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방해물 1
딸이 어렸을 때 학습만화가 크게 유행했다. 학습만화 몇 권씩은 다들 가지고 있었고, 책 싫어한다는 아이들도 학습만화는 열심히 봤다. 유행하는 학습만화 이름을 알고는 있었지만 어떤 내용인지 자세히 들여다본 적은 없다. 내용을 잘 모르면서도 학습만화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만화를 좋아하지 않았고 만화책이나 학습만화는 반쪽짜리 책으로 간주했던 것 같다. 만화가 내용을 지나치게 간추리거나 흥미 중심으로 가공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아무래도 만화 이미지에 익숙해지면 읽고 스스로 생각하는 일을 게을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아이에게 학습만화를 사 주지 않았다. 학습만화를 사달라고 졸라댔다면 또 한두 권쯤은 사줬을 수도 있는데 딸은 사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렇게 학습만화의 홍수 속에서도 내 딸은 학습만화를 안 보는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가 학습만화 싫어, 보지 마, 등등 노골적으로 말한 건 아니지만 내가 싫어하는 걸 눈치챈 딸이 내 앞에서만 안 볼뿐이었건 것.
자주 놀러 가던 친구 집에는 작은 마당이 있었다. 그 친구는 가끔 동네 친구들을 불러서 모닥불을 피워서 고기도 구워주고 그냥 불 앞에서 노닥거리기도 했다. 친구는 출판 쪽 일을 하고 있어서 책 이야기를 많이 했다. 친구도 나처럼 학습만화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이어서 학습만화를 사주지도 읽히지도 않는다고 했다. 우리는 학습만화를 읽히지 않는 부모, 아이들도 학습만화를 읽지 않는다는 동질감 같은 게 있었다.
마당에서 놀던 내 딸과 친구의 딸들이 시야에서 사라져 아이들을 찾으러 집안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있어서 들여다보니 당시 최고로 유행하던 학습만화에 모두 달려들어 내가 온 줄도 모르고 눈이 빠지게 보고 있었다. 그때 딸이 학습만화를 보는 광경을 처음 봤다. 내가 사주지 않아도 이렇게 친구네 집에 놀러 가서, 또는 도서관에서 다 보고 있다는 걸 확인했다. 친구 애들도 친구네 집에서 빌려오거나 벼룩시장 같은 데서 사 오기도 한다면서 집에 학습만화가 굴러다니는 것을 굉장히 못 견뎌했다. 그러다가 충동적으로 하도 많이 봐서 너덜너덜해진 학습만화를 불쏘시개로 사용하게 되었고(나도 수수방관한 셈이고) 그 광경을 목격한 딸들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 모습은 분서갱유나 화형식 같은 것을 떠오르게 했다.
막연하게 학습만화를 좋아하지 않던 나에게도 그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탄압하고 통제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 대상에 대한 애정과 추종은 더 심해지는 법이다.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는 생각 때문인지, 학습만화가 피해자가 되었다는 생각 때문인지 학습만화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학습만화를 이렇게까지 싫어할 일인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싫어하는 것은 어쩌면 근거 없는 비난이 될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좋아하게 만들어진 학습만화도 죄가 없고, 재미있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들도 죄가 없다. 아이들이 재미있게 보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게 지금 내 생각이다. 아이들이 재미있는 건 정말 재미있는 거다. 재미있는 걸 어떻게 말리나. 그날 이후로 학습만화에 대한 비호감을 내려놓기로 했다. 그렇다고 좋아한다는 건 거짓말이고, 그렇다고 대놓고 사주지도 않는다. 그냥 아이의 선택에 맡겨두기로 했다.
그렇게도 학습만화도 열심히 본 내 딸은 학습만화 예찬론자에 가깝다. 딸의 지론에 의하면 학습만화도 읽다 보면 언젠가 다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깨알자랑 좀 하고 가겠다) 오늘 중간고사 역사 시험에서 만점을 받은 딸이 말하기를 이게 모두 만화한국사이야기 덕이라고 한다. 어릴 때부터 너무 재미있게 봐서 역사 과목에 대한 호감이 증가했고, 교과서도 재미있게 되었다고 한다. 친구들이 역사 공부 어떻게 하냐고 물어보면, 만화한국사이야기 보라고 권해준다고 한다. 지나고 보니 학습만화를 보면 책을 좋아하지 않을까 하는 것도 다 기우였다. 학습만화 몰래 보던 딸 지금 어떤 책도 다 좋아한다. 학습만화를 불태웠던 친구의 딸도 책 좋아한다. 딸이 말하기를 글을 싫어하는 아이들은 학습만화도 싫어한다. 뭐든 열심히 본다는 것은 도움이 된다고 한다. 학습만화라고 무조건 나쁜 게 아니다. 학습만화도 좋은 거 많으니 학습만화 너무 싫어하지 말라고 요즘도 가끔 나에게 말한다. 이제 안 싫어해,라고 해도 안 믿는 것 눈치다. 어릴 때 뇌리에 박힌 것은 이토록 강렬하고 오래가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