 것은 Come down, 즉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격이 떨어지는’ 이런 느낌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런 뉘앙스는 기획조정실이나 연구소 등 그룹 본사 직원들 과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쉽게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나는 기획조정실 담당들과 커뮤니케이션할 상황이 많았는데, 대부분은 그 담당자들에게 혼나는 일이었다. 그들은 계열사 지원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지원이라 기 보다는 특정 상황을 문제로 꺼내어 이를 채근하고 나무라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입으로는 깍듯한 표현을 쓰지만 말로 하는 것 외에 심지어 제스처까지도 그룹 본사와 계열사의 차이를 표현하려 애썼다.
이런 뉘앙스는 그룹 집체 교육을 받으러 가면 또 느껴지는데, 같은 직급이 모인 교육장에서조차 본사와 계열사가 나뉘고, 계열사 간에도 다시 Tier를 구분하여 모이고 챙긴다. 한 그룹사 안에서도 이런데, 하청 업체와의 관계는 또 어떨까?
성추행, 성희롱 사건으로 이 글을 시작했지만, 결국 하고 싶은 얘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계층’에 대한 얘기다.
출생일, 출신지, 학력, 학벌, 회사, 직무, 직급, 재산 등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Label을 갖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그 Label에 적혀 있는 상대의 데이터를 읽고는 내가 비교 우위인지 아닌지를 우선 판단한다. 사회생활에서는 가장 크게 눈에 띄는 것이 바로 명함(Business Card)에 박혀 있는 회사 로고이며 그다음이 그 사람의 직무와 직급이다.
이렇게 명함을 주고받고 나면 바로 사회적 계층을 서로 나눈다. 누군가는 위로, 누군가는 밑으로.
수평적인 조직문화를 갖니 마니 이런 얘기들을 떠들어 대고, 기성세대 꼰대 부장과 MZ 세대들의 세대 갈라 치기가 문제니 뭐니 얘기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 한 회사 안에서의 이슈이지 그 회사 밖으로 나오면 MZ 대리, 과장들도 그들과 거래하는 하청 업체 담당들과 그들이 그렇게도 주장하는 수평적이고 합리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할까?
내가 지금 젊은 세대가 아니어서 단정할 수는 없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계층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결국, 앞서 언급했던 성추행, 성희롱 사건도 그 원인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인성과 인격, 그리고 개인의 실수에 대한 잘잘못과 더불어 우리들 머릿속에 깊게 박혀 있는 사회적 계층에 대한 인식과 그 인식 가운데 새겨 있는 어떤 선(線)에 대한 문제였다.
그 선(線)은 위험(RISK)라고 부른다.
그 선을 넘으면 문제가 되고, 그 선 상에 있으면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것이다.
잘못 살짝만 넘어도 문제가 된다.
그 문제는 직장 내 괴롭힘의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이 선을 나도 왕왕 올라서고 넘어 탔었다.
제휴사, 협력업체 직원들과 담당자들에게 쉽게 얘기하고 그들을 대할 때 내 표정과 언행은 상당히 고압적이었으며 함부로 말하고 협의하려 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미 내게는 잊힌 기억이지만, 그 기억 속에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나들며 사회적 괴롭힘을 하는 나 역시 가해자였을 수 있다는 생각에 기억을 더듬으며 반성을 한다.
송길영 작가의 핵개인의 시대에서는 권위의 시대가 사라진다고 했다.
이제 더 이상 선배가 갖는 권위는 없어지고 각각 개인이 갖는 역량과 능력에 따른 사회적 계층에 변화가 일 거라는 얘기다. 그런데, 이는 어디까지나 학연, 지연, 회사연에 대해서만 국한된다.
우리가 여전히 명함에 쓰여 있는 회사 로고와 직무, 직함으로 계층 구분을 하려 하면 앞선 사례와 같이 한 직장을 넘어선 다른 조직으로 괴롭힘과 의도치 않은 가해 상황이 충분히 벌어질 수 있다. 따라서, 회사의 인사정책 및 교육과 더불어, 개개인이 갖는 사회적 예의와 윤리, 도덕에 대한 단속도 중요함을 강조하고 싶다.
본사, 계열사, 제휴사, 협력사
이는 모두 역할에 대한 구분이지 계층에 대한 구분은 아님을 우리 모두 인지하고, 각각의 사회인으로서 역할과 책임만을 충실하기를 바라 본다.
- 까칠한 펜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