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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년교생 Jul 11. 2022

꽃은 물을 주는 만큼 자란다

관심으로 틔워내는 모범생

선생님, 혹시 OO대에서 진행하는 진로캠프에 참여하면 체육교육과 진학에 관한 정보 좀 얻을 수 있을까요?


3교시 공강 시간 때였다. 화장실에 간다고 강당을 지나던 차였는데, 우리 반 반장이 농구를 하다 말고 달려와 땀을 뻘뻘 흘리며 물어본다. 큰 덩치에 까불까불 한 남학생이다. 워낙에 성격이 좋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다 보니 학기 초에는 다른 선생님들로부터 수업 방해가 잦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리곤 했다. 그러던 녀석이 한 학기 정도 만에 꿈이라는 게 생겼다. 게다가 이제는 제 꿈을 이루기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무언가를 하기 시작한다. 나는 푸른 새순이 어설프게나마 제 힘으로 흙을 뚫고 올라오는 그림을 선명하기 떠올다.




나는 도지역 시골의 일반고에 근무하고 있다. 대부분의 시골 일반고가 그렇듯, 아이들은 오늘 하루를 즐겁게 보내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편이다. 이전 학교와 지금 학교의 분위기는 상당히 다르다. 나름 학구열이 강했던 전임교는 고1부터 아이들이 그룹 과외다, 스터디다 여러 가지를 꾸려서 스스로 공부하는 분위기가 잡혀 있었다. 아이들이 제 스스로 공부를 하는 판에서는 교사가 무엇을 하든 할 맛이 난다. 마치 스펀지에 물을 끼얹듯, 교사의 설명이 여과 없이 아이들의 머릿속으로 스며드는 것이 눈앞에서 보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대화를 할 때도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신이 나는 법인데, 수업은 오죽하랴. 내 수업을 잘 들어주는 학생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주말을 기꺼이 헌납하고 수업 준비를 한다. 학생의 성취는 계속 올라가고 수업의 질도 계속 올라간다.


하지만 반대로 대부분의 학생들이 자거나 휴대폰에만 빠져 있다면 어떨까. 휴대폰을 수거하면 멍하게 있거나 옆의 친구와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화려한 수업 자료로 집중을 시키는 것도 잠시다. 아이들은 교실에서 끝없이 '지금'의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얘들아, '행복'을 좇는 건 좋지만 조금 미래의 행복도 신경 써야 하지 않을까? 나의 공허한 다그침에 '네 선생님' 하는 개구진 대답도 잠시, 5분 만에 다시 떠들기 시작한다. 하나씩 보면 너무나 착하고 순진한 아이들이라 그 악의 없는 소란에 웃음과 막막함을 동시에 느낀다.




공부가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아이는 없다. 우리 사회의 학벌주의가 가진 문제점은 차치하고서라도 당장의 대학이 자신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아이들은 공부를 하지 않을까. 현장의 상황에 따라 다양한 원인이 있겠으나,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는 대다수가 진로나 진학에 대한 정보 부족인 경우가 많았다. 좀 더 나아가서는 도대체 이 세상에 어떤 직업이 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학기 초 학생 기초조사에서 한 학생은 돈을 만지는 직업을 하고 싶다고 했다. 얼마 전에 이 학생을 따로 불러 네가 아는 직업 중에 돈을 많이 만질 것 같은 것에는 무엇이 있냐고 물었더니 이 학생, 한참을 고민하다가 현답을 찾았다는 듯이 야심 차게 대답한다.


비트코인 딜러요!


침을 꿀꺽 삼킨다. 참고로 그날 아침은 루나 발 비트코인 폭락으로 온갖 암호화폐 시황이 엉망인 날이었다. 왜 비트코인 딜러가 되고 싶냐는 물음에 학생은 천진하게 대답한다.


그게 돈 제일 많이 만지는 직업 아니에요?


아뿔싸, 눈앞이 아득해진다. 만약 암호화폐를 금융계의 새로운 신호탄으로 읽고 이 분야를 전공하겠다고 한다면 그건 문제가 될 게 아니다. 그러나 이 학생의 대답은 그런 치열한 고민 끝에 나온 부류가 아니었다. 그저 지긋지긋하게 묻는 '커서 뭐 할래?'에 대한 자포자기식 대답이었다.


나는 학생을 곁에 앉혀 놓고, 부족한 지식으로 자본주의가 돌아가는 원리와 은행의 역할, 자산 시장의 대충을 설명했다. 그리고 함께 노트북으로 이러저러한 것들을 한참이나 검색하며 금융계 직업의 양상을 하나씩 소개해줬다. 두어 시간이 지났을까, 이 학생의 꿈은 한국은행 입사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명문대 경제학과 진학이라는 목표까지 세웠다. 부족한 수학 등급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하교 후, 수학 문제집부터 사겠다고 한다. 옆자리 수학 선생님의 도움으로 학생 수준에 맞는 문제집도 하나 추천받아서 돌아갔다. 물론, 한국은행 입사라는 꿈을 실제로 해낼 수 있느냐는 학생의 몫이다. 그래도 막연히 비트코인 이야기만 하며 수업시간에 아무것도 하지 않던 학생이 그날부터 무언가를 하기 시작했다. 이 학생의 미래가 어찌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이 작은 기울기의 변화가 학생의 삶을 긍정적인 쪽으로 이끌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반은 학기 초, 문제반으로 여러 선생님들께 지적을 받았었다. 가장 떠들기 좋아하고, 가장 개구쟁이 녀석들이었다. 이 녀석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다가, 전임교에서 쓰던 방법을 떠올렸다. 전임교에서는 예비 고3들을 2월부터 불러서 계열별로 전공 스터디를 시켰다. 진로가 비슷한 녀석들끼리 공부든 생기부 활동이든 좋은 것들은 주고받으며 서로 배워라는 취지였다. 이렇게 하면 교사도 지도하기가 편했다. 비슷한 계열의 경우 스터디 별로 불러서 한 번만 지도하면 됐다. 같은 말을 반복하며 무의미하게 뺐을 힘을 아껴 새로운 콘텐츠를 개발할 수 있었다. 실제로도 해마다 효과가 좋았고 학부모들로부터 반응도 뜨거웠다.


고1에게 고3 방식이 먹히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그중에 가장 눈에 밟히는 녀석들 대여섯을 우선으로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 지를 물었다. 아이들 희망 진로에 대한 대강의 윤곽이 나오고 나서는 계열별로 녀석들을 묶었다. 그리고 좋든 든 공람에 진로 관련 정보가 뜰 때마다 인쇄해서 나눠주었다. 목표 대학의 작년도 입시 결과를 바탕으로 내신이나 모의고사 결과가 나올 때마다 쓴소리도 했다. 오며 가며 각자 희망 전공을 위해 공부를 얼마나 하고 있는 지도 물었다.


누군가에겐 분명 귀찮은 잔소리였을 것이다. 그래도 몇몇의 아이들은 생활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아직까진 교실에 선생님이 없으면 여전히 떠들지만, 적어도 수업 시간이나 자습시간엔 사뭇 모습이 달라졌다. 반 분위기를 주도하던 몇 녀석들이 아침 시간에 책을 펴고 앉아있기 시작한다. 그 몇몇이 변하자 나머지 아이들도 분위기를 타고 함께 변하기 시작했다. 아주 더디고 느리지만 다들 조금씩은 바뀌고들 있었다.


한 학기가 지나니 서른 명이 조금 넘는 반에서 대여섯은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까불거리던 녀석들이 요즘 들어 제법 '모범생'이 되었다는 말도 들린다. 멍하게 있던 녀석들이 처음엔 만화책이라도 잡더니, 학습 만화를 보기 시작했고, 그 후로는 진짜 교과서도 가끔은 본다. 누가 알아주지는 않더라도 내 반의 모종들이 잘 자라고 있는 것 같아 혼자 마음이 뿌듯하다. 집안의 친척 할머니께서 봄비가 그치고 밭에 새순이 올라오면 그리 좋아하시던 것이 생각난다. 사람도 나무와 같다면 반의 아이들은 지금 새순쯤 되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남 앞에서 말하기 좋아하고 은근히 오지랖이 넓어서 여기까지 왔지 싶다. 해마다 옆 선생님들의 학급 경영을 어깨너머로 훔쳐보며 조금씩 배우고는 있지만 아직까지도 내 방식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학교가 해야 할 여러 가지 일들이 있다지만 그래도 고등학교라면 아이들이 살아갈 제 길을 찾아주는 게 가장 우선이지 않을까. 내가 내 성격대로 오지랖을 부려 누군가의 삶이 좀 더 괜찮아진다면 그건 참 괜찮은 일이지 싶다. 여름을 지나고 겨울이 올 때 즘에는 지금보다 몇 명 더 틔워낼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은 기대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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