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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야 Jan 27. 2022

일기장 속, 다정한 나의 봄

너의 처음은 나에게도 첫 경험


 2012년 아들은 초등 2학년 아홉 살이었다. 잠시도 집에 있지 않고 친구를 찾아 골목과 놀이터를 누볐던 아들에게선 항상 바람 냄새가 났다. 정녕 놀기 위해 태어난 아이처럼 하교 후 가방을 두고 휙 나가선 해가 져야 돌아왔다. 아홉 살 아들의 놀이 세계는 더러 나를 당황하게 했는데 한 날은 놀이터를 지나다 구덩이에 얼굴만 나와 있는 아들이 나를 불러 깜짝 놀랐다. 친구들과 바닥이 드러나도록 땅을 파고 거기 한 명씩 들어가 흙 이불을 덮는 놀이를 하는 중이라는데 재밌겠다고 말해 주었지만 저 옷을 어떡하지 한숨이 났다. 또 아들은 매미 유충 껍질이 보이면 뜯어 와 병에 모았다. 그것이 집 안 곳곳에 떨어져 있어 발에 밟히기라도 하는 날엔 소름이 돋았다. 밖에서 물풍선 놀이를 한 날은 머리와 옷이 흠뻑 젖어와 마루를 축축하게 만들고, 나갔다 오면 손을 먼저 씻으라고 가르쳤더니 흙 묻은 손으로 화장실 전등 스위치를 켜느라 그 주위 벽을 얼룩지게 했다. 활달한 아이를 키우려면 무던해져야 한다고 나를 다독이며 흙빛으로 더러워진 벽과 폭격 맞은 듯 어질러진 집안에 두 눈을 질끈 감는 들이었다. 그 무렵 아들은 자다 코피를 쏟는 날이 많았는데 아무래도 체력이 놀이 욕구를  따라가지 않았나 생각되었다.    

  

 일기장에 적힌 그 밤에도 아들은 코피가 난다며 나를 깨웠다. 얼른 일어나 휴지를 갖다주고 세 살 난 동생과 아빠가 깰까 봐 우리는 거실로 나와 코피가 멎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코피는 쉽게 멎지 않았고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나는 며칠 전에 사 둔 <<탈무드>>를 꺼내왔다. 내가 아들 나이만 했을 때 읽었던 책이고, 재치와 감동을 버무린 단편들이 많아 이 밤에 읽기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들이 뜬금없이 동생 그림책 앤서니 브라운의 <<우리 엄마>>를 읽어달라고 하는 것이다. 문장도 몇 개 없는 그림책을 아홉 살 아들이 읽어달라고! 그 당시 나는 그림책은 영유아들만 읽는 책이라생각했고 , 아들이 책 읽기 싫어 짧은 그림책을 보려 하나보다 짐작해 <<탈무드>>를 읽자고 설득했다. 아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재밌는 내용을 골라 몇 편을 읽어주니 코피가 멎었다. 시간도 늦어 다시 자러 가려고 책을 덮으니 아들은 기다렸다는 듯 <<우리 엄마>>를 읽어달라고 했다. 오늘 왜 자꾸 이 책을 읽어달라고 하지, 살짝 오글거리는 내용이라 낭독하기가 좀 부끄러운데...... 그래도 아들이 원하니 그림책을 찾아와 읽어 내려갔다.  

   

 '우리 엄마는 참 멋져요.

아기 고양이처럼 부드럽고, 코뿔소처럼 튼튼해요.

정말 정말 정말 멋진 우리 엄마.

나비처럼 아름답고, 안락의자처럼 편안한 엄마.

우리 엄마는 슈퍼 엄마! 나를 자주 웃게 해요.

나는 엄마를 사랑해요. 그리고...... 엄마도 나를 사랑한답니다! (언제까지나 영원히......)’

<우리 엄마> 중    

 

 몽글몽글 간질이는 문장들을 읽으며 곁눈질로 아들을 보니 수줍어 내린 눈꺼풀에 살짝 벌어진 입꼬리를 따라 코도 벙글다. 윗니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누르며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고 있는 모습이 세상 사랑스럽다. 뭐지! 문득 깨달아지는 마음.    

 

 ‘아들이 이 밤에 그림책을 빌어 엄마를 향한 세레나데를 부르고 싶었나 보다!’  

   

 밤하늘 환한 달빛으로 빚은들 지금 우리 아들 얼굴보다 고울까!

아들을 꼭 안아주고 침대에 눕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들은 곧 잠이 들었는데 달뜬 엄마 마음은 컴퓨터를 켜고 일기를 써 내려갔다. ‘잊어버리면 안  돼!’ 찰나의 순간 아이 얼굴에 떠올랐던 표정과 공기의 흐름마저 멈춰버렸던 그 순간의 진심. 밀려드는 감정의 파동은 마음으로 찍고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이렇게 적힌 나의 일기는 십 년을 훌쩍 넘기며 이어지고 잠이 오지 않는 밤엔 친구가 되어 좋았던 순간으로 나를 데려다 놓는다. 사실, 일기를 쓰기 시작한 이유는 훗날 아이들에게 남겨 줄 작은 선물이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정작 엄마인 나를 위한 기록이었음을 깨닫는다. 머리로 다 기억할 수 없는 지난 시간 속 아이들과 함께한 소중한 기록들. 시절마다 달랐던 계절의 느낌, 공기의 질감, 아이들의 표정, 재치 있는 말들이 차곡차곡 쌓였다가 어떤 시절에 이르면 톡 터져 나올 꽃망울처럼 아이들과 함께 한 날들은 변치 않을 내 마음의 봄이다. 특히 아들은 햇살 고운 다정한 봄이다.     


 다정한 나의 봄이 3월이면 독립해 자취를 시작한다. 미용 기술을 익히기 위해 서울로 위탁 교육을 가는 것이다. 무심하게 훅 다가서는 계절의 변화에 놀라듯 예상치 못한 이른 독립에 놀란 엄마 맘은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노래 가사에, 한 줄의 시와 문장에, 한 편의 드라마 대사에 울컥 눈물이 차오른다. 다행스럽게도 아들은 걱정 하나 없이 설레는 마음을 드러내, 그 마음에 내가 기대는 요즘이다.   

   

  “자취방은 월세도 있고, 전세도 있어. 일 층은 싫은데...... 고층이면 좋겠어. 방엔 침대 대신 매트리스만 깔까? 은은한 조명등이랑 멋진 액자도 하나 있으면 좋겠다. 엄마, 빨리 서울 가고 싶은데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지!”     


 아직은 메마른 땅. 그러나 그 아래로는 단물이 흘러 대지를 촉촉이 적시며 새로운 봄을 준비 중일 것이다. 그 봄에 자기만의 삶을 향해 첫발을 내딛는 아들을 위해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엄마는 먼저 봄이 되어야 한다. 울렁대는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히고, 걱정이 내모는 두려움을 희망으로 옮기며, 따라가고 싶은 마음을 부여잡고, 여기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단단히 뿌리내려 너를 지지해 줄 것이다. 맑은 밤 달빛에 차오르는 그리움은 엄마의 몫으로 남기고, 너는 웃으며 너의 미래를 꿈꾸렴. 작은 너의 날갯짓을 응원하는 마음을 엄마 일기장 위쓰고 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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