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이고 지고 다니는 이유
우리 집에는 아직 그림책이 많다.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딸이 선물 받은 책, 딸에게 읽어주려고 내가 산 그림책이 많고, 순전히 내가 좋아서, 그냥 그림에 반해서 산 그림책도 많다.
그림책은 보통 하드 커버로 되어 있어서 무겁다. 그래서 이사 갈 때는 제거 대상 1순위가 된다.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 왔는데 그때 책이 너무 많아서 한 트럭쯤은 버렸다. 남편은 그림책도 그 트럭에 실어 보내려고 했지만, 내가 뜯어말렸다. 홍시가 그림책을 자주 보는데 왜 버리냐는 게 내 주장이고, 남편은 있으니까 보는 거지 없으면 안 본다고 당연한 소리를 했다. 내가 이겼다. 물론 홍시가 가담했다. 그렇게 무거운 그림책을 이고 지고 이사 왔고, 앞으로 이사를 가더라도 또 이고 지고 갈 것 같다.
중학교 3학년 아이가 다 컸는데 그림책을 왜 안 버리냐면,
그림책은 만만하다. 딸 홍시는 밥 먹기 전, 또는 밥 먹고 나서 잠깐씩 짬이 날 때 그림책 서가를 훑다가 눈길이 멈추는 책을 빼든다. 자투리 시간 타임 킬링에 좋다. 물론 점점 휴대폰으로 옮겨가고 있지만 여전히 딸은 그림책을 찾는다. 뭘 먹으면서도 그림책을 보고, TV를 보면서도 그림책을 보기도 한다. 그런 딸을 보고 그림책 책꽂이를 식탁에서 가장 가까이, 식탁에 앉아서 손 뻗으면 닿는 곳에 두었더니 더 자주 본다.
그림책은 과거와 현재가 만나 뛰어노는 공간이다. 딸은 어릴 때 보던 그림책을 펼쳐 보면서 어린 시절의 자신과 만나서 놀다 온다. 아기 때 백희나 작가의 ‘구름빵’을 좋아하길래, 그 작가의 새 책이 나오면 내용도 안 보고 그냥 사들였다. 그렇게 ‘장수탕 선녀님’을 사 왔는데, 반기기는커녕 책 표지만 보고 무섭다며 제발 책 열지 말라고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닌가? 이게 무섭다고? 다시 보니 책 표지에 있는 할머니가 아니라 평범한 할머니가 아니라 목욕탕에 사는 선녀님이라 뭔가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때가 대략 네다섯 살 때쯤이어서 홍시가 현실세계와 상상세계를 한참 넘나들고 있을 때였다. 하도 무서워하고 책을 열지 못하게 했고, 한참을 책꽂이 제일 구석으로 유배 보냈다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상상세계와 현실세계를 구분할 때쯤 이 책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가끔 그 책을 꺼내보면서 그땐 그랬지, 하며 어린 시절 자기 자신을 귀여워한다.
그림책은 아이와 어른이 쉽게 만나서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책을 안 좋아하는 남편과도, 집에 놀러 온 손님과도 보던 그림책을 매개로 이야기를 나누고,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생각나는 그림책이 있으면 꺼내와서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한다. 심지어 할머니, 할아버지와도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그림책이다. 홍시는 할머니에게 ‘장수탕 선녀님’을 보여주었는데 목욕탕에서 일어나는 이야기, 냉탕에서 수영하는 이야기, 요구르트 먹는 이야기를 많이 하곤 했다.
마지막으로 그림책은 반복독서가 아주 쉽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십여 년을 뒤적거리다 보니 우리 집 그림책들은 대개 너덜너덜하고 책장이 뜯어지고 음식이 떨어져 생긴 얼룩도 많다. 보고 또 보면서 볼 때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새로운 감정을 느낄 수 있어서 반복독서의 재미를 알게 된다.
지금까지 이고 지고 다녔던 그림책이 딸 홍시가 책을 좋아하는데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그림책을 통해서 책은 만만한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을 것이다. 그림책을 통해서 책을 읽는다는 건 그냥 오다가다 짬이 나면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을 것이다. 그리고 그림책을 통해서 시공간을 초월하여 다양한 나를 만나고, 다양한 만남이 가능한 공간이라고 인식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딸 홍시에게 말하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뭘 그렇게 거창하게 얘기해. 그냥 재미있어서 보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