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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두 Feb 07. 2024

기미와 맞바꾼 것들

말레이시아에서 산책하기

 3년 전쯤 외국인과 영어 회화 모임을 할 때 한 영국인이 나에게 말했다.     

 "나는 한국에서 걸으면서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고, 천천히 그 나라에 대해서 알아가는 것 같아. 그래서 걷기를 즐겨해."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나는 어떤 한 호기심 많은 외국인이 이곳저곳 구석구석을 탐색하기 좋아해 걷기를 하는구나 싶었다. 한국에서 딱히 호기심을 갖고 볼 만한 무언가는 거의 없기 때문에, 육아에 치여 1분 1초를 아껴야 하기에 주로 차를 애용했었다.      


  이곳 말레이시아에 온 지 12일 차, 다른 친구나 지인과 같이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이들이 캠프를 간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좋게 말해 온전히 나만의 시간이다. 남편은 이렇게 물었다.      

 "말레이시아 가서 혼자 뭐 할 거야?"       

 맞다. 내가 돈이 정말 많아서 매일매일 귀족처럼 생활하는 상황도 아니고, 그렇다고 방 안에만 있기에는 우울하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내가 해 온 외국 생활로 미루어 확신에 가까운 짐작으로 말했다.     

 "할 일이 생길 거야."               


 나의 관심은 최근 세 가지다. 오로지 이곳 착한 물가, 예쁜 상태의 식재료를 잘 이용하여 아이들에게 먹일 저녁을 잘 차리는 것, 말레이시아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생생하게 브런치에 쓰기, 말레이시아에서 하루만 보 걷기.

               

 걷기 운동은 한국에 있을 때부터 맨발 걷기 운동으로 활성화되고 있었다. 걷기가 몸에 좋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어디에선가 걷는 것이 인간에게 필수적인 요소라고, 인간은 걸으면서 진화해 왔다는 신문 기사도 봤었다. 하지만 1월의 한국은 매서운 강추위와 칼바람이 거센 겨울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걷는 것은 지루하게 느껴졌다. 저 멀리 갔다가 언제 다시 돌아온단 말인가. 걷는 시간 동안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회의감도 들 것만 같고. 얼굴에 생기는 기미와 주근깨도 걱정해야 하고, 오늘 미세먼지는 어떻지? 확인도 해야 하고. 걷는다는 것은 여러모로 번거롭고 성가신 일이었다. 폰 건강 앱을 살펴보니 말레이시아 오기 전까지는 하루 2000보 남짓 걸었다. 다시 생각해 봐도 꼭 필요한 걸음만 했던 것 같다.

                

미세먼지라는 말이 무엇인지 모를 것 같은 말레이시아의 날씨

 말레이시아에서는 딴 판인 나를 발견한다. 무엇보다 이곳은 산책을 안 하고 가만히 방 안이나 실내에 있기엔 너무 아까운 날씨와, 맑은 하늘이 보인다. 내가 오기 직전의 날씨는 비가 너무 많이 쏟아져서 침수되는 지역도 많았다고 한다. 다행히도 내가 있던 기간 동안에는 한 번도 홍수가 난 적이 없다. 가끔씩 스콜성 강우가 내리기도 하지만, 산책을 하면서 쏟아지는 비를 맞아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강렬한 햇볕에 탈까 봐 호텔 18층 GYM에 가서 운동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창 너머로 비치는 맑은 공기와 따사로운(?) 햇볕이 나에게 밖으로 오라고 손짓하는 것만 같았다. 말레이시아에 온 지 6일 차 때부터, 에라 모르겠다. 밖을 걷기 시작했다. 단순히 걷기만 하면 재미가 없을 테니 하루만 보라는 목표치를 세웠다.                


 한국에서 가져간 선캡과 선크림으로 방어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얼굴은 완전히 가려지지 않을 것이고, 내 눈에는 잡티가 벌써 보이는 것만 같다. 그런데, 얼굴에 잡티를 얻은 만큼 귀한 것도 얻었다.                


 먼저 불면증이 사라졌다. 한국에서는 잠자다가도 새벽에 깨고, 잠을 이루려고 뒤척이다가 잠이 오지 않으면 결국 뜨개질을 꺼내거나 책을 읽었다. 그러다가 잠이 들면 아침에 겨우겨우 일어났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게 없다. 잘 자고 잘 일어난다. 그것이 감사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걷기 운동 전 후로 매트 위에서 스트레칭과 가벼운 요가를 해주니 근육 뭉침이나 결림이 없다. (매트도 역시 가격이 착하다. 우리나라 다이소와 흡사한 매장에서 약 5,000원 주고 구매했다.) 광합성이 인간에게도 필요함을 느끼는 요즘이다.                

 두 번째, 핸드폰에서 벗어나 생각할 시간이 주어진다. 물론 중간중간 알림이 오거나 시간을 확인할 때는 자연스럽게 보게 되지만 그 외의 경우에는 걸으면서 핸드폰을 하는 것은 위험하거나 피곤하기 때문에 안 하게 된다. 이번 주 싱가포르로 여행을 갈 때 어떠한 경로로 갈 것인지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보거나, 미리 준비해야 할 것을 생각해 본다거나, 읽고 있는 책의 구절을 떠올리며 현실 속에서 내가 적용할 부분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엊그제 구매한 책은 'Stop fear from stopping you'라는 책이다. (말레이시아는 책값마저 정말 착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떠한 도서라도 기대하기 힘든 가격, 6000원에 구매했다.) 이 책과 관련하여 최근에 무의식 속에서 마주한 두려움은 무엇인지, 명확히 생각해 보고 언어로 표현하는 연습을 오늘 산책 길에 해 보았다.                


 세 번째, 말레이시아 주변 풍경을 마음 놓고 바라보고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렌트를 해서 먼 거리도 비교적 빠르게 갈 수 있지만, 운전을 하는 동안에는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리기 힘들다. 오직 앞에 있는 차, 옆에 있는 차, 도로 환경만을 보아야 하며 이 집중도는 외국이라 더 높고 심하다. 운전을 할 때와는 다른 여유로움과 한가함으로 주변 환경을 바라보고, 감탄하고, 깨닫고, 왜 그럴까? 궁금증을 가져보고 사진도 찍는다.      

산책하다 발견한 신기한 곳. 산책로가 아래로 뻥 뚫려 있다. 밤에 산책하지 말라는 소리구나.
잡초와 낙엽들로 뒤덮인 산책로. 이곳을 당당히 걸어갔다.
갑자기 인도가 끊긴다. 이것은 무슨 상황??
횡단보도가 없는 말레이시아의 교차로.
지나가다 기도 드려야 할 것 같은 곳. 산책로를 지키는 신인가?
산책의 종착지는 스타벅스. 시원한 아아 마시고 다시 호텔방으로 돌아간다.


 설 명절이 지나고 다음 주면 나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도전의 일환으로 아이들과 같이 나도 어학원을 등록했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함께 어학원에 가서 영어를 학습하고, 새로운 목표를 가져보고자 한다. 나게에 온전히 남은 시간은 단 2일. 내일과 내일모레. 남은 2일도 나는 열심히 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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