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잡지를 구독하는 이유
지난 일요일 딸이 아이유 콘서트에 갔다. 몇 번의 실패 끝에 티(피)케팅 성공하고 한 달 동안 이 날만을 기다려왔다. 콘서트 시작 6시간 전 공연장인 상암월드컵경기장에 도착했다고 전화가 왔다. 엄마, 나 어떡해! 나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소싯적 느꼈던 감정이 소환되어 나도 덩달아 들떴다. 그리고 밤 11시가 다 되어 전화가 왔는데 콘서트가 별로였나? 싶을 정도로 너무나 차분해진 목소리였다. 어땠어? 너무 좋았다고 했다. 다만 기다리는 동안 더 좋았던 것 같다고. 여행 가기 전에 행복하듯 무언가를 기다리는 기쁨을 딸은 안다. 10년 전, 그러니까 다섯 살 꼬맹이가 우체통 앞을 서성이던 모습이 생각났다.
아침부터 푹푹 찌던 어느 여름날, 딸이 대문 옆 우체통 앞을 서성이고 있다. 홍시야 더운데 너 거기서 뭐 해? 어과동 기다려. 어과동? 그게 언제 올 줄 알고? 오늘 오는 날인데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어서 기다리는 거라고 했다.
어과동 오는 날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얼마나 보고 싶으면 더운 날 저렇게 나가 기다릴까, 신기하기도 했다.
어과동은 어린이 과학잡지인 어린이과학동아 줄임말이다. 어느 날 집에 어린이과학동아(어과동)이 배달되었다. 당신이 신청했어? 남편에게 물었다. 딸이 어과동을 보기에 아직 어리기도 하거니와 설사 보더라도 한 권씩 사야지, 정기구독하거나 전집을 사는 건 돈 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남편이 신청한 게 아니고, 업무상 관련 업체 미팅을 했는데 참고하라고 보내준 것이라고 했다. 그때는 딸이 대여섯 살 정도 됐을 때라 어과동을 보기에는 어리다고 생각해서 한쪽 구석에 봉지째 쌓아두었다. 심심하던 어느 날 어과동을 뜯어본 딸은 바로 빠져들었다. 어과동도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학습만화화되어 있었다. 사이사이에 과학 관련한 기사나 다양한 글이 끼어 있긴 했지만 주로 만화였다. 그러니까 글을 깨우치기 전이라도 볼 수 있었던 거다.
그래도 그렇지, 그게 도대체 얼마나 재미있으면 더운 날 저렇게 밖에 나가서 기다릴까. 이번엔 어떤 이야기가 실릴까? 하는 설렘이 있었을 것이고, 오늘 안 오면 어쩌지, 하는 초조함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서비스 기간이 끝났는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어과동이 뚝 끊기자 딸에게 금단현상이 나타났다. 어과동을 구독해달라고 매일매일 졸라댔다. 나는 뭐를 쉽게 사주는 사람이 아니지만 가격이나 알아보자, 알아보니 한 달에 두 권씩, 1년 구독비가 이십만 원이 넘었다. 안 볼지도 모르는데 너무 비싸다고 생각했고, 본다고 해도 학습만화에 그 만한 비용을 지불할 생각이 없어서 거절했다. 딸이 협상이라는 걸 시도했다. 3월 생일, 5월 어린이날, 12월 크리스마스 선물 모두 안 줘도 좋으니 구독해달라고. 세게 나왔다. 때마다 선물 사는 것도 일인데, 나의 귀찮음과 게으름도 구원하고 또 우체통 앞에서 기다리는 걸 또 보고 싶어서 큰맘 먹고 1년 정기구독을 신청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우체통부터 뒤적였고, 우체통에 없으면 우체통 앞에서 택배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새 잡지를 받으면 식음을 전폐하고 빠져들었고, 정말 본전 생각 안 나게 열심히 봤다. 매년 구독에 대한 자신의 의지와 열의를 확인해 주었고 재신임 절차를 거쳐 구독을 갱신해주었다. 그렇게 초등학교 졸업하고 어린이 딱지를 뗀 후에 구독을 중단했다. 좋아하면 그렇게 되는 것인지, 그 안에 여러 가지 활동들에 열심히 참여했다. 그림 응모를 해서 몇 번 당첨도 되고, 기자활동도 열심히 했다. 아무리 만화라도 뒤적이다 보면 콩고물이라도 떨어지는 법이다. 딸이 어릴 때부터 좀 똘똘하다는 평가를 주위에서 받곤 했는데, 그 대부분은 어과동에서 주워들은 잡지식이었다. 뭔가 딸이 아는 척을 해서 너 그거 어떻게 알았어? 하면 대부분이 어과동에서 봤어,라고 했다. 예를 들어 초등학생이 무려 주기율표를 아는 척하고 외울땐 이거 뭐, 우리 집안에 과학자라도 나오나 싶어 살짝 기대도 하고 그랬었다.
어과동 과월호가 너무 쌓여 다른 아이들도 볼 수 있게 딸아이가 다니는 피아노학원에 가져다 놓자고 하면 딸은 결사 반대했다. 과월호도 보고 또 본다고 했다. 드디어 초등학교 졸업 무렵 이사를 빌미로 버려도 된다는 허락을 받고 버릴 수 있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딸 친구 엄마들이 말렸다. 어과동 과월호가 중고시장에서도 꽤 비싸게 팔린다고 했다. 그게 왜 비싸게 팔려요? 과학잡지를 어려서부터 본 아이들이 과학고, 영재고를 많이 간다는 이야기 있다는 것이다. 어과동 최고의 마케팅 전략인 것 같았다. 다섯 살 때부터 어과동을 너덜너덜할 때까지 보고 주기율표니 상대성이론을 운운하기도 했던 딸은 과학고, 영재고 그런 건 희망하지도 않고, 그럴 성적도 안된다. 다만 들어본 게 있어서인지 과학에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 정도다. (그게 어디냐) 뭐니 뭐니 해도 어과동이 딸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기다리는 기쁨이라고 생각한다. 어린 왕자에서 사막여우가 어린 왕자를 기다리는 기쁨을 표현하며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라고 말한 것처럼 딸은 오늘 어과동이 오는 며칠 전부터 행복해졌고, 이후 며칠 동안도 행복했다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그렇게 행복했을 딸을 생각하면 과학고? 그런 건 하나도 부럽지가 않다(ㅎ)
*주의 : 어과동 광고글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