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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요 Sep 11. 2024

책 읽어주기 전에 꼭 해야 할것

각인 효과 그리고 호기심 유발 전략

아무튼 책 좋아하는 아이로 만들기 위해 딸에게 책을 많이 읽어줬을 것 같지만, 생각보다 책을 많이 읽어주지 못했다. 우선 나부터 살고 봐야 했다. 아이를 낳고 나니 일단 몸이 힘들었고, 혼란과 정신 분열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아기를 낳긴 낳았는데, 어떻게 키워야 할지 막막했다. 아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어떻게 맞이하고 기존의 나의 세계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할지 전혀 준비되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바뀐 정체성에 대해서도 적응이 어려웠다. 나 혼자만 잘 먹고살면 되는 게 아니라 한 아이를 전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엄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애를 먹었고 아기를 낳으면 저절로 생길 줄 알았던 모성애가 발휘되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일단 나부터 살아야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던지 말던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벼락치기를 시작했다.


젖먹이 엄마의 삶은 집에 고립되어 외부와 단절된다. 게다가 그때 나는 휴대폰이 없었다. 내가 학습하고 다른 세계와 접속할 수 있는 수단은 오로지 책이었다. 출산 직전까지 워커홀릭이었고, 거의 번아웃 지경이어서 출산 휴가, 육아 휴직에 들어가면서 육아에 전념하겠다는 의지로 용감하게 휴대폰을 없애버렸다. 그리고 당장 어떻게 아기를 키워야 할지 동서고금의 육아서부터, 모성애라는 것은 무엇이고 부모 됨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탐구하는 책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할 거리를 던져주는 책을 많이 읽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책을 많이 읽었던 것 같다. 왜 그렇게 전투적으로 많이 읽었을까? 육아엔 정답도 없고 왕도라는 것도 없다. 그러니 이 책 저 책 사이를 헤매고 다닌 것이다.


책 읽는 시간은 주로 아기가 자는 시간, 또는 젖 먹이는 시간이었다. 젖을 물리고 책을 읽다가 꾸벅꾸벅 조는 일이 많았다. 한참 책 읽고 있는데 아기가 깨면 그렇게 실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아기가 울지 않는 이상 아기를 내버려두고 책 한 줄, 한 장이라도 더 읽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런 나의 투쟁적 읽기가 본의 아니게 아기에게는 묘한 자극이 되었던 것 같다. 아기 입장에서는 저 엄마라는 작자는 어디에 한눈을 팔고 있는 거지? 궁금했을 지도 모르겠다. 젖 먹으면서 내 책을 만지작거렸다. 커 가면서 책에 묘한 경쟁심을 느꼈는지 내 책에 침을 바르고 찢고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는 내 책을 숨겨놓기도 했다. 한참 더 커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직장 선배가 재미있다고 추천해 줘서 만화 도쿠가와 이에야스 전집을 읽고 있었는데, 재미있어서 멈출 수가 없었다. 어린 딸은 내가 붙들고 있는 (만화)책을 궁금해했다. 하지만 그 만화에는 잔인하고 선정적인 장면이 많아서 보여주기가 어려워서 달려들면 나는 책을 덮으려고 애를 썼다. 아마 그것이 아이의 호기심을 자극시켰고 나중에 알고 보니 나 몰래 딸도 다 봤다고 했다. 내가 보여주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오히려 책을 읽힌 셈이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딸에게 나는 책 읽는 엄마로 각인된 것 같다. 오리가 처음 보는 것을 엄마라고 생각하듯 아기에게 나는 책 읽는 엄마로 각인된 것이다. 소위 책 육아를 장려하는 분들이 강조하는 책 읽는 부모가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나는 책을 좋아하지만 맨날 책만 보지 않는다. 시간으로 따지면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딸에게 나는 여전히 책 읽는 엄마다. 재미있는 것은 내가 휴대폰을 들여다본다고 해서 딸이 내 휴대폰을 들여다보지 않지만 내가 책을 읽으면 딸은 내 책을 들여다 본다: 엄마의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일 수도 있고 자기도 이제는 휴대폰이 있으니까 휴대폰 내용은 궁금하지 않아서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딸이 자꾸 내 손의 책을 들여다 보고 더 나아가 내 서가를 기웃거리고 이따금씩 꺼내 읽는 건 어릴 때 버릇이 이어지고 있는 게 아닐까 추측하곤 한다. 물론 모든 아이들이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아무튼 책 좋아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으면 부모가 먼저 책을 읽거나 궁여지책으로 책을 들고 있는 모습을 어릴 때부터 각인시키는 것은 확실히 나쁘지 않은 출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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