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덕목 19. 오래된 사과

그래야 나아갈 수 있겠지

by chalna


시간이 지나도 무뎌지지 않는 인연이 있다.





어른의 덕목 19. 오래된 사과





시간이 지나도 무뎌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



시간은 무심히도 흘러 무수한 과거의 인연들이 나를 스쳤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내일들에 어제들을 조금씩 잊어가다 보니

매일 이별하고 살고 있구나- 하던 그 가사는 진실인가 봐, 하게 되었다.


그러니 어떤 힘든 일이라도 대부분은

시간이 약이려니 하며 넘기자고.




그런데 너는 왜 시간이 지나도 무뎌지지 않았는지.

우리의 시간은 이미 한참이고 흘러

끄트머리도 보이지 않는데

그 안의 너는 왜 여전히 바래지도 않고 살아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였다.

얼굴이나 보자, 하고 보낸 건 나의 충동.

맥주 한잔 할래? 했던 건 너의 충동.




시간 속의 너를 죽이지 못한 게

사과를 하지 못해서라고 생각했었다.

지난날 그 일방적이던 싸움에 대한 사과.


날카롭게 벼려진 말로 너를 후벼 팠을.

그때의 나는 너를 상처 주지 않고서는 배길수가 없었거든.

그걸로 네 애정을 시험하고 싶었던 것 같아.

어쩌면 내 곁에 머무르라, 너를 붙잡아두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해.

몰라. 기억 안 나. 근데 내가 확신하는 건

너를 상처입힘으로써 도리어 나도 상처받았다는 거야.

그런 말들.




그런데 막상 마주 보니 아닌 것 같았다.

그때와 똑같은 얼굴로 우리 왜 싸웠었는데? 하는 너와

몰라, 기억 안 나. 하는 나.






네가 나한테 뭐였는데.

오랜 시간 동안 너에 대해 쓰지 않았던 건

네가 아직도 어딘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였고

네가 나에게 이만큼이나 의미 있다는, 그 지위를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불편했고, 자존심 상했다.



그런데 막상 얼굴을 보니 그런것들 보다는 그저, 사과가 전부는 아닌 것 같았다.

그냥.

여전히 해사한 그 얼굴을 보고

동시에 익숙하게 편안한 나를 보고

그제야 아주 슬프게 알게 되었다.




네 차 옆자리가 내 자리였던 때가 있었다.

네 이어폰도 내 거, 외투도 내 몫.

내가 가는 곳에 따라붙는 네 눈동자, 내가 하는 말에 끄덕이던 네 얼굴.

함께 들은 노래, 함께 보던 바다.

마주 보며 수없이 많은 말을 하던 그때.

나는 네 옆에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소리치거나 속삭이기도, 따뜻하기도 차갑기도 했다.

모든 순간에 너는 언제나 함께였으니까.

어느 날에는 이 친밀함이 무섭기도, 의심스럽기도 해서 괜히 유치하게 굴기도 했다.

그래도 너는 그대로 있었다.



우리가 앞으로도 같은 차를 타고 달릴 것이라 믿었었다.

지금처럼 웃으면서 함께 살아갈 것이라고.

나는 네 옆에, 너는 내 옆에. 그럼 다 괜찮을 거라고.



쉬이 사람을 믿지 않는 내가

그토록 가깝게 두고 오래 보았던 너. 그게 가능하게 만들었던 너.

감히 너만큼이나 가까운 사람을 다시 들일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너를 상처입히던 그 순간마저도 다시 뛰어가 붙들고 싶었을 만큼.



너는 그런거였다.

하나의 시절동안

나를 살피고 쓰다듬고, 챙기고 밀어 올리던

널찍한 비빌 언덕, 따뜻한 안길 품, 든든한 내 편.

덕분에 나는 안전하고 편안했다.

내가 너한테 못했던 말은 사과가 아니라 감사였나보다.

마침내 고마움을 말하는 오늘이

우리 시간의 문을 닫는 진짜 마지막 날인가 보다.




건강하게 잘 지내 - 하는 말에

그래 너도 그랬으면, 하고 대답했다.

이제야 오래된 시간 속의 너를 돌려보낸다.

그리고 나도 마침내 다시, 흘러간다.



오늘 밤 플레이리스트는

저녁 하늘

스물다섯스물하나

사건의 지평선

someone like you

그리고 goodgoodb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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