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브런치에 썼던 글을 발행하고 삭제한 일이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공개하는 글쓰기 모임을 하고 있어 글을 올려야 하는 날이었다. 그 주는 유독 글감이 잡히지 않아 시간을 흘려보내고 결국 약속된 시간이 임박해 예전에 쓴 글을 부랴부랴 재편집해서 발행했다. 반려묘 나나의 시점으로 보는 나의 이야기였는데 독자 모드로 다시 읽으니, 나나에게 나는 우악스럽고,폭력적이며 무심하기까지 한 엄마였다. 분명 내가 쓴 글인데 스스로 악마의 편집을 하다니! 이게 정말 나를 향한 나나의 마음일까? 나는 왜 나나가 이런 부정적인 시선으로나를 볼 거라 생각하는 걸까? 나나에 대해 다시 천천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엄마, 동생 삼고 싶은 고양이를 찾았어. 이 사진 봐봐. 너무 이쁘지!"
아들이 휴대폰으로 새끼 고양이 사진을 보여주었다. 짙은 녹색 눈동자에 반지르르한 회색털을 가진 고양이 러시안블루다. 아들은 러블(러시안블루)이 목소리도 상냥하고 성격도 온순하여 사람과 친구처럼 잘 지내는 소위 개냥이 과라고 본격적으로 내 마음에 호소하기 시작했다. 식구들 모두 고양이를 키우는데 찬성인지라 아들은적극적이었다.
반려 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이 많지만, 막상 우리 집에 들인다고 생각하니 고민이 깊었다. 소중한 생명이기에 감당해야 하는 여러 책임들이 있을 것이고,우리 가족의 건강과위생상의 문제들도 생각해야 했다. 특히 고양이는 털을 뿜는 존재라는데 집안 청소는 또 어찌할 것인가. 반려묘는 내 손을 제일 많이 필요로 할 것이고 네 식구 건사하기도 힘든데 말 못 하는 동물까지 케어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아팠다. 아들은 6년간 기다려온 최신 아이폰을 포기할 테니 대신 반려묘를 키우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초등 내내 폴더폰을 쓰면서 졸업 선물로 스마트폰 받을 날을 기다려온 그 마음을 알기에 마냥 반대할 수가 없었다.
일단 아들이 찜한 고양이를 보러 반려동물 분양 샵에 갔다. 사장님은 러시안 블루 새끼 고양이 네다섯 마리가 있는 곳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케이지 안엔 낮잠도 자고 사료도 먹고 서로 엉켜 놀고 있는 회색빛의 고양이들이 있었다. 그런데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노래 가사처럼 난데없이 하얀 털에 크고 파란 눈을 한 고양이가 우리 가족에게로 앙금앙금 다가왔다.
"어! 이 고양이는 하얀 털빛에 파란 눈동자네."
나는 반가움에 아들을 쳐다보았다. 사실 어릴 때 읽은 애드가 앨런 포우의 <검은 고양이> 속 강렬한 이미지 때문에 고양이 자체를 무서워하기도 했고, 개인적으로 밝은 털색의 고양이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러블 중에 드물게 화이트가 있기도 한데, 이 아이가 '러블 화이튼'가 보다. 엄마는 얘가 좋아?"
아들이 물었다. 눈치 좋은 사장님이 우리에서 하얀 고양이를 꺼내 조심스레 나에게 안겨주었다. 너무 가벼워 무게 감이 느껴지지 않는 작고 연약한 몸. 안고 눈을 맞추니 빨려 들 듯 투명한 푸른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사실 털빛이 희고 큰 눈이 매력적이긴 했지만, 새끼 고양이는 덕지덕지 앉은 눈곱에 털도 고르지 않고 너무 말라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내 귀엔 종소리가 들렸다.
'이 아이여야 해!'
나는 식구들을 둘러보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회색빛은 아니지만 무조건 러블 화이트라고 믿었던 아들은 좋다고 했고 식구들도 모두 찬성하여 그날로새끼 고양이는 우리 식구가 되었다. 아들은 '나나'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알고 보니 나나는 터키쉬 앙고라였고, 사장님이 묵인하셔서 한동안 우린 진짜 러블 화이트인 줄 알았다는 출생의 비밀이!!!)
나나는 첫날부터 자기 집인양 활기차게 집안을 탐색했다. 사료도 맛있게 먹고 가르쳐 주지 않아도 화장실을 찾아가 용변을 보는 게 마냥 신기했다. 특히 세상 편안한 자세로 잠을 자는 나나를 보면 나를 어찌 믿고 저리 태평하게 잠을 자는지, 그 천진함이 사랑스러워 작은 귀에 대고 주문처럼 속삭였다.
"우리 집에 와줘서 고마워. 건강하게 잘 자라. 우리 행복하게 살자."
낚싯대, 어묵꼬치, 작은 쥐돌이 등 장난감을 쫓아 요리조리 뛰고 점프하고 하루 종일 꼬리를 바짝 세워서는 도도하게 걸어 다니며 우리 가족을 웃게 하던 아깽이 시절의 나나. 그런 나나와 함께 한지도 어느새 햇수로 7년, 이제 작고 여린 새끼 고양이는 어디 내놓아도 덩치로는 밀리지 않을 깜냥에 '사냥이 뭐예요?'라고 말하 듯 하루의 절반을 먹고, 자는 뚱냥이 되었다.
사실 요즘 나나를 보면 좀 걱정스럽다. 장난감 사냥놀이엔 싫증이 난 듯 움직임이 적고, 운동량이 떨어지니 식사량도 줄었다. 대신 간식을 달라고 졸라댄다. 아픈 것 같진 않은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심드렁하니 무기력해 보인다. 이런 나나를 보고 있으면 야생에서자유롭게 살아갈 동물을 중성화시켜 좁은 집에 가두고, 사료에 간식을 먹이며 무료해서 잠만 자게 하는 것이 저 아이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안쓰럽다. 식구들은 각자의 일이 있어 나나와 종일 놀아주거나 함께 있을 수 없고 여행이라도 갈라치면 혼자 있는 나나가 신경 쓰여 마음이 불편하다. 이 아이가 우리 집에 와서 불행하다고 느끼면 어쩌지 무엇을 해주어야 하나 조급해지기도 한다. 나의 고민을 들은 지인이 길고양이들은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데 영양 상태와 수면의 질이 나빠 질병에 걸리기 쉽고,온갖 위험에 노출되어 2,3년 밖에 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안전해야 비로소 행복도 느낄 수 있지 않냐며 나나는 행복하게 사는 거니 걱정하지 마시라 위로해 주었다.
나나를 위한 안전지대가 되어주는 우리 집.
유능한 집사는 못되어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은 진심인 나다.
정말 이것이면 된 것일까?
자고 일어난 나나가 옆으로 와 내 얼굴에 머리를 박는다. 번팅이라고 고양이가 보내는 친근한 인사다. 답례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나도 가볍게 이마를 부딪쳐 주었다. 글을 쓰던 중이라 마무리 지으려고 계속 자판을 두드리고 있으니 나나가 노트북을 꾹꾹 밟고 지나간다. 달랑 들어다 바닥에 내려놓으니 발목을 자근자근 문다.
"안돼"라고 말하고 코를 톡 두드리자, 옆에 와 등을 보이고 앉는다. 미안한 마음에 궁둥이 팡팡을 해 주니 또 꼬리가 쓱 올라간다.한숨 같은 웃음이 나온다. 마침 글쓰기가 재밌어지고 있었는데......
이렇게 곁에 와 애교를 부리니 무시하면 안 될 것 같아 나나를 안고 창으로 가 봄이 내려앉은 정원을 함께 보았다. 벚꽃이 져서 이 봄이 쉬이 끝나려나 아쉬웠던 마음이 무색하게, 며칠 사이 꽃불이 붙은 듯 흐드러지게 피어난 철쭉의 붉은빛이 눈부시다. 연보랏빛 라일락의 달콤한 향기 속에, 민들레, 제비꽃, 이름 모를 풀꽃들이 소담스레 돋았다. 물이 오른 나무의 연초록 잎들이 윤슬처럼 햇살에 반짝이며 한껏 기지개 켜는 봄날, 여기 이곳에 나나와 함께 있구나! 생각하니 행복해진다. 푸른 유리 알 같은 눈을 바라보며 코를 맞대니 느껴지는 촉촉함. 식구 중 나나의 페로몬을 가장 많이 묻히고 다니는 사람이 내가 아닐까. 나나가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이유일지도.
걱정을하느라 놓쳐 버린 것들을 떠올린다.
"나나야!" 부르면,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추고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해 주는 너.
제일 좋아하는 챠오 츄르를 먹으면서도 눈은 내 얼굴을 바라보는 너.
무심히 다가와 핥아주고, 등을 비비고, 때로 감정이 차올라 주책없이 울음이 터지는 날이면 어김없이 품을 내어주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너를.
부드러운 털에 얼굴을 비비며 낮게 울리는 골골 송에 귀를 기울인다.
"이런저런 생각을 멈추고, 나에게 집중해 줘. 네가 좋다고 온 몸으로 말하고 있잖아!"
순간, 나나의 마음이 느껴진다. 사랑이 사랑임을 아는 것도 의미 있는알아차림이란 생각이 든다.
하루 중에도 여러 감정이 교차하고, 상대를 향한 마음에도 다양한 감정들이 뒤섞인다. 그중
한 가지 감정에만 유독 치우쳐 허우적대면 건강한 소통의 흐름이 막히고 정작 가치 있는 것들을 놓쳐 버릴 수 있다.함께 살아가는 것은 잘 알아차림의 연속일 것이다. 그의 불편함을 알아 도와주고 배려하는 것이 필요하듯, 그의 애정 어린 마음도 알아주어야 서로살맛 나고 행복하지 않을까.
연분홍빛으로 물들던 초봄이 지나고 세상 빛을 다 풀어내듯 화려한 봄이 피어나고 있다. 조금 더 따뜻해진 공기의 감촉, 너를 꼭 안고 다시 봄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