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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년교생 Sep 29. 2022

교실 속 읽기 격차

읽기 격차의 해소(ALEX QUIGLEY, 2022)를 읽고

2015 개정 교육과정에 의해 고등학교 국어 교실에서는 '한 학기 한 권 읽기'라는 활동을 수행한다. 이 활동의 취지는 아이들이 한 학기 동안 몰입해서 한 권의 책을 다 읽어보는 경험을 갖게 하는 것이다. 우리네가 자라던 예전과 달리 요즘 아이들은 한 편의 책을 몰입해서 읽는 경험을 가지기가 대단히 어렵다. 학생들이 늘 풀고 있는 수능 국어 영역에서는 낱낱으로 쪼개어진 짧은 설명문을 주고 고부담 시험 상황에서 해당 글을 읽어내는 독서행위를 요구한다. 이는 우리가 자유롭게 한 권의 책을 읽는 여가 독서나 취미 독서와는 거리가 먼 종류의 읽기이다. 학생의 읽기 능력을 숙련되게 만들려면 일상 속에서의 꾸준한 읽기가 필요한데, 이런 균형 잡힌 읽기 능력 향상을 위해서는 긴 호흡의 글을 읽는 것도 필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요즘 고등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책 한 권을 읽게끔 격려하고 있다.


그러나 교실 상황을 뜯어보면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학급 당 학생 수가 30명이 넘어가는 과밀학급에서는 교사가 학생 하나하나에 관심을 기울이고 세심한 지도를 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 호통을 쳐서 교실을 조용하게 만드는 것은 쉽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적지 않은 수의 아이들이 '그저 가만히만' 있다. 학업에 대한 전반적인 집중력이 낮은 남학생들은 이런 경향이 더욱 심하다. 책 읽기를 매우 불편해하고 꺼려한다. 웹소설이나 만화책이라도 보라고 기준을 한껏 낮춰주어도 녹록지 않다. 웹툰도 글이 너무 많으면 순위에서 밀린다고 한다. 우리 아이들은 읽기를 도통 안 하기도 하고, 못 하고도 있다.




ALEX QUIGLEY(김진희 옮김)의 <읽기 격차의 해소>를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교사라면 심각한 읽기 장벽(barriers to reading)에 부딪친 학생들을 지도하기 위해 고투한 경험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학생을 어떻게 하면 잘 도울 수 있는지를 알고자 하는 강한 열망으로 이어진다. 교실에서는 늘 학생 간의 읽기 격차가 존재한다. (중략) 독해력(reading comprehension)이라는 근소하고 숨겨진 격차는 점차 학업 성패까지 가르게 된다. (p.27)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실제로 '한 학기 한 권 읽기' 시간에 집중하지 못하는 학생들은 거의 완벽하게 하위권에 속해있다. 반대로, 자신과 진로군 및 계열이 비슷한 친구들과 같은 책을 읽고 점심시간에 토론까지 하는 학생들은 완벽하게 상위권에 속해있다. 책을 대하고 즐기는 태도가 학생의 학업 성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어디서 이런 읽기 격차가 발생하고 있는 것일까? 교사로서 이 물음에 대한 답은 '학교 교실 안'이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지만, 실상은 가정 요인이 매우 크다. 책에서는 이와 같은 말을 언급한다.


부모에 의해 5세까지 정기적으로 책을 읽으면서 자란 모든 아동은 16살이 되면 가정 내 읽기 활동을 하지 않은 아동보다 수학, 어휘, 맞춤법에서 우수한 성적을 보인다는 연구 결과가 보고되었다. (중략) 만약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도서관에 가 본 경험이 전무하고 책 속 인물들을 접해 본 경험조차 없는 아이가 있다면 교실 내 읽기 격차는 반드시 발생하게 된다. (p.23)


나 역시나 매년 학생들을 상담하다 보면 가정에서 부모와의 대화가 많고, 주제가 풍부할수록 아이의 학습 이해력과 문식력이 높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부모가 매일 휴대폰으로 야구경기를 보며 큰 소리로 욕설과 함께 선수의 이름을 부르짖는 가정과, 지역 일간지를 아침마다 보며 주위의 문제에 세심하게 관심을 기울이고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이야기하기를 즐기는 가정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이런 서로 다른 가정환경에서 짧게는 8년, 길게는 16년을 지낸 후 학생은 교사와 만난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된 학생은 수능 문제를 풀이할 지식은 부족할지라도 살아가며 익혀야 할 기본적인 바탕은 대부분 학습한 상태다. (이때 기본적이라는 것은 정서적인 부분을 포함한다.) 가정에서 확고하게 굳어진 것들을 몇 시간의 교실 수업으로 깨부수기란 대단히 힘든 작업이다. 가정의 문식 환경이 학생의 정서에 영향을 미친다거나 학업 성취도에 영향을 준다는 연구 결과는 얼마든지 많다. 그 유명한 콜맨 보고서(J. Coleman's report)를 떠올려보라. 가정의 자본이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이다. 마치 컵 안에 갇힌 벼룩이 높이 뛰지 못하는 것처럼 가정에 있는 '아비투스(habitus)'는 아이가 자라 날 천장의 높이가 되어버린다.




사실, 이처럼 가정의 역할이 절대적이라는 내용을 볼 때마다 나는 무기력함을 느낀다. 사범대에 원서를 낼 때만 하여도, 면접에서 왜 진학을 하느냐는 물음에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고 싶다'라고 답을 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교실 수업이라는 것이 얼마나 제약이 많고 그 영향이 미미한 지에 대하여 점차 생경하게 느끼기 시작한다. 가정에서 이미 '될 사람'으로 키워진 아이와 '되지 못할 사람'으로 키워진 아이의 격차는 정말로 좁힐 수 없는 것일까.


책에서는 이러한 가정 문식 환경의 역할을 학교가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가정이라는 개별 요인에 의해 학생의 독서 능력이 결정지어진다면, 부모의 배경이 훌륭하지 못한 학생이 배움의 기회를 잃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 훌륭한 말들을 두고서 우리네 교실을 떠올린다. 과연 이런 이상과 우리의 현실 사이에는 얼마만큼의 간극이 벌어져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간격을 좁히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또 걸릴까.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이상과 현실 간의 간극을 좁혀가는 것은 연구자와 교사의 몫이다. 우리가 지난 한 세기 동안 그래 왔던 것처럼 꾸준한 노력 끝에 조금씩 교실은 진보해나갈 것이다. 그래도 당장 나의 교실에서 해소되지 못하고 있는 읽기 격차의 문제에 대한 조급한 답답증은 어쩔 수가 없다. 읽기가 왜 중요한지도 모르고,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해야 '읽기가 중요하고 지금 배워두지 않으면 살아가며 곤란한 상황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설득할 수 있을까.




이런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결국 생각의 끝은 '내 아이는 어떻게 길러야 할까'에 이른다. 아직 아이가 없지만 나중에 키운다면 어떻게 기르는 것이 좋을까 고민을 해보게 된다. 나라고 확신은 없지만, 적어도 집에서 책을 자주 읽는 모습은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책을 억지로 읽히게 하는 것보단 내가 읽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줘야지 싶다. 아이는 부모의 표정과 반응을 보며 부모의 취향을 물려받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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