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아이의 눈에는 크게만 보이던 운동장, 육십 명 가까운 아이들이 들어차 있어도 좁은 줄 몰랐던 교실, 짝꿍과 함께 쓰기에 넉넉했던 책상이 이렇게 작아 보이다니! 허리 아래로 키 낮은 신발장이 쭉 이어져 있는 복도를 걸으며 둘러보는 초등학교의 모습은 올망졸망하다. 1학년 3반, 벽에 붙은 학급 알림판에서 아이들과 함께 찍은 엄마 얼굴을 확인하곤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본다. 학생들이 빠져나간 고요한 교실, 잘 정돈된 책상에 엄마가 앉아있다. 드르륵 교실문을 여니 나를 보는 엄마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린다.
“해야! 엄마 데리러 왔어?”
“응. 엄마, 우리 날도 좋은데 경주 가자.”
“경주? 좋지.”
이십 대의 나는 시간에 여유가 있었고, 교사인 엄마는 여행을 좋아했다. 토요일이면 엄마 퇴근 시간에 맞춰 픽업을 가고, 우린 그렇게 즉흥적인 여행을 떠나곤 했다. 당일치기 마음 내키는 곳으로 훌쩍 나들이 갔다 오는 수준이지만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 이정표와 두꺼운 지도에 의존해 낯선 도시를 찾아다니는 경험은 매번 특별했다. 오늘은 감은사지 동. 서 3층 석탑을 보기 위해 경주로 향한다. 국도를 지나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휙휙 지나가는 풍경 속 물수제비 뜨듯 오동나무꽃이 보였다.
“우와! 저것 봐. 오동나무꽃이 피었네.”
엄마는 반가운 친구를 만난 듯 환호했다. 내 입에선 숨길 수 없는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 나왔다. 좋아하시는 꽃을 보여주고 싶어 나선 길이고, 오동나무는 올해도 딱 맞춰 꽃을 피웠다. 하늘을 향해 쭉 뻗어 올라간 키 큰 나무. 양팔을 펼친 듯 벌어진 가지에 보랏빛 꽃송이가 조롱조롱 달려 풍성한 다발을 이뤘다. 작은 종 모양의 꽃 하나하나는 아래를 향해 있는데 멀리서 보면 보랏빛 꽃다발이 위를 향해 핀 듯 보인다. 엄마는 이 모습이 꽃으로 밝히는 소망등 같아 특별하다고 하셨다.
차창으로 드문드문 보이는 오동나무꽃을 쫓다 보니 어느새 멋들어진 기와지붕을 얹은 톨게이트를 통과한다. 곧이어 ‘신라의 미소’ 수막새가 우리를 맞이하니 천년 고도 경주에 입성한 것이다.불국사, 석굴암, 첨성대 등을 알리는 갈색 문화재 표지판이 눈에 들어 오지만 시간이 촉박한 우리는 경주 시내를 벗어나 감은사지로 바로 달린다. 토함산을 넘어 추령재를 지나 동해 바다까지 이어진 길. 사계절 멋진 풍경을 보여주는 이 길은 감포 가도(甘浦 佳道)라는 애칭이 붙었다. 워낙 좋아하는 길이라 자주 드라이브를 다녔는데 그때마다 바다를 향해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는 두 개의 돌탑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신라천년의 역사를 품은 고장인지라 눈 돌리면 보이는 것이 문화재라고 하지만 그 탑은 마음을 흔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엄마도 저 탑이 예사롭지 않다며 궁금해하셔서 이번엔 감은사지 석탑만을 자세히 볼 참이다.
핸들을 요리조리 꺾으며 구불구불한 고갯길을 리듬감 있게 달려 나간다. 쓱쓱 눈앞에 다가서는 풍경은 농농한 봄의 연둣빛을 매달았다. 바람이 불면 서로의 몸이 부딪힌 나뭇잎들이 차르랑 소리를 낼 것 같은 싱그러움이 반짝인다. 운치 있는 이 길엔 감포 가도 외에 ‘신문왕 호국 행차 길’이라는 별칭이 또 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문무대왕릉’과 ‘감은사지’, ‘이견대’는 한 이야기로 묶인 세트다. 우리에겐 김춘추로 유명한 무열왕이 삼국 통일의 초석을 다지고 그의 아들 문무왕이 고구려를 정복하며 신라는 완전한 통일 왕국을 이룬다. 문무왕은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겠다는 의지로 바다에 그의 뼈를 묻으니 그 수중릉이 ‘문무대왕릉’이고, 호국의 열정을 담아 지은 절이 ‘감은사’다. 문무왕은 절의 완공을 보지 못한 채 승하하고 그의 아들 신문왕 2년에 감은사는 완공된다. 감은사에서 멀지 않은 곳엔 ‘이견대’라는 정자가 있는데 그곳에선 문무대왕릉이 정면으로 보인다. 신문왕이 우리가 감포 가도라 부르는 길을 따라 이견대에 와서 문무왕을 추모하고 감은사에서 쉬어갔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가 평화의 상징 만파식적을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으로부터 하사 받았다는 전설까지 덤으로 얹어, 세 곳은 걸출한 신라왕들의 서사가 담긴 유서 깊은 장소였다.
그런 곳을 우리는 그저 오며 가며 보이는 탑이 예사롭지 않다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찾았다니! 심지어 탑은 국보 112호였다.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갔지만, 가까이 다가선 감은사지 탑은 천년 역사를 지켜온 단단한 위용과 절제된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압도했다. 거대한 탑 앞에 넋을 놓고 서 있으니 마음속에 무언가 잃어버렸던 소중한 것을 되찾은 것 같은 울컥함이 목구멍을 달군다. 문무대왕릉과 마주 서서 호국의 염원을 밝혀주던 석탑에 담긴 신념 때문인지 흙 한 줌, 바람 한 자락, 공기의 한 호흡이 특별해지는 먹먹함을 경험하게 하는 곳. 엄마와 나는 한동안 말없이 감은사지 탑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곳은 우리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장소, 이름이 되었다.
“어! 오동나무꽃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보랏빛 오동나무꽃이 피었다. 시댁에 갔다 돌아오는 고속도로 위에서 만난 오동나무꽃은 기억 속 오월, 감은사지 석탑 앞에 서 있던 엄마와 나를 눈앞에 데려다 놓는다. 마치 동영상의 재생 버튼을 누른 듯 생생하게 떠오르는 기억. 그 시절 우리들의 이야기.
돌아갈 시간이 아쉬운 듯 엄마는 한 걸음, 한 걸음 느리게 걸으며 탑 주위를 돌았다. 그날 엄마는 탑돌이를 하며 어떤 마음들을 내려놓았을까!인생살이 고달픔, 마음에 품은 애달픈 사연을 하소연했을까, 문득 찾아드는 외로움을 달랬을까. 탑돌이 하는 마음도, 오동나무꽃을 좋아하는 마음도 욕심을 비우려 애쓰는 엄마의 성정과 닿아있음을 안다. 엄마도 사람인지라 원치 않는 오욕의 시절을 보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그 본심의 맑은 자리를 잃지 않으려 스스로 다독여 온 세월을 나는 보았다. 자식들에게 무엇 하나 넉넉하게 해 준 것이 없다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파란 많은 세월을 살며 엄마의 자리에 한결같이 있어 준 것만으로 힘이 되고 그것이 최고의 사랑임을 깨닫게 해 준 엄마여서 항상 감사하다.
오동나무꽃이 지기 전에 친정에 다녀와야겠다. 엄마의 안부를 묻고 소소한 여행이라도 하며 우리 곁에 아직 남아 있는 포근한 봄날을 함께 누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