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것의 재발견
지방의 작은 소도시에 살아서 그런지 어릴 때부터 더 넓은 세계로 나가고 싶었다. 성인이 되고 조금이라도 돈이 모이면 여행을 떠났다가 돈 떨어지면 들어왔다. 더 멀리, 더 오래 머물러 있는 여행을 꿈꾸고 가능한 그렇게 했다. 아이가 커 가고 지금은 엄마를 돌보는 사람으로 살면서 한동안 멀리 떠나는 여행은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여전히 가이드북과 지도 보는 것을 좋아한다. 최근에 여행 유튜브를 보면서는 내가 저걸 했었어야 했는데, 내가 하면 딱인데, 하는 마음이 있다.
그렇게 늘 떠나는 삶을 꿈꾸다가 다시 이 작은 도시로 돌아왔다. 처음에 올 때는 여기서 살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역시 인생은 마음대로 되지 않고, 마음대로 되면 재미없는 법. 지금은 아예 가족 모두가 이 작은 도시로 옮겨 오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내 고향이기도 하지만 30년 가까이 떠나 있던 곳이어서 틈나는 대로 찬찬히 돌아보고 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고 했던가. 어렸을 때는 몰랐던 고향을 재발견하고 있다. 그곳 중에 하나가 청풍호다. 청풍호는 충주댐이 만들어지면서 마을이 수몰되고 생긴 호수다. 요즘엔 벚꽃길과 여름에 열리는 제천영화음악제로도 꽤 알려져 있다. 재작년에 처음으로 김장을 하러 엄마 집에 왔었다. 김장을 마치고 커피 마시러 가자며 갔던 곳이 청풍이었다. 11월 말 겨울이었고, 또 산으로 둘러싸인 제천은 해가 더 빨리 넘어가는데, 그날도 가다 보니 해가 뚝 떨어졌다. 차를 멈추고 서서히 어둠에 잠기는 청풍호를 보는데 스위스 루째른 호수가 떠올랐다.
가난한 배낭여행객이었지만 돈이 없지, 낭만이 없나. 낭만을 쫓던 시절이었다. 시인이자 음악비평가였던 루드비히 렐슈타프가 "스위스 루체른 호수의 달빛 아래 물결에 흔들리는 조각배"라고 비유하여 월광 소나타라는 닉네임으로 더 유명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스위스 루체른을 찾아갔었다. 그때도 11월말 스위스의 비싼 물가에 햄버거로 배 채우면서도 찾아간 루체른 호수는 지붕이 있는 카펠 다리 덕에 신기하기는 했어도 내가 상상했던 낭만을 채워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춥고 흐렸던 날씨 탓도 있었을 것이지만 월광 소나타를 들으며 내가 상상했던 모습은 아니었다. 그래도 실망해서는 안 된다.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모아 이거 보러 산 넘고 물 건너 바다 건너서 왔는데 실망해서는 안 되는 여행이었다. 틀림없이 아름다워야 한다며 내 눈을 의심하고 충분히 아름답다며 체면을 걸면서 호수를 바라봤던 어린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렇게 내 낭만 속의 루체른 호수, 월광 소나타의 호수는 스위스가 아닌 여기, 30년 만에 다시 온 내 고향 제천의 청풍호에 있었다. 해 질 녘 어둠에 잠긴 모습에 더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고, 기대가 1도 없었기에 더 좋았을 수도 있고, 등잔 밑이 어둡다고 가까운 것을 평가절하하는 마음이 세월이 흘러 철이 들었을 수도 있고, 허세와 허영이 떠난 나이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때 그런 생각을 했다.
돌고 돌아 돌아와 보니 가까이에 스위스가 있었네
이제 그런 눈으로, 그런 마음으로 내 고향 제천을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