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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야 Nov 07. 2022

가을아, 내 곁에선 게으름을 부려도 돼

가야산 해인사 단풍 나들이

 시월 마지막 주 가야산 해인사에 다녀왔다.

뜬금없이 남편이 올 가을엔 해인사에 가고 싶다고 말해 단풍 나들이 장소를 해인사로 정했다. 그곳을 마지막으로 다녀온 것이 언젠지 기억을 되짚어보니 딸을 임신하고 해인사 입구에서 찍은 사진이 떠오른다. 딸이 초등 6학년이니 그 시절로부터 13년이 흘렀다. 기억은 순식간에 과거의 시간으로 나를 데려다 놓는데, 그 당시 뱃속에 있었던 딸이 성큼 성장하여 눈앞에 있는 현실이 낯설다. 손에 잡히지 않지만 많은 것을 변화시키는 시간의 힘에 다시 놀라며 딸에게 함께 가자고 말했다. 혼자 집에 있기를 좋아하는 사춘기의 딸이 망설임 없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데 의아해 보니 그 얼굴에 의뭉한 웃음이 따라온다. 외가 식구들을 만나는 나들이니 헤어지는 길에 용돈을 받을 계산이 머릿속에 있었나 보다. 남편은 오랜만에 해인사 소리길을 걸어보고 싶어서, 나는 반가운 친정 식구를 볼 마음에, 딸은 용돈 챙길 잇속으로 우린 해인사를 향해 아침 일찍 차를 몰았다.


 뭉근하게 차창에 내려앉는 햇살과 노랗고 붉은 옷을 입고 성큼성큼 다가서는 산들이 드라이브의 정취를 더했다. 에어팟을 귀에 꽂은 딸도 기분이 좋은지 창밖 풍경을 힐끔대며 콧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우리를 태운 자동차는 두 시간 여를 달려 가야산 국립공원에 들어섰고, 병풍을 펼친 듯 수려한 산봉우리 사이사이를 휘감아 흐르는 울긋불긋한 가을빛에 우린 환호를 질렀다. 차가 없는 소로를 달릴 때 선루프를 열어주었더니 딸은 청량한 공기를 흠씬 들이키며 햇살에 반짝이는 단풍잎에 감탄을 거듭했다. 딸이 좋아하니 잘 데려왔다 싶은 것이 나의 기분도 한껏 부풀어 올랐다. 해인사 주차장에 들어서니 친정 엄마, 오빠, 언니, 형부 만나기로 한 가족들이 도착해 있었다. 우린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해인사를 향해 걸었다. 맑은 계곡물과 투명한 햇살, 바람에 꽃잎처럼 흩날리는 단풍잎이 곱게 내려앉는 흙길을 걸으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 우리 가족의 목소리엔 흥이 묻어났다.


 그런데 그 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주차를 너무 멀리 했나 하는 생각과 함께 흩어졌다. 오르막의 숲길이 계속되니 일흔이 훌쩍 넘은 친정 엄마의 걸음은 비척거리고 아침 일찍 출발하느라 잠을 설친 딸은 피곤한지 툭툭 흙을 차는 발길이 곱지 않았다. 결국 친정엄마와 언니, 오빠는 경내 초입에 있는 수다라 카페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형부와 우리 가족은 팔만대장경판을 보러 갔다. 나는 딸에게 도움이 될까 해서 법보사찰 해인사에 대한 소개를 해주었다. 조금 듣고 있던 딸은 팔만대장경판이 있는 절임을 안다고 잘라 말했다. 관심이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잘 관리된 정갈한 경내는 파란 하늘과 운치 있는 산을 등에 지고 멋이 있었건만, 시큰둥해진 딸에겐 그저 절일 뿐이고,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판전까지는 또 계단을 올라야 하니 아픈 다리만큼 짜증을 냈다. 나는 장경판전의 좁은 창살 사이로 대장경판을 구경하는 것만도 너무 벅찬데 딸은 겨우 올라왔더니 제대로 보지도 못하게 해 놓았다며 화를 냈다. 사진도 찍어주고 팔만대장경과 장경판전의 우수성에 대해 설명해 주고 싶었는데 그저 쓱 지나쳐 내려가는 딸을 뒤쫓으며 나는 못내 아쉬웠다.


 피곤함과 실망으로 달아오른 딸의 짜증은 식당에서 폭발했다. 언니와 나는 해인사 다음 코스로 핑크 뮬리가 절정이라는 한 공원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있었고 그것을 들은 딸은 집에 가고 싶다고 혼잣말처럼 중얼댔다. 내 마음은 분주해졌다. 오랜만에 만난 친정 식구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고, 피곤하기만 할 뿐 재미없는 딸 마음도 챙겨야 하고, 또 눈앞에 아른대는 가을빛은 왜 이리 고운지! 그리운 사람들과 함께 있는 이 시간이 마냥 소중해 여러 감정이 뒤엉킨 상태로 잠시 멍해졌다. 딸도 나름 감정 과잉 상태였는지 소에 하지 않던 행동을 해 남편의 심기를 건드렸다. 사람들로 붐비는 식당이 시끄럽고 여러 음식이 섞인 냄새가 불쾌하다며 에어팟을 끼고 유튜브를 보았다. 음식이 다 차려지고 딸 몫의 비빔밥을 비벼 아이 앞에 갖다 놓았음에도 그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남편은 어른 앞에서 버릇없는 행동이라며 밥 먹지 말고 나가라고 했고, 딸은 벌떡 일어나 밖으로 휙 나가버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식당에 있던 사람들이 쳐다보고 우린 순간 얼음이 되었다.


 다행히 친정 엄마와 오빠는 코로나를 조심하느라 식당을 이용하지 않고 따로 식사하기에 이 모습을 보지 않았고 형부와 언니는 아이의 무례한 행동에 사춘기가 무섭다, 다솜이가 많이 힘든가 보다. 잘 달래 보라며 너그럽게 보아 넘겨주었다. 옷을 얇게 입은 딸은 추운지 차 문이라도 열어달라고 전화를 했는데 남편은 열어주지 않았다. 정말 오랜만에 나선 가족 나들인데 씁쓸한 웃음이 겉돌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하루하루가 아쉽고 이렇게 그리운 사람들이 마주 앉은 시간은 더더욱 붙들어두고 싶어 안달 나는데 오늘이 전혀 아쉽지 않은 나이의 딸이 나의 마음을 아니, 반백년을 훌쩍 지나고 있는 어른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까! 잠깐 동안 우리 곁에 머문 쓸쓸함은 그저 주어진 시간, 가을이 뿜어내는 아름다움을 하찮게 여길 수 있는 나잇대가 부리는 허세에 잠시 기운을 뺏긴 탓일지도 모르겠다. 누구랄 거 없이 어른들은 그저 허허 웃으며 식사를 했다. 나는 화를 내고 나가 지금 후회하고 있을 딸을 알기에 다시 기운을 차리고 맛있게 밥을 먹고 다음 일정을 의논했다.


 등산을 좋아하는 형부와 남편은 가야산 소리길을 한 시간 정도 걷고, 그동안 나머지 식구는 차 마시며 기다렸다 함께 공원에 가 핑크 뮬리를 구경하고 헤어지기로 했다. 딸을 차에 태우고 약속 장소로 이동하며 많이 힘들었냐고 물어보았다. 딸은 아침 일찍 일어나 차도 오래 타고 걷기도 많이 해 힘들었다고, 거기다 식당은 머리 아프게 시끄럽고 냄새는 불쾌했다는 말을 다시 하며 엉엉 울었다. 천천히 구르는 차바퀴에 붉은 단풍이 흩어졌다. 아이가 잠잠해 지자 힘들었겠다고 그래도 함께 와서 고맙고 엄마가 외할머니를 만나고 이모, 외삼촌과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네가 많이 배려해 준거 안다고 말해주었다. 딸은 곧 식당에서는 미안했다고 사과했다. 갈등은 있었지만 이렇게 서로 이해하고 마음을 푸는 시간이 참 좋다. 우리는 이런 시간을 통해 서로의 관계가 단단해지고 이해의 가능성은 더 깊어지지 않을까. 이미 딸의 대답은 예상했지만 핑크 뮬리 공원에 가는 다음 일정에 대해선 어떤 생각이냐고 물었다. 딸은 엄마도 엄마를 만나 더 오래 함께 있고 싶을 테니까 자기는 괜찮다고 말했다. 아이의 말에 코가 맵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딸은 평소의 명랑함을 되찾았다.


 마음은 서로 주고받는 기운이 있다. 한 번 갈등을 겪고 그것을 잘 풀어낸 마음은 믿음이라는 단단한 매듭을 짓는다. 이 매듭들이 이어져 갈 때 우리는 새로운 갈등 앞에서도 덜 두렵지 않을까!

딸은 회오리감자튀김 하나 사들고 차에서 우리를 기다려 주었다. 나는 연보랏빛 핑크 뮬리가 아스라이 펼쳐져 있는 공원을 엄마와 팔짱을 끼고 걸었다. 언제나 가까이 있고 싶은 마음을 엄마는 알까. 남편은 엄마와 언니, 나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렇게 공원을 한 바퀴 돌고 우리는 헤어졌다. 또 한동안 전화로만 서로의 안부를 물을 것이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쉬운 마음을 달래려 사진을 보았다. 핑크 뮬리를 배경으로 엄마와 나 언니가 함께 찍은 사진에 눈이 멈췄다. 세상에! 엄마가 웃고 있다. 내 눈엔 항상 고우신 엄마가 언젠가부터 사진을 찍기 싫어하고 잘 웃지 않으셨다. 그런데 기분 좋게 웃고 있는 얼굴을 보니 이번 여행이 참 좋았다는 감사가 몰려왔다. 나는 웃으며 엄마가 좋았나 보다며 이번 여행에 대해 남편과 딸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딸은 식당에서 자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빠에게 하소연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도록 노력해 보겠다는 말로 마음을 푼 상태였다.


 가을 해는 짧고 어스름이 내리는 차창 풍경은 낮과 달리 스산하다. 나이를 훌쩍 먹고 보니 가을이 지나가는 것이 내 소유의 한 시절이 쑥쑥 뽑혀나가 듯 서운하다. 지나가는 시간이 아쉽지 않은 나이의 딸이 지닐 수 있는 여유가 샘나기도 하다. 나도 이럴진대 엄마는 오죽할까. 우리 곁에 머문 가을이 좀 더디게 지나가면 좋겠다.

 가을아! 내 곁에선 게으름을 부리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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