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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야 May 20. 2022

아사삭 오이 맛 상추

여보, 우리 텃밭 상추에선 오이 맛이 나!


 신혼 때부터 주말농장을 해 왔으니, 텃밭을 가꾸고 소소한 농작물을 따다 먹은 것이 햇수로 19년 째다. 이 문장을 쓰고 보니 뜨끔하다. 내년이면 20년째 주말농장을 꾸리는 건데 가꾸는 이는 오롯이 남편이고 나는 따먹는 역할만 하기 때문이다. 신혼초 남편은 나와 무엇을 하면 재밌을까 생각이 많았는지 같이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보자, 주말 농장을 하면 어떨까, 점심 데이트 자, 등산해도 좋겠다 등 이런저런 의견을 내놓았다.  사실 함께 점심 먹는 거 빼곤 내키지 않았지만 일단 그러자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운동에 흥미가 없던 나는 인라인을 타면 엉덩방아 찧기 일쑤 등산은 힘들어 싫었는데, 어찌 내 맘을 알고 결혼 한 달 만에 우리 아들이 찾아와 임신과 동시에 두 가지는  수 없게 되었다. 대신 틈틈이 점심 데이트를 며 주말 농장을 알아보고 농협에서 텃밭을 분양받아 고추, 오이, 상추, 토마토, 고구마를 심었다. 농사일을 하나도 모르는 나는 작물마다 심는 시기를 알고 모종을 구분하는 남편이 그저 신기했다.

 남편이랑 산책 삼아 밭에 가서 물을 주고 풀을 뜯고 토마토의 곁순을 따주며 채소들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봤다. 서서히 달구어지는 대기의 온도만큼 야채들은 쑥쑥 자라 우리 밥상에 올랐다. 연한 상추에 노릇노릇 구운 삼겹살을 한 점 올리고 밥과 쌈장을 넣어 먹으니 세상 처음 경험하는 맛에 엄지가 척 올라갔다. 별로 좋아하지 않던 고기쌈인데 어찌 이리 맛날 수 있는지! 입에서 살살 녹는 상추 한 잎의 위력에 어처구니가 없어 허허실실 웃음이 났다. 풋고추는 또 어떤가! 집된장에 찍어 와삭 베어 물면 알싸한 매운맛이 기가 막혔다. 텃밭에서 키워 낸 싱싱한 채소의 참맛을 알아버린 것이다. 욕심이 났다. 자연이 키워내는 건강한 맛을 아이와도 누리고 싶었다. 남편에게 우린 농사를 계속 지어야겠다. 채소를 잘 길러내는 재주를 지닌 당신은 쭉 텃밭지기로 남아달라 호들갑을 떨었다. 남편은 아내가 좋아하니 철마다 다양한 작물을 심고 벌레를 잡고 거름을 뿌리며 텃밭을 돌봤다.


 남편의 텃밭 작물이 꽃피고, 열매 맺음을 반복하는 동안 내 등에 업혀 밭 구경하던 아이도 쑥쑥 자라 흙을 밟고 아장아장 걸어 다녔다. 오동통하고 매끈한 낯빛의 두 살배기 아들이 밭두렁에 앉아 작물을 들여다보던 모습. 밭에 물을 뿌리 호스 끝을 납작하게 눌러 아들에게 쏘면 또 아들은 좋다고 뛰어다니던 초여름의 풍경. 햇살 속에 그려지던 무지개. 삼겹살은 야외에서 먹어야 제맛이라며 굳이 좁은 베란다에 상을 펴고, 서로의 입에 커다란 쌈을 넣어주며 웃어대던 작은 집의 저녁 풍경. 세 살짜리 아들이 밭에서 따 온 풋고추를 처음 먹던 날, '맛있다!' 그 한마디에 금메달을 딴 듯 환호하던 우리 부부의 모습은 그린 듯 예쁜 추억이다.

  밭에 작물이 늘어나듯 우리 집에도 둘째가 태어나고 자연에서 노는 걸 좋아하는 아이 덕에 텃밭 이야기는 더 풍성해졌다. 모종을 심고 거둘 때마다 남편을 따라다니던 딸이 일 년 중 가장 기다리는 날은 고구마 수확하는 날. 기억 속 그날도 고구마를 캘 생각에 우리 식구는 아침 일찍 밭으로 갔다. 남편은 딸이 신나게 고구마를 캐라고 괭이와 호미도 준비하고 고구마 잎과 줄기도 걷어주었다. 딸과 나는 흙을 파고 뒤집을 때마다 씨알 굵은 고구마가 나와 흥분했다. 그러나 흙에서 지렁이와 검붉은 지네가 뭉텅이로 나오자 우리는 화들짝 놀라 농기구 다 던지고 도망갔다. 그런 우리를 보고 남편은 어이없어하며 너털웃음을 터뜨렸고, 구워먹은 고구마는 왜 그리 맛있었는지 이날의 기억은 텃밭에 얽힌 달달 오싹한 에피소드로 남아있다.

 사계절 다양한 먹거리를 제공하던 텃밭이 파삭하게 말라가는 겨울,  마지막 작물은 배추였다. 남편은 우리 먹을 것만 남기고 나머지 배추들은 겉잎을 떼고 모양을 다듬어  이웃집에 나누어 주었는데, 그 심부름은 아이들 몫이었다. 배추를 받아 든 이웃 어른들은 아들, 딸에게 아낌없는 칭찬을 해 주셨다. 이런 기억들이 우리 아이들 유년기를 더 풍성하게 수놓지 않았을까. 함께 꺼내 볼 이야기를 텃밭에 심고 가꾸어왔구나! 생각하니 우리가 맛있고 고마운 시절을 지나왔음을 깨닫는다.


 올해도 3월이 되니 남편은 겨우내 잠들어 있던 밭을 깨운다. 돌을 주워내고 방앗간에서 얻은 깻묵과 커피박을 섞어 반년 동안 숙성시킨 거름을 밭에 뿌려 흙에 영양을 더한다. 아침저녁으로 서리가 내릴 수 있는 초봄 날씨를 고려해 추위에 강한 시금치 씨를 뿌리고, 상추 모종과 파를 심었다. 직사각형의 밭 끝엔 몇 년째 뿌리를 내리고 있는 딸기도 있다. 4월 말이 되니 남편은 딸을 데리고 모종 시장에  갔다. 여름부터 겨울까지 이어질 생명들을 심는 최적의 계절이 온 것이다. 매년 따라가던 나들인데 이번엔 함께 가지 못해 무엇을 심었니? 딸에게 물으니 고추, 수박, 참외, 당근, 오이, 토마토, 호박을 심었다며 신이 난 목소리로 말한다. 둘째 아이도 큰아이처럼 텃밭에서 놀고, 심고 수확한 그 음식을 맛있게 먹는다. 몸속에 잉태되던 순간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아빠가 가꾸어 온 이 음식들을 아이는 나와 함께 먹고 있지 않았을까. 벌레는 싫어하면서도 밭에 가는 걸 유독 좋아하는 딸에게 이유를 물으면 "몰라"  하면서도 돋아난 새싹들을 들여다보며 웃고 물을 주고 돌아서 갈 때면 손을 흔드는 딸은 정이 넘친다.

 오월이 되니 따먹을 정도로 상추와 시금치가 자라고 앙증맞은 딸기도 익었다. 주말이면 우리 가족은 텃밭으로 가 먹거리를 수확해 온다. 요즘은 상추 종류도 다양해 아삭이 상추, 로메인 상추, 적상추의 맛을 골고루 즐길 수 있어 더 좋다. 새콤달콤한 딸기를 따 먹으며 옥수수도 심으면 좋겠다. 고구마, 감자는 심었는지 물었더니 나를 쳐다보는 남편의 눈이 가로로 찢어진다. 가끔 남편은 텃밭을 가꾼 세월이 십여 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어쩜 한결같이 농사에 젬병이냐며 나의 꾸준함을 놀릴 때가 있다. 그러면 당신은 심고 키우는 걸, 나는 먹는 걸 잘하는 사람. 딱 좋은 조합이라며 샐쭉 웃는다.

 남편은 오늘도 퇴근길에 싱싱한 상추와 잘 익은 딸기를 따왔다. 물에 깨끗이 씻어 열댓 개의 딸기는 서로의 입에 넣어주며 맛있게 먹고, 상추는 겉절이를 만든다. 옆으로 다가와 상추 한 잎을 베어 먹는 딸의 입에서 와사삭 싱싱함이 터지는 소리가 난다.


 "음...... 맛있어! 역시 우리 집 상추!"

 나도 한  베어 물어본다. 오이 맛이 나는데!

 "여보, 우리 집 상추에선 오이맛이 나!"

 "와! 침이 고이네, 겉절이 맛있게 무쳐봐."

 "으악! 엄마 달팽이다. 아빠, 아빠 어떡해!"

 "고 녀석 겉절이에 넣어 같이 무쳐!"


 상추 씻은 물에 둥둥 떠 있는 달팽이를 피해 만화 주인공처럼 벽에 붙어 서 있는 딸과 남편의 농담에 피식 웃음이 났다. 달팽이를 상추 위에 올려놓고 들여다보니 동그란 집이 귀엽다. 비 오는 날이면 달팽이 보러 아들과 손잡고 다니던 시절이 스쳐 간다. 그리고 지금 이 찰나의 순간이 풍덩 마음에 들어찬다. 서로 섞이는 웃음소리, 낯선 존재가 주는 놀라움, 커튼을 살랑이며 불어오는 오월의 싱그러운 바람, 편안한 느낌, 와사삭 오이 맛 상추...... 그리고 당신.


 아니 에르노의 소설 <단순한 열정> 속엔 이런 문장이 있다. 

 

'단지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내게로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 그 사람은 이것을 읽지 않을 것이며, 또 그 사람이 읽으라고 이 글을 쓰는 것도 아니다. 이 글은 그 사람이 내게 준 무엇을 드러내 보인 것일 뿐이다.'


 나는 남편이 가꾸는 텃밭과 오늘의 상추 맛을 쓰고 있을 뿐인데, 아니 에르노의 저 문장이 내 마음을 뜨겁게 메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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