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바람' 그림책 독서 모임
나는 아침에 걷는 숲길을 좋아한다. 토독토독 우산에 부딪히는 빗소리를 들으며 걷는 길도 재미있다. 부드러운 손길 같은 햇살이 토닥이고 새소리, 물소리 전해주는 바람결을 느끼며 걷다 보면 구겨졌던 마음도 살살 펴진다. 그림책을 들여다보는 시간은 산책과 같다. 담백한 문장을 입안에서 굴리고 아름다운 그림을 찬찬히 보고 있으면 마음이 고요해져 산책하며 경험하는 치유의 순간을 만나게 한다. 그림책은 혼자 보아도 좋지만 여러 사람과 감상을 나누면 감동과 재미는 배가 된다. 나의 그림책 독서 모임 ‘책바람’은 그런 곳이다.
매달 넷째 주 금요일 오전 10시. 쌉싸름한 커피 향이 감도는 햇살 좋은 카페에 앉아 팀원들을 기다린다. 이번 달에 함께 읽을 그림책은 에바 린드스트룀의 『모두 가 버리고』다.
이 그림책 속 주인공 프랑크는 친구와의 관계에서 상처 입은 소년이다. 누가 상처를 준 것도 아니지만 스스로 어울리지 못해 눈물 흘리는 아이. 소년은 흐르는 눈물을 냄비에 담고 400밀리리터 설탕을 넣어 마음이 회복될 때까지 저으며 끓인다. 마침내 눈물의 마멀레이드 잼이 만들어졌을 때 소년은 창문을 열고 친구를 기다린다. 친구들 역시 같이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가 버린 소년이 신경 쓰여 그의 집 창문 아래에 모여있다. 소년은 갓 구운 빵과 눈물의 마멀레이드 잼을 들고 친구들이 있는 마당으로 나간다. 어떻게 되었을까? 친구들이 맛있게 먹어주었을까? 농도를 맞추기 위해 눈물 잼에 넣은 400밀리리터의 설탕은 뭘 상징하는 걸까? 눈물의 마멀레이드 잼은 어떤 맛일까?
마치 어린아이가 서툴게 그린 듯한 그림, 심리를 선명하게 드러내지만 그만큼 답답하게 하는 장면 속 장애물들은 은유와 상징으로 쓰여 처음 읽었을 땐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다. 그러나 우리의 감상이 깊어질수록 소년이 안쓰러워 촉촉해진 서로의 눈을 보았고, 자신과 관계 사이의 어려움을 알고 조절해보려 용기 내준 소년의 마음이 기특해 박수도 쳤다. 또, 그런 소년 곁을 쉽게 떠나지 않는 친구들이 있어 안심했다.
그림책의 마지막 장은 아이들이 모두 떠나고 남은 공간이다. 빈 그릇들로 어질러졌지만 답답함을 주던 기둥들이 사라져 시원해진 공간이 해방감을 준다. 하지만 여전히 그림이 주는 균형감은 어색하다. 그림책은 빵과 마멀레이드 잼을 먹었다고 해서 소년과 친구들 사이의 서먹함이 금방 사라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어려운 관계 속에서 노력하고 변화하는 그 성장의 지점을 응원하고 있다. 잔소리하듯이 가르치지 않는 그림책의 방식이 좋다. 하나로 꼭 집어낼 수 없는 복잡다단한 우리 각자의 마음을 은유해 더 풍성하게 느끼게 하는 그림책은 매력적이다.
이제 우린 그림책에 빗대어 들려주는 각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나는 오늘 아침 딸과의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영어 테스트가 있는 날이라 딸은 일어나자마자 짜증을 부렸다. 씻으러 가면서도 투덜거리길 멈추지 않았다. 공부를 좀 하면 될 텐데,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스쳤지만 그걸 아이가 모를 리 없기에 잔소리 대신 좋아하는 떡국을 끓였다. 매번 양파를 건져내던 딸이 생각나 오늘은 그냥 통양파를 육수로 사용해 맛을 냈고 시원한 수박은 썰어 일부러 씨를 빼놓았다. 딸은 양파가 없어 먹기 좋다며 떡국 한 그릇을 맛있게 먹고 수박도 베어 먹었다. 아침 식사가 맘에 들었는지 딸의 기분이 좀 풀렸다. 나는 딸에게 오늘 아침 식사에 너를 위한 두 가지 배려를 숨겨두었는데 눈치챘냐고 물었다. 딸은 떡국에 양파 뺀 거, 또 하나는 모르겠다며 가르쳐 달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건 비밀로 해 두자며 대신 꼭 하고 싶었던 말을 해 주었다. 너의 하루엔 영어 시간처럼 어려운 순간들도 있겠지만 좋은 일들도 준비되어 있을 테니 행복을 더 많이 발견하는 하루가 되길 바란다고. 딸은 엄마 말이 오글거리는지 멋쩍게 웃으며 학교로 갔다.
이런 이야기를 남들 앞에서 하는 건 왠지 부끄럽지만 가끔은 일상에 문학적인 이벤트가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 들려주었다. 역시 리액션 장인들이라 나의 이야기에 동아리 회원들은 요란스레 칭찬해 주었다. 그림책을 깊이 읽은 날은 내 행동도 좀 달라지더라며 나는 쑥스러워 웃었다.
이어지는 회원들의 이야기는 사춘기 아들딸과의 고군분투기였다. 유쾌하게 이야기하지만, 걱정돼서 하는 엄마의 말에 신경 쓰지 말라며 거부하는 아이를 보면 속상하고 걱정스러운 건 당연하다. 계획대로 되지 않아 몸이 상하고 마음이 상하는 아이들을 지켜봐야 하는 엄마 속은 또 얼마나 쓰라릴까! 사랑과 믿음으로 키우자고 다짐하다가도 아이의 행동이 엄마를 불안하게 하면 정제되지 못한 말들이 터져 나온다. 우린 서로를 살뜰히 위로한다. 아는 것과 실천은 달라 기대 같지 않게 못난 모습을 아이들 앞에 자주 보이지만 우리는 노력하는 엄마들이다. 오늘도 함께 이야기 나누며 웃고 우는 동안 서로의 마음에 기대 에너지를 충전한다.
혼자 걷던 나의 그림책 산책이 어느새 좋은 사람들을 만나 소풍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