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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야 Feb 10. 2022

내 안의 낮달이 빛을 낼 그날을 위해

머리를 다듬으며 떠오른 단상

 실크 커튼처럼 자르르하게 얼굴을 감싸며 목덜미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의 우아함. 상쾌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기분 좋게 나풀대는 머리카락의 경쾌함, 혼자 커피라도 마실라치면 외로울 내 얼굴을 살포시 가려주는 적당한 길이감의 머리카락은 또 얼마나 센스쟁이인지.


 중학교 때부터 한결같이 긴 머리를 고수하는 나는 어깨 정도 길이감의 헤어스타일을 좋아한다. 어릴 땐 생머리도 곧잘 했는데 마흔이 넘어서고부턴 굵은 웨이브 펌으로 유지 중이다. 미용실 가는 건 즐기지 않는다. 결혼 전엔 웨이브 펌이 맘에 들지 않으면 일주일 만에라도 생머리로 다시 푸는 파마를 하기도 했지만,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니 머리 하느라 들이는 돈이 아까웠고, 새로 한 파마가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러운 컬을 만들어내는 걸 좋아하기도 했다.


 최근 몇 년간은 일 년에 한 번 가는 연중 행차가 미용실 나들이였다. 사십 대 이후 늘어가는 새치도 셀프 염색으로 가리며 살만했는데, 올해 앞자리가 바뀐 나잇값을 하려는지 정수리에 내려앉은 흰머리와 푸석한 머릿결은 내가 손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 년에 한 번 가는 아파트 상가 미용실에 예약하고 염색하러 갔다. 스스로 구제가 불가능한 이 머리카락을 구원해 줄 누군가가 곁에 있다고 생각하니 든든했다. 예약한 시간에 미용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원장님이 나를 바라본다. 일 년마다 오는 손님을 기억할까? 의심하면서도 나는 밝게 인사한다.


 "오랜만이죠. 일 년에 한 번 오는 손님이랍니다."

 "오랜만인데, 왜 오랜만이 아닌 거 같죠."


 특유의 차분한 음성에 웃음을 담아 답해주는 원장님은 말이 많은 스타일은 아니시다. 그러나 예약제로 운영되는 1인 샵이다 보니 둘만 있는 공간의 어색함을 깨기 위해 머리 하는 내내 이런저런 질문을 하시고 우린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고받게 된다. 이 아파트에서 6년째 살고 있으니 한 다섯 번 정도 본 사이겠다. 그럼에도 해가 지날수록 반가운 친구처럼 아이 이야기, 세상 이야기, 종교 이야기, 때론 내밀한 가정 이야기도 나눈다. 우리가 티키타카 말을 주고받는 사이 원장님은 전문가다운 손길로 내 머리카락을 자르고 염색약을 칠하고 샴푸를 하고 드라이까지 마친다. 이상한 나라에 온 앨리스처럼 나는 그저 즐겁게 떠들고 힐링했는데 거울 앞에 짙은 밤색 머리에 윤기 나는 적당한 컬의 머리카락을 흔들어 보는 내가 있다. 잡풀이 무성한 쓰러져가는 고택의 정원 같던 내 헤어스타일이 전문가의 손길을 만나 잘 다듬어진 정원이 되었다. 원장님을 바라보는 내 눈이 경외감으로 반짝였을 것이다. 비용을 지불하고 받는 시술이지만 내가 어쩌지 못하는 것을 해결해 주는 능력자는 감사한 존재임에 분명하다.


 머릿결에 손가락을 넣어 쓸어보니 매끄럽게 흘러내린다. 새치도 사라져 한결 어려 보이는 모습을 보니 주로 다니던 지하가 아니라 정원을 지나 집으로 가고 싶어졌다. 적당한 바람에 머릿결이 날리는 그 느낌을 누려보고 싶었다. 아직은 차가운 바람이 부는 2월의 날씨, 그럼에도 봄날의 예고편처럼 목련 나무엔 한껏 물이 올라 꽃순이 봉긋하다. 새로운 계절의 기대로 마음이 설렌다. 누군가에게 소박하지만 기분 좋은 감정 하나라도 끌어올리는 존재가 부럽다. 오늘 내 헤어를 만져준 미용실 원장님처럼, 추운 날씨 속에서도 자기 몫의 아름다움을 피워 올리며 상상할 수 있는 즐거움을 주는 목련 나무처럼, 노래든, 춤이든, 그림이든, 책이든...... 사람들 마음을 잔잔하게 어루만질 수 있는 미적, 예술적, 기능적 능력을 지닌 존재들 말이다. 그들이 갈고닦아 쌓은 실력이 필요한 타인에게 가 닿으면 살살이, 피살이, 숨살이 꽃이 되어 생기를 돌게 한다.


 그렇다면 나는 타인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타인의 마음을 밝혀 줄 무언가를 지니고 있나? 하는 생각이 나를 멈춰 세워 정원 의자에 잠시 앉았다. 그저 주어진 하루하루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잘 지내 왔다고 안도했는데, 내 안엔 드러내 보일 마땅한 무엇이 없구나. 재능이 부족했는지, 열정이 부족했는지, 산다고 바빴는지......

 핑계조차 궁색하여, 하늘을 올려다보니 맑은 하늘엔 낮달이 떠 있다. 아직 희미하지만 분명한 모양과 형태를 갖추고 우직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달은 그의 때가 되면 스스로 빛나 누군가에겐 영감의 존재로, 벗으로, 길잡이로 그 순한 영향력을 미칠 것이다. 내보일 거 없는 내 안에도 빛을 낼 시절을 기다리는 낮달이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한 시간에는 일 분이 육십 개가 있다.
하루에는 무려 천 개가 넘게 있다.
절대 잊지 말아라.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괴테>


나의 내면엔 채워 넣을 여유 공간이 있고, 시간이 있고, 마음도 있다.

봄의 문을 여는 2월이다. 헤어 디자이너의 손끝에서 가벼워진 머리 스타일만큼 마음도 가볍게 이 봄을 맞을 수 있을 거 같다. 올해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열정이라는 노력으로 빚어보는 해가 되기를. 기분 좋은 희망이 마음 가장자리로 스며든다. 꿈꾸기 좋은 봄이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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