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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야 May 27. 2022

서성이는 하루

무심할 수 없는 말들이 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후 아는 언니와 인근 도시에 있는 카페 B로 갔다. 이곳은 정원이 예쁘기로 유명한데 지금 장미가 한창이라 언니는 나에게 꼭 보여주고 싶어 했다. 우리는 간단한 아점을 먹고 12시 오픈 시간에 맞춰 카페로 향했다. 연분홍 미니 덩굴장미가 벽을 타고 흐르며 프로방스풍 건물을 감싸고 화단엔 내가 좋아하는 낮달맞이 꽃이 수북이 피어있어 입구에서부터 맘이 설렜다. 너무 좋다고 연신 말하자 언니는 아직 시작도 아니라며 나를 카페 안으끌어당겼다. 내부는 원목 가구와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아치형 포인트 벽, 소담한 다락 등 아늑한 공간으로 꾸며져 있고 싱싱한 화초들이 빈틈을 메우고 있어 컨츄리풍 감성을 물씬 풍겼다. 특히 활짝 열려있는 창으로 정원에 심어진 꽃들이 기웃거리고 햇살과 바람이 드나드는 싱그러움이 좋았다. 마룻바닥에 엎드려 무심히 잠자고 있는 커다란 개와 테이블 위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 쉬고 있는 고양이까지!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목가적인 그림 속 한 장면을 연출하는 카페였다. 우린 조용히 커피를 시키고 창가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는 정원을 구경하러 나갔다.


 볕이 잘 드는 뜰이었다. 토분에 심은 다양한 허브와 만개한 꽃들이 뿜어내는 향기가 정원에 가득해 숨을 쉴 때마다 그 향이 코끝에 매달리는 듯했다. 이층 테라스를 감싸며 흘러내리는 덩굴장미를 포함해 이곳저곳 무리 지어 피어있는 장미들은 비밀의 화원을 걷듯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오월은 장미의 계절이라 정원의 꽃들 중 단연 돋보였다. 이 장미들의 생기발랄한 매력을 어찌 표현해야 할지! 그저 '아름답다' 하기엔 섭섭하고, 사교계에 데뷔하는 아가씨의 달아오른 분홍빛 볼을 닮았다고 할까? 신사의 손을 잡고 미끄러지듯 스텝을 밟으며 한껏 나풀대는 치맛자락의 경쾌함을 닮았다고 할까? 유럽 장미와 허브가 가득한 이국적인 정원을 걷다 보니 반가운 작약도 눈에 띄었다. 노란 꽃술을 부끄럼 없이 내보이며 활짝 피어난 작약의 모습에 그 속에서 엄지 아이가 쏙 나올 것 같다는 상상을 하며 웃었다.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며 정원을 둘러보고 실내로 돌아와 앉으니  픽업 벨이 울렸다.


 커피를 마시며 아이들, 남편, 재테크 등 생각이 이끄는 대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언니와 나는 잠시 눈길을 창밖으로 돌렸다. 대화가 멈춘 틈으로 정원의 향기가 더 깊이 스며들었다. 붉게 핀 세이지, 보랏빛 라벤더, 이름을 알 수 없는 키 큰 허브가 눈앞에서 살랑인다. 봄이 피워 올린 절정을 만끽하느라 우린 긴 대화를 이어가기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햇살에 반짝이는 덩굴장미를 보고 있자 고요함 속에 작은 새들의 지저귐도 들려왔다. 눈을 감으니 부서지는 빛의 조각들 사이로 문득 그리움이 차오르고 함께하고픈 얼굴들이 스쳤다가, 한동안 마음에 담아두었던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오랜만에 왔는데 잘해주지 못하고 보낸 것 같아 마음이 내내 서성이더라......'


 얼마 전 부산에서 엄마를 뵙고 돌아와 안부차 드린 전화 통화에서 하신 말씀이다. 나는 엄마도 만나고 부산 여행도 해서 좋았는데, 마음이 내내 서성였다니! 당장 달려가 꼭 안아드리지 못해 코끝이 매웠다. 가볍게 불어오는 바람결을 느끼며 엄마 말을 되뇌어 보니, 그 말이 애틋하다가 그립다가 종내엔 사랑한다는 말이었음을 깨닫는다. 


 언니가 호로록 커피를 마시는 소리가 들려 나도 눈을 떴다. 언니 따라 얼른 차가아이스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뜨거워진 목구멍을 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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