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읽어야 할 필요는 없다
출산휴가에 들어가는 날, 팀 동료들에게 아기 그림책을 선물 받았다. 그 책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나라 생물들을 하나하나 세밀화로 공들여 그린 책이었는데, 착하고 정직한 유기농 식품 같아서 우리 아기 첫 책으로 손색이 없는 책이었다. 사실 나도 이 책 한 질을 모두 사고 싶어서 눈 여겨 보고 있던 참이었는데, 유기농 식품이 그렇듯이 생각보다 비싸서 망설이고 있었던 책이었다. 선물 받은 유기농 그림 책을 한 장 한 장 정성스럽게 넘기면서 평소보다 더 아름답게 가공한 목소리로 아기에게 책을 읽어주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행복했다.
첫 책이 준비된 지 일주일만에 딸 홍시가 태어났다. 아기가 태어나면 책이고 나발이고 정신이 없다. 그러다가 좀 살만 하다 싶으면 아기가 기어다니면서 또 정신을 홀딱 빼놓는다. 집에 딱히 장난감이랄 게 없어서 홍시는 기어 다니다가 손에 얻어 걸리는 것을 잡으면서 놀아야 하는 운명이었다.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홍시는 용케 아기 그림책을 손에 넣었다. 역시 우리 딸,
우리 홍시 책 읽어줄까?
아니, 난 책 먹을 거야!
말은 못했지만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책을 읽어주기도 전에 책은 홍시 입으로 들어갔다. 뭐든지 손에 잡히면 입으로 가져갈 무렵이었다. 그런데 아기그림책은 이빨도 없는 아기에게 먹힐 정도로 허술하지 않았다. 아기들의 이런 못된(!) 습성을 이미 잘 아는 출판사는 아기그림책을 두껍고 견고하게 만들었다.(그래서 비싼 가?) 어렵게 손에 넣은 책이라 그런지 홍시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못 먹는 감에 침이라도 묻히자는 심사로 책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알뜰하게 침을 발랐다. 다행히 아기그림책은 침의 침투에도 대비가 잘 되어 있었다. 씹히지도 않고, 침에도 반응하지 않자 신경질이 났는지 홍시는 진짜 젖 먹던 힘을 다해서 책을 집어던졌다. 아름다운 아기그림책은 공중에서 한 바퀴 반 정도 회전한 다음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아직 책은 시기상조구나, 싶었다.
내가 책을 좋아해서인지, 책 좋아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은 나의 욕망을 다들 어찌 용케 알고 여기저기에 책을 많이 보내주었다. 그 많은 책 중에 딸 홍시 인생에 기념비적인 책, 사실상의 우리 첫 책은 '너는 누구니?'라는 팝업북이었다. 어린 동물이 커서 뭐가 되는지 팝업으로 짠, 하고 보여주는 책이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고,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고, 백조, 캥거루 이런 동물들이 나온다.
기어다니다가 어느 날 앉을 수도 있게 되었을 때 홍시는 이 책을 손에 넣었고, 이제 책장을 넘길 수도 있게 되었다. 드디어 바라는 모습이었다. 뭔가 미개인에서 문명인이 된 것 같았고, 엄마가 보기에 매우 좋았다. 그런데 잠시 후의 충격과 공포는 아직까지 생생하다.(사진도 있었는데 지금 찾기가 어렵다) 홍시가 팝업된 동물의 목덜미를 움켜잡거나 멱살을 잡고 머리를 뜯어 야무지게 먹어치우는 게 아닌가. 붕어빵도 머리부터 먹으면 잔인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홍시는 동물의 머리를 무자비하게 씹어먹었다. 아무리 아기고, 아무이 책 속의 동물이라지만 그 모습은 기괴하고 엽기적이었다. 너무 웃겨서 멍하니 바라보았다. 역시 책은 시기상조인 거 같아 어디다 숨겨놓았는데 어느 샌가 찾아내서 동물들의 머리 통을 하나씩 먹어치웠다. 결국 책을 읽기도 전에 책은 너덜너덜해졌다.(기념으로 집 어딘가에 보관하고 있는데, 그 어딘가를 모르겠다)
예전에 영어 사전을 씹어먹으면 단어가 머리 속으로 들어온다는 말이 있었다. 친구 중에 진짜 씹어먹은 애도 있었다. 딸 홍시는 책을 읽기 전에 책에 침을 바르고 책을 씹어 먹었다. 그 아이는 커서 책을 좋아하게 된다. 당연히 책 씹어먹자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다. 책은 꼭 읽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필요는 없다는 거다. 일단 책과 친해지기 위해서 책은 만만한 것이 되면 좋다. 책을 읽는 것만이 독서가 아니라 책이라는 물성으로 접근하여 종이 촉감과 냄새, 책의 크기와 색감과 심지어 맛까지도 독서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난 아직도 책이 예뻐서 사기도 한다.
다시 책 씹어먹기로 돌아가서 혹시 책 좋아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면 책 씹어먹던 찢어먹던 가지고 놀게 두자. 책 비싸다고 하지만 장난감은 그보다 더 비싸니 돈 아까워하지 말자. 책 좋아하는 아이가 되는 좋은 시작일지도 모른다.
덧붙임. 나중에 이 아이는 커서 서점에 갔다가 운명처럼 발견한 ‘책 먹는 여우’를 굉장히 좋아하게 된다. 책을 읽은 후 소금과 후추를 뿌려 먹는 여우 이야기인데 자기의 흑역사를 알고 있기에 굉장한 동질감을 느꼈던 거 같다. 중학생이 된 요즘도 그 책을 가끔 꺼내서 보는 걸 보면 그때가 많이 그리운 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