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우니까 됐다
엄마 손목 나갈까 봐 그랬나, 이유식 따윈 건너뛰고 젖 먹다 바로 밥으로 직행한 아이,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아침밥을 챙겨 먹는 아이,
한국인은 밥심이라며 삼시세끼 웬만하면 밥을 고집하는 아이,
엄마가 비실대면 밥을 제대로 안 먹어서 그렇다며 제때 밥을 챙겨 먹으라고 잔소리하는 아이,
고봉밥을 퍼주면 밥알 한 톨까지 깨끗하게 먹는 아이,
학교 급식에서 밥 좀 더 달라고 애원하는 아이,
밥을 잘 먹어서 그런지 군것질을 잘 안 하는 아이, 그런 아이가 내 딸이다. 소싯적에 나는 밥을 잘 안 먹어서 엄마 속을 애태웠다. 그런 내 속에서 나온 아이는 스스로 밥을 잘 먹고 건강하니 어떻게 안 예쁜가.
밥 먹는 게 너무 예쁘고 밥 잘 먹는 게 너무 고마워서 수시로 말한다. 너에게 가장 고마운 건 밥 잘 먹는 거다. 네가 제일 예쁠 때는 밥 잘 먹을 때다. 딸에게 하는 말이 모두 진심은 아니지만 이 말만큼은 10000% 진심이다.
그런데 엄마에게는 왜 이런 마음이 안 드는가? 지금 내가 돌보는 엄마도 삼시세끼 밥을 꼬박꼬박 잘 먹는다. 뇌출혈로 쓰러지기 전에도 잘 먹었고, 쓰러지고 난 뒤 심지어 수술하고 중환자실에서도 밥을 먹고, 병원에 입원해서도 잘 먹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꼬박꼬박 잘 먹고 있다. 의식은 흐릿하고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가고 말은 한마디도 못 할 때가 많지만 끼니를 거른 적이 없다. 삼시세끼 꼬박꼬박 죽이 아닌 밥으로, 환자식이 아닌 평소 먹던 대로 밥을 먹는다. 이렇게 잘 먹으니 내가 엄마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밥 해주는 거라고 생각하고 삼시세끼 열심히 해먹인다. 그런 엄마는 왜 딸처럼 예쁘고 고맙다는 생각이 안 들까?
딸이 세월아 네월아 천천히 먹어도 고맙고 줄줄 흘리면서 먹어도 예쁜데, 엄마에게는 왜 그런 마음이 안 드는가.
왜 나는 엄마에게 빨리 먹이려고만 하는가.
엄마가 먹다가 흘리면 왜 짜증이 나는가.
밥이라도 잘 먹어서, 잘하는 게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다가도 가끔 밥만 잘 먹으면 뭐 하나, 밥만 먹고 살만 쪄서 그 무게가 나를 힘들게 하는 게 아닐까 못된 생각이 자꾸 삐져나온다.
똑같이 밥 잘 먹는데 딸과 엄마를 바라보는 마음은 왜 이렇게 다른가.
그 마음의 간극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내리사랑이라 그런가.
엄마를 딸이라고 생각하면 될까.
알게 모르게 내 의식 속에 노화, 병, 장애, 죽음에 대한 혐오가 깃들어 있는 건 아닌가.
저녁을 먹고 후식으로 먹으려고 아빠가 친구에게 얻어온 왕대추를 씻어와서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대추 먹을 거야?
대답이 없다. 이럴 줄 알았다. 어차피 대답을 기대한 것도 아니다. 습관적으로 또 물었다. 어차피 대답이 없을 줄 알면서.
대추 하나 먹을 거야? 두 개 먹을 거야?
엄마의 입이 뭘 말하려는 건지 대추를 먹으려고 시동을 거는 건지 움찔거렸다.
두 개 먹을 거야.
빵 터졌다. 아빠는 허허, 웃으면서 남 씨 먹보네, 했고, 나는 대추 두 알을 손에 쥐어 주면서 엄마 뚱보네, 했다. 대추를 아슬하게 보이지만 야무지게 쥔 손을 입 가까이에 끌고 올라가니 입이 앞으로 마중을 나오고 손에 온 힘을 모아 입으로 가져가 마침내 윗니 아랫니 사이에 대추를 물고 아삭, 한 입 두 입 베어 오물오물 씹어 먹는데, 이 아줌마 뭐냐. 다람쥐냐, 왜 이렇게 귀엽냐! 예쁘고 고마운 마음은 안 들었지만 귀여우니까 됐다. 귀여우면 다 이긴 거다. 엄마의 한 마디에 죄책감과 괴로움으로 힘들었던 내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