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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lna Jun 20. 2022

너에게, 또 나에게

어쩌면 내가 나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

우리 반은 매일 아침 '감정 일기'를 쓴다.

열셋, 사춘기의 폭풍에 접어든 학생들이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받아들이고 건강하게 다룰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활동이다.

처음에는 쭈뼛거리며 한 두 문장,  억지로 써내던 아이들이

이제는 꽤나 솔직하고 가감 없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다.

일기 쓰기를 강제하진 않지만, 그래도 제출한 아이들에게는 최대한 열심히 답해주려고 하는데

그러다 보면, 아이들을 반으로 쪼개 그 속을 잠깐 살펴본 기분이라 퍽 유쾌하고 가깝게 느껴진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적어준 내 짧은 답변들을 차곡차곡 모아 다시 읽어보니

어쩌면 내가 어린 나에게,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들도 이런 게 아니었을까 싶다.

나의 답변 몇 가지를 나 자신을 위해서 기록해두려고 한다.





소심이 D. 22년 4월, 감정: 짜증 나다.

1교시부터 과학이라 짜증이 난다. 과학이 싫은 이유가 실험하고 나서 발표할 때가 싫다. 그때 뭔가 부담스럽고 틀리면 실험을 잘못했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싫다.


A.  어머 그렇구나. 선생님은 네가 그런 마음인 줄을 몰랐네.

너는 실험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싫고, 과학이 자신 없는데 발표하는 것이 부담스럽구나.

그럴 수 있지, 누구나 그런 상황에서는 그런 마음이 들 거야.


덧붙이자면, 실험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네가 잘못했다는 건 아니야.

실험이 잘못되었더라도 그 과정을 통해 배울 수 있고, 또 열심히 한 네 노력이 사라지는 건 아니거든.

혹시 그 말을 듣게 되면, 음 내가 이번 실험에선 놓친 게 있나? 하고 넘어가도 돼!




마음 넓은 O. 22년 5월, 감정: 서운하다.

친구들한테 서운한 게 있지만, 친구들이 볼까 봐 이유는 쓰지 않을 거다.


A. 그렇군. 이유는 선생님한테 안 알려줘도 되는데,

서운한 건 바로바로 말해야 안 쌓이더라.

안 그러면 나중에 부메랑이 되어서 더 큰 서운함으로 돌아오기도 해.

예쁜 말로 친구들에게 이야기해보자. 너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친구들이라면, 네가 서운함을 표현한다고 해서 너를 멀리하지는 않을 거야.




개그맨 D. 22년 6월: 불안하다, 걱정되다.

옛날에 내가 잘못한 일이 있는데 내가 요즘 기억을 못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내가 잘못했던 건데 기억이 안 나면 어떡하지, 생각하니 불안하고 조금 걱정된다.


A. 선생님 생각에, 우리 삶이 내가 했던 선택들과 그 선택에 따른 행동들로 이루어져 있는 건 맞는 것 같아.

우리가 무심코 했던 사소해 보이는 선택들이 우리를 만들거든.

그러니까 무언가를 선택하고 행동할 때 신중하게 고민해볼 필요는 있지.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과거에 했던 행동들을 계속 곱씹으며 후회할 필요는 없단다.

후회할 만큼 잘못한 일이 있었다면, 네가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고,

그런 경우에는 반성하고 다음부터 안 해야겠다! 다짐하고 바뀌면 되거든.


또, 너 자신도 잘 모를 만큼 잘못한 일이 만약 있다면

그때 당시 너에게는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을 수도 있고, 혹은 그때와 지금의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단다.


그러니 과거를 지나치게 생각하지 말고, 오늘을 살고 있는 나 자신에게 집중해보자.

오늘의 너는 아마 과거의 너로부터 나온 걸 꺼야.

선생님은 너를 믿는 편이야.




멋쟁이 H. 22년 5월, 감정: 걱정되다.

오늘 다른 친구가 입고 온 옷이 내가 산 옷이랑 겹친다! 내가 따라 했다고 오해받을 까 봐 걱정이다.


A. 하하하. 걱정될 수도 있겠다. 너희 사이에 인기 있는 쇼핑몰이 비슷한 것 같더라.

산 옷이 겹칠 수도 있지 뭘! 만약에 그런 이야기를 들어도 너무 걱정하지 마요.

너하고 나하고 취향이 비슷한 데가 있구나, 말해버려




외로운 B. 22년 5월, 감정: 흠... 잘 모르겠다.

가상의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당황했을 때 모두, 나랑 제일 잘 맞고 내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친구!  읽었던 어떤 책의 주인공에게는 그런 친구가 있는 것 같았다. 음, 내 이상형의 친구가 한 명만 있으면 좋겠다. 지금은 없어 ㅠㅠ


A. 선생님도 어릴 때는 말이야.

내 마음을 자기 마음처럼 생각해주고, 나랑 취향이 똑같고,  나랑 정말 정말 잘 맞는 친구가 하나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거든. 다른 친구들은 다 그런 '친구'의 존재가 있어서  나만 외로운 거 같고 막!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나랑 완! 전! 히! 잘 맞고 , 똑같이 통하는 친구는 없다는 걸 알게 되었어.

왜냐하면 '나'랑 '친구'는 다른 존재거든. 그리고 내가 친구와 다른 그 부분이 나를 특별하고 소중하게 만드는 특성이란다.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서 꼭 취향과 감정이 비슷할 필요는 없어

내가 친구에게 맞출 필요도 없고.


단지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서로 소중하게 생각하고.

우리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더 재미있고, 우리가 달라서 서로 더 많이 성장시킨다고 생각하면 돼.



예술가 S. 22년 5월, 감정: 울적해요

친구들이랑 주말에 잘 놀다 왔는데도 울적하다. 놀다 왔는데도 기분이 나쁜 것도 더 이상하다. 생각해보니 같이 노는 친구 중에 한 명이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계속해서 그런 것 같다. 다른 친구한테 이 문제로 상담해달라고 했더니, 그냥 네가 대충 맞춰주라고 한다. 그 친구가 나쁜 사람은 아니고 나도 계속 지내고 싶긴 한데 같이 놀면 내가 상처받는 것 같다. 기분이 나아지지 않아서 부모님께 이야기했더니 용돈 받아 놀다 왔으면서 우울할 이유가 뭐냐고 핀잔만 들었다.


A. 음... 무조건 기분이 좋거나 무조건 기분이 나쁜 일은 없는 것 같아. 잘 놀고 왔어도 얼마든지 기분이 울적할 수 있지. 그럴 땐 '내가 울적하구나...' 하고 도닥여줘.


너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너 자신'이라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친구는 좋은 사람이고 또 나를 좋아한다는 것도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상처받을 만한 행동을 계속하는 친구를 그냥 내버려 둘 순 없지.

나는 내편이어야 하잖아.


그 친구의 행동이 상처다 싶으면, '티 내는' 것이 당연한 거야.

대신 그 친구도 소중한 사람이니까 정중하고 명료하게 티 내줘야지. "네가 이렇게 하니까 내가 좀 상처받는 것 같아." 하는 식으로.

그런데 이 정도 말도 받아주지 못한다면 그건 좋은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해.

또, 나에게 상처 주는 친구를 잘라내는 것도 큰 용기라고 생각한단다.


다른 주변 친구들이 너에게

"걔 착한데 네가 예민한 거야" 라던지, "그냥 대충 넘어가" 하는 식으로 이야기해도 그러면 안돼.

그건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는 부분이고  그 친구들은 상처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거든.

다른 친구는 받아줄 수 있는 일이라도 너에게는 받아주지 못할 일일 수 있단다.


그리고 부모님은 말이야, 아마도 조심스러우신 걸 거야. 네가 우울하다고 했을 때 겉으로는 다른 말을 하셔도

진짜 우리 딸이 우울한가, 무슨 일이 있나 걱정되셔서.


충분히 생각해보세요 S.  어떻게 결정하든 네 선택은 존중받을 만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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