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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요 Nov 19. 2024

천년 묵은 이무기가 느닷없이 솟구치는 그곳

수묵화의 도시를 꿈꾸며

고향이 제천이라고 하면 단박에 알아듣는 사람이 많지 않다. 누구나 알 법한 유적이나 관광지도 없고, 이렇다 할 특산물이나 맛집도 없고, 제천 출신 유명인도 거의 없다. 그래서 아쉬운 대로 꺼내보는 게 역사 교과서에 언급되는 '의림지'다. 어렸을 때는 삼한시대에 축조된 저수지라고 배웠는데 이번에 가보니 삼국시대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 사이 뭔가 발굴이 있었고 그 결과 시기가 조정된 모양이다. 어쨌든 의림지는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이고, 그중 유일하게 아직도 농사용으로 사용되고 있는 살아있는 저수지다.


나에게 의림지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다섯 살 때부터 어린이집에 다녔는데 그 무렵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10년 넘게 봄, 가을로 소풍을 갔던 곳이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저수지 하나가 있고, 그 뒤로 소나무가 빽빽한 솔밭공원이 있어서 김밥 먹고 보물찾기 하기에 좋은 장소이긴 하다. 하지만 어렸을 때, 심지어 한두 시간씩 걸어서 워낙에 많이 갔던 곳이라 지긋지긋했고, 가도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하여 남편과 딸도 데려간 적이 없다. 하지만 제천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한 번쯤 가고 싶어졌다.  


30년 만에 다시 가본 의림지는 여전했다. 변한 게 없어 보여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아니었다. 의림지 주변으로 산책로, 인공폭포, 루미나리에, 투명다리 등이 생겼고, 주위에는 식당과 카페가 많이 들어섰다. 그리고 제천시 유일한 공립박물관인 의림지역사박물관이 생겼다. 어디 가면 박물관에 꼭 가보는 나름 박물관 좋아하는 나의 한 줄 감상평은 다음과 같다.


없는 살림에 차리느라 애썼다


저수지 하나로 박물관 하나를 꾸미기 위해 많이 고민하고 애쓴 것이 느껴졌다. 박물관을 통해 새로 알게 된 사실도 있었다. 의림지는 이 지역 가장 큰 산, 그래서 우리 초등학교 교가에도 등장하는 용두산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이 평지와 만나는 지점에 만들어진 관개용 저수지다. 고대 이 지역에서 벼농사가 시작되고 관개의 필요성에 의해서 제방을 쌓아 만들어진 것이다. 제천이라는 지명도 거기서 유래한다. 그 아래로는 의림지에서 물을 대 농사짓던 논밭이 아직도 펼쳐져 있다. 청전동이라는 지명도 여기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된다. 어릴 때 논둑을 걸어서 의림지로 소풍 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저수지 둑이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둑방 근처에 인공 제림을 했는데 그 나무가 주로 소나무였고, 그 영향으로 자생하게 된 소나무들이 모여 공원이 된 곳이 김밥을 먹고 앉아 놀던 솔밭공원이다. 어릴 땐 다 따로 놀던 용두산, 의림지, 솔밭공원, 청전동이 퍼즐 조각 맞춰지듯 하나로 맞춰졌다.


없는 살림에 차려놓은 박물관도 그런대로 유익했다. 몇 가지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의림지의 사계라는 제목으로 꾸며놓은 실감영상실이 새로울 것은 없지만 평일이라 그런지 아무도 없길래 빈백에 누워 멍 때리고 있었다. 그런데 자꾸 영상에 나오는 동물과 교감해 보라는 메시지가 나와서 귀찮음을 무릅쓰고 일어나 터치를 했다. 근데 내가 화면의 동물을 터치하면 동물들이 도망갔다. 몇 번 반복하니 내가 야생 동물을 괴롭히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밖에는 발로 물고기를 쫓아보라는 표지판도 있었다. 물론 영상이고 가상이긴 하지만 동물과의 교감과는 거리가 먼 상호작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마저도 고장 나거나 작동 중에 멈추는 것도 많았고. 역시나 없는 살림에 밥상을 차리다 보니 생긴 해프닝일 수 있다.


긴 세월 동안 의림지는 뭔가를 채우기 위해 애를 쓴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반대로 채움보다 비움의 전략은 어떨까 상상해본다. 전국 어디 가든 출렁다리가 출렁이고 케이블카가 매달려있다. 전국 어디 가든 인공조명이 반짝이고 인공 폭포가 떨어진다. 뭔가는 해야겠는데 뭔가가 없어서 뭐라도 하려고 유행하는 것을 따라하다 보니 생기는 현상이다.


모두가 다 하는 그저그런 거 말고 거꾸로 해보는 것은 어떨까? 모두가 화장을 하고 액세서리로 꾸밀 때 반대로 민낯의 수수한 얼굴은 어떤가? 모두가 화려한 색과 조명으로 치장을 할 때 오히려 담백한 수묵화는 또 어떤가? 천년 묵은 의림지에 인공폭포를 만들기보다 기왕에 있는 용추폭포를 살리고, 저수지에 알록달록한 루미나리에를 세우기보다 빛과 소음이 없는 깜깜하고 아득한 무공해 의림지였다면 어땠을까. 재미없다고? 그러다가 한방을 노리는 거다. 한밤중 조명 하나 없는 깜깜한 저수지에 느닷없이(예고없이 랜덤으로 매일 바뀌는 시간) 전설에 나오는 천년 묵은 이무기가 저수지 한 가운데로 갑자기 솟구쳤다가 스르륵 사라지는 상상을 해본다. 언제 나올지 모르는 이무기 보려고 사람들이 몰려오지 않을까? 물론 이무기는 임팩트가 있어야겠지. 예고없이 효과음과 함께 갑자기 솟구치면 사람들이 놀라지 않을까? 운 좋은 사람들이 보는 거고, 매일 시간을 예측하는 사람도 생겨나고 재미있을 거 같은데. 아닌가? 뭐 아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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