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존재들
오늘 하루종일 곰돌이 스티커를 보고 있다. 어제 다녀간 딸이 남기고 간 흔적, 남편이 딸 먹으라고 사온 편의점 푸딩에 들어 있었던 스티커.
엄마, 이건 스티커라기보다 띠부씰이라고 불러.
띠부씰?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식품에 들어있는 캐릭터 스티커를 띠부씰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띠부실이 딸의 분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를 자꾸 부르고 나는 대답 대신 띠부실을 문지르고 쓰다듬고 있다.
딸이 다녀가면 좋은 만큼 힘들다. 혼자 남겨진 것 같은 외롭고, 마음이 텅 빈 것 같이 허전하고 쓸쓸하다. 나를 못 가게 만든 엄마가 원망스럽기도 하고 그 옆에 무기력한 아빠도 괜히 밉다. 보고 만지고 느끼고 싶은 딸과 남편이 그립고, 심지어 우리 집구석구석에 대한 감각이 폭풍처럼 내 마음을 뒤흔들고 이내 초토화시킨다. 그래도 큰 두려움은 아니다. 여러 번 반복하여 경험하다 보니 나는 안다. 당장은 휘몰아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곧 잠잠해지고 나는 다시 흩어지고 상처 난 마음을 모아서 엄마에게 가게 될 것이다.
엄마 간병하면서 가장 힘든 건 엄마 간병이 아니다. 딸을 태운 남편의 차를 바라보며 백미러로 내 모습을 보고 있을 딸을 위해 아무렇지도 않은 밝게 웃으며 씩씩하게 뒤돌아 서야 할 때, 눈물을 뚝뚝 떨구다가 엄마 아빠가 있는 집 문을 열면서 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딸을 해 먹이고 남은 식탁을 치우고 싱크대에 수북하게 쌓인 설거지를 할 때, 설거지를 마치고 거실에 엄마와 아빠를 남겨두고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서 자고 싶지만 딸이 도착했다는 전화가 올 때까지 유튜브에서 방황할 때가 힘들다. 같이 살았으면 이렇게까지 그리워하지 않았을 텐데 같이 살았다면 오히려 지지고 볶고 서운하고 무덤덤하겠지만 떨어져 사니 내 옆에 없는 존재들이 더욱 진한 존재감으로 다가온다.
엄마는 반대다. 엄마는 내 옆에 있지만, 엄마의 존재감은 점점 희미해져 간다. 엄마의 튼튼하던 육체는 먹는 것 외에 모든 기능을 잃었고, 엄마의 정다운 언어는 사라졌으며, 언어로 표현되던 엄마의 정신과 마음은 아무리 애를 써도 잘 느껴지지 않는다. 서로 소통하고 교감할 수 있는 것이 사라지니 내 옆에 있지만 엄마라는 존재를 느끼기가 어렵다. 어떨 땐 엄마라는 호칭도 어색할 정도로 엄마에 대한 책임감만이 홀로 남아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것 같다.
이럴 때마다 나를 다독이고 다시 엄마에게 향하게 하는 건 엄마의 현재가 아닌 미래다. 엄마가 나를 영영 떠나게 되면 그때면 다시 엄마를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가슴치고 후회하게 될 것이다. 있을 땐 모르고 없을 때 비로소 알게 되는 인생의 아이러니, 아직 오지 않은 미래, 빨리 왔으면 하고도 바라고 제발 천천히 오기를 바라는 그 미래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하며 존재감이 사라진 엄마라는 존재에 다가가려고 애를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