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가격 착한 식재료들로 집밥 해 먹기
1월 27일부터 2월 26일까지, 말레이시아에 딱 만 31일 머무르기로 했다. 숙소에서 온전한 방을 배정받기까지 우당탕탕 좌충우돌을 겪었고(자세한 에피소드는 아래의 링크를 눌러주시길!)
https://brunch.co.kr/@idooidool/40
한국에서 가져오지 못했지만 생활하는데 꼭 필요한 것들(쌀, 빨래 건조대, 식수, 식수 디스펜서)을 샀다. 싱크대와 세면대, 샤워기에 필터를 설치하고 짐을 풀어 정리하니 비로소 마음에 여유와 안정이 찾아왔다.
나에게는 여유와 안정이 고작 조금 생겨도 일을 벌이고야 마는 기질이 있다. 말레이시아에까지 와서 피곤하게 왜 그러냐고 물으신다면, 나도 잘 모르겠다. 마음에 여유를 과하게 느끼면 늘어지고, 노곤해지며, 심지어는 얕은 우울감까지 느끼는 게 나라는 사람이다. 어느 정도의 노동력과 분주함, 힘듦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랄까. 이렇게 써놓고 보니 성격이 이상한 사람 같다. 하여간 말레이시아에 와서도 그 성격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호텔형 콘도는 거주하기 편리했다. 매일 수건을 새것으로 갈아주고, 설거지가 남아있으면 설거지도 해주며 쓰레기통을 매일 비워준다. 밥도 여행 왔다는 핑계로 매 끼니 사 먹을 수도 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려면 그럴 수 있는 공간과 시간 속에서 살고 있다. 한달살이라 하면 뭔가 일상적인 생활을 해야 할 것 같지만 일상의 피로와 부담에서 벗어나 여유와 휴식을 취하기 위해 여행이라는 목적으로 온 것이며, 더군다나 이곳은 싼 물가와 휴양지로 많이들 온다는 동남아 아닌가.
그러함에도 나는 '집밥'의 끈을 놓지 못했다. 아니, 놓지 않았다고 하는 표현이 적당할 것이다. 남편이 있었던 처음 2일 동안 요리다운 요리는 제대로 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한국에서 가져온 사골팩에 떡을 풀어 아이들에게 즉석 떡국을 해준다거나, 포트로 끓인 물에 동결 건조국을 풀어 밥을 말아 남편에게 내놓거나, 한국마트에 가서 컵라면을 사 와 끓여 먹는 게 전부였다. 혼자 왔다면 어찌어찌 간단하게 외식이나 빵으로 끼니 때우며 살 수도 있었을 텐데. 과연 자랑스럽고 강한 한국의 어머니였을까. 3일 차부터는 저녁을 안 해 먹일 수가 없었다. 가뜩이나 식욕이 없는 아이들이 해외에 나와 라면과 빵과 과자만 먹고 있는 꼴을 차마 눈뜨고는 못 보겠더라. 엎친데 덮친 격으로 둘째는 물갈이를 하는지 배가 아프다며 설사를 하기 시작했다. 밥심으로 사는 한국인답게 현지 마트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렌터카도 있겠다, 네비도 있겠다. 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단, 엄청나게 넓은 땅덩이 덕분인지 쇼핑몰도 널찍하게 되어 있고, 관광객이 갈 만한 시간대는 어느 지역이나 그러하듯 한가로웠다. 처음 가본 말레이시아 마트는 낯설지만 식자재 가격을 보곤 정감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처음 맞이하는 과일코너에서 바나나 한 송이에 천 원, 수박(물론 우리나라 수박보다는 크기가 조금 작다.) 한 통에 3천 원, 망고 한 개에 2천 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을 보고선 무심코 그것들을 집어 들었다. 두 번째 코너는 채소코너. 과일만큼 우리나라와 대비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저렴하긴 매한가지. 전 세계 웬만한 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있을 법한, 비슷한 맛이 예상되는 당근과 감자, 양파를 집어 들었다. 말레이시아는 돼지고기를 금기시하는 나라이니 ( 현재 7일 차, 마트를 총 3군데 둘러봤는데 돼지고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닭고기 안심을 조금 사고 카레가루만 사면 그나마 만만한 카레는 만들어볼 법한데. 닭고기는 돼지고기를 대체하는 수단이라 그런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제 마지막 관문은 카레가루다. 말레이시아 인구에서 인도계가 약 7%를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예상하는 '카레 가루'는 찾기 힘들었고, 외국 소스 코너에 일본 카레 고형분을 팔고 있었다. 너무 반가워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외국에 와서 외국 소스 코너를 기웃거리는 내가 웃기기도 하고 모순되기도 하지만, 반가운 고국의 맛으로 아이들의 식욕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한국인은 밥심으로 사는 것 아닌가.
가격 좋은 각종 과일과 채소, 고기를 사들고 돌아오는 마음은 걱정 반 설렘 반이었다. 과연 우리 아이들에게 고향의 맛을 다른 나라에서 재현해 내어 입맛 잃은 그들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할 것인가, 아니면 타국의 재료로는 역부족인 것인가. 그날이 집밥 행로의 첫 갈림길인 셈이었다.
우리 집의 반절되는 싱크대에서 야채 껍질을 깎고, 우리 집의 반절만 한 도마 위에서 야채를 썰고, 고기를 손질하고 있자니 마치 소꿉놀이를 하는 것 같았다. 무사히 재료들을 손질한 후, 볶고 삶아 고형 카레를 퐁당퐁당 넣고 섞으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뿌듯함이 몰려왔다. 한국에서 비행기로 7시간을 걸려 날아온 이곳 말레이시아 조호바루에서, 장을 보아 요리를 만들다니. 그러고 보니 내 생애 첫 해외 요리인 셈이다.
캠프를 다녀온 아이들은 신기한 듯이 말했다. "엄마, 밥은 밥인데 모양이 길고 가늘었어." "간식으로 머핀을 먹었어."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너희가 저녁만큼은 엄마의 정성을 담은 익숙한 맛으로 먹어라.
카레를 내놓으니 눈이 휘둥그레진다. "엄마, 이거 어떻게 만들었어?, 한국에서 재료 다 가져온 거야?" "가져오긴, 말레이시아 마트에서 장 보고 엄마가 직접 만들었지." 아니나 다를까 한 접시를 해치우고 만족스러운 듯 웃음을 짓는다. 아이들의 긍정적인 반응에 탄력이 붙은 나는 다음날은 조금 난이도를 높였다. 김밥.
그다음 날은 나만의 퓨전요리 한 그릇 상을 내놓았다. 한국에서 가져온 다진 마늘, 간장, 꿀과 현지 양파와 파로 조리한 간장 닭갈비와 샐러드. 한국에서는 애정하는 인터넷을 믿고 의지했다면, 이곳에서는 나의 직감과 그동안의 경험을 믿고 시도해 보았다. 이래 봬도 모험가 정신이 강한 MBTI 성향이다.
나의 점심도 방에서 샐러드와 맥주를 준비해 여유롭게 음미한다. 카톡으로 사진을 친구들에게 보냈더니 네가 만든 것이냐며 깜짝 놀란다. 싱싱한 새우를 사 갖고 와서 프라이팬에 구운 다음, 상추와 토마토, 파프리카 위에 올리고 드레싱을 뿌리면 밖에 나가서 먹는 음식보다 훨씬 가격도 저렴하고 질도 우수하다. 대부분 룸서비스이거나 포장해 와서 먹는 줄 알았겠지. 누가 번거롭게 해외에 나와서까지 요리를 하겠는가. 그런데 요리는 예상했던 것만큼 어렵지도 않았고, 오히려 예상보다 더 해 먹는 재미가 충만했다.
내일은 말레이시아 레고랜드, 일요일은 말레이시아 대표 명소인 반딧불이와 아이들이 좋아하는 악어 농장을 탐험하러 가 볼 예정이다. 그때도 나의 요리는 계속될 것이다. 휴대하기 좋고 먹기 간편한 김밥으로.
해외에서 그 나라 식자재를 구입해 직접 요리를 해보는 경험. 색다른 모험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해외 숨은 맛집을 찾은 것만큼이나 놀랍고 흥미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