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집에 책 가져오는 사람
태어나자마자 그림책에 침을 바르고 심지어 뜯어먹고, 젖 먹으면서 내 책에 또 침 바르고 내 책을 뺏고 숨기고 하면서 딸은 어릴 때 책의 맛(!)을 알아버렸다.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면서 매일 산책 삼아 도서관에 간 덕분에 도서관이라는 공간에 친숙해졌고, 중학생이 된 지금도 학원 대신 도서관에 간다.(나중에 말할 기회가 있을랑가 모르겠지만 빌게이츠처럼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건 하버드 졸업장이 아니라 동네 도서관이라는 말을 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다!)
육아휴직하는 동안 본의 아니게 그리고 매우 의도한 끝에 아이가 책과 친숙하게 만드는 것까지는 분명히 성공한 것 같다. 그런데 출근하면서 아이와 보내는 절대적 시간이 부족해졌다. 새로운 직장으로 출근을 하면서 일이 너무 바빴다. 딸이 깨기 전에 출근하여 잠들어 있을 때 퇴근하여 얼굴을 못 본 날도 많았다. (어느 날 딸이 나한테 엄마가 에로스야? 해서 깜짝 놀란 적이 있는데 친구 집에서 만화그리스로마신화를 영접하여 에로스와 프시케 스토리를 알고 한 얘기였다!)
날이 갈수록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쌓여갔다. 아이에게 시간이 아닌 돈으로 뭔가 해주고 싶은 심리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옛날 아빠들이 아이랑 못 놀아주면 장난감이나 간식으로 해결하려는 마음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돈을 쓴 곳은 책이다.
바쁜 나에게 그림책을 고르는 시간은 휴식이기도 했다. 당시 회사가 대형서점과 가까워서 점심시간에 나가 사 올 때도 있었고, 바쁠 땐 인터넷으로 주문하기도 했다. 인터넷으로 주문할 때는 책을 집으로 배달시키지 않고 회사로 주문해서 퇴근할 때 내가 직접 들고 들어갔다. 엄마가 빈손으로 오지 않고 뭔가 들고 왔다고 생색도 내고도 싶고, 엄마는 책을 들고 다니는 사람으로 조금 고상하게? 각인시키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어릴 땐 주로 그림책이었으니까 늦게 퇴근해서 오더라도 읽어주기에 부담이 없었다. 거의 잘 시간에 집에 도착하면 책 표지만 보여주고 잠자리에 누워서 어떤 내용인지 상상해 보는 식으로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했다. 이미 잠들어 있을 때는 아이 머리맡에 그림책을 놓아두었는데 그렇게 몇 권을 쌓아두었다가 주말에 몰아서 읽기도 했다. (물론 나 없이도 아이가 먼저 책에 침을 발라두곤 했다) 일주일에 2권만 사도 한 달이면 십만 원 돈, 일 년이면 백만 원 돈이 훌쩍 넘어간다. 회사에서 나오는 복지포인트 전액을 책 사는데 썼다. 우리 형편에 큰 지출이었지만 꾸준한 콘셉트 유지를 위해 막대한 재정 투입했고 엄마는 책을 가져오는 사람으로 인식이 되었다.
엄마, 오늘은 무슨 책을 가져왔어?
그 말이 그렇게 좋았다. 내가 퇴근하면 딸은 나에게 달려들어 책을 찾곤 했다. 가끔 나를 기다리는 건지 책을 기다리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렇게 딸은 책을 기다리는 기쁨을 누렸고, 지금도 가끔 아이에게 줄 책을 산다. 물론 지금은 어릴 때보다 약발이 떨어졌다. 옛날엔 백발백중이었다면 지금은 겨우 3할 타율이나 되려나? 제법 커서 자기 취향이 생기기도 했고, 휴대폰도 손에 쥔 만큼 옛날만큼 책은 환영받지 못한다. 초심을 잃고 너무 수준 높은 책이나 읽히고 싶은 책을 들이미는 것도 문제다. 강요하면 더 하기 싫은 건 인지상정이니까 아이가 흥미를 느끼지 않으면 읽으라고 강요는 안(못)하고 언젠가 읽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아니면 제목이라도 보고 어디서 얘기 나오면 아는 척이라도 하게 가까이 놔둔다. 내가 읽으랄 때는 안 읽다가 선생님이나 매체에서 언급하여 흥미를 갖게 되는 경우도 꽤 있다. 어쨌든 지금도 책 가져오는 엄마 콘셉트 유지를 위해 꾸준히 책을 산다. 야구에서 3할 타율이면 괜찮은 건데, 그 정도면 타율도 괜찮은 거 아닌가 자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