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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타 Dec 05. 2023

의미의 의미

삶은 살아가는 것인가 살아지는 것인가. 최근 한 달 정도 고민했는데 쉽게 결론이 안 나는, 어쩌면 결론이 없을 것 같기도 한 질문. 얼마 전 김영하 작가님의 <작별인사>를 읽었다. 책을 펼친 그 자리에서 끝까지 읽은 게 오랜만일 정도로 술술 넘어가는 책이었지만, 다 읽고 나서 한참 허공을 보고 있을 정도로 생각할 거리가 많은 책이었다. 그중 달마와의 선문답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그러다가 저 질문이 나왔다.


우리는 왜 태어나야 하며, 왜 살아가야 하는가. 근본적인 삶의 이유는 존재하는가. 우리는 어떤 의미나 진리, 사명을 가지고 태어나 살아가는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생물학적 유전자에 각인된 생존본능으로 살아지는 것인가. 그 살아짐을 거부하고 사라지는 것에 과연 틀림은 있는가. 생명은 왜 존중받아야 하는가. 물론 다른 존재가 살고자 할 때 그 의지는 존중해 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생명 결정권에 대해서는 어떨까. 가령 삶이 힘들어 자살하려는 사람이 있을 때, 언젠간 좋은 때가 올 거라는 책임 없는 공수표나 생명은 아름답고 소중하다는 근거 없는 말 외에 어떤 이유로 그를 설득할 수 있을까. 친한 사람이라면 나는 너와 이후로도 계속 많은 추억을 쌓고 싶다. 지금의 너의 고통에 내가 도움이 되고 싶다. 등의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자살하려는 걸 눈앞에서 본다면 과연 그를 막을 논리가, 혹은 막을 권리가 내게 있을까.


생물학에서 apoptosis, 한글로 번역하면 세포자살이라는 개념을 배웠었다. 자살이라는 단어로 번역되어 부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apoptosis는 생명체에게 아주 중요한 시스템이다. apoptosis가 없었다면 우리는 손가락 발가락 없이 덩어리 손발로 살아가야 했을 것이고, 감염되거나 변형된 세포들과 계속 함께 살아가야 한다. 우리 몸 안의 작은 세포들도 필요에 따라 자살을 선택하곤 하는데, 그 주체인 우리는 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꼭 생명 존중에 관한 논점이 아니어도, 이 세상에 진리는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인간이 멋대로 정한 선악, 옳고 그름이 아닌 우주의 모든 존재가 따라야 하는 절대적인 진리. 요즘 신기하게도 인문학적 고민이 깊어지면 답은 과학에서 나온다. 이번 답은 열역학이었다. 특히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한다는 열역학 제2법칙. 아인슈타인은 열역학이야말로 온 우주를 설명할 수 있는, 마지막까지도 뒤바뀌지 않을 이론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진리이자 근거가 된다.


가령 처음 질문인 생명체는 왜 살아야 할까. 엔트로피는 증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궤변 같지만 생각보다 말이 된다. 이 세상의 모든 화학반응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즉, 엔트로피를 더 빠르게 증가시키려면 더 많은 화학반응을 일으키면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생명체는 아주 훌륭한 화학반응 공장이다. 우리가 숨 쉬고, 먹고, 자고, 움직이는 모든 활동에서 화학반응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체온, 염도, ph 등을 유지하려는 항상성이 있는 이유도 이를 맞추기 위한 화학반응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생명을 유지하고자 하는 본능도 더 오래 살아야 더 많은 화학반응을 하기 때문이다. 자손을 번식하려는 본능도 또 하나의 화학반응 공장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우등생이라 할 수 있다. 스스로의 생명활동뿐만 아니라 다양한 에너지원을 끌어와 다양한 기계들을 돌리면서 세상에 수많은 화학반응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이 번성할 수 있는 것도, 다른 어떤 종족보다도 빠르게 엔트로피를 증가시키기 때문에 세상이 어여삐 여겨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결국 엔트로피는 증가한다는 것 외의 진리는, 적어도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생명체가 살아야 한다는 것도, 선과 악의 개념도, 우리가 멋대로 만들어냈을 뿐이다. 의미의 의미는 없다. 부여한 의미만 있을 뿐이다. 그 어디에도 살아가야 할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살아가야 할 의미는 만들어내는 것이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의미를 만들 줄 알아야 한다. 타인의 의미에 의해 살아진다면, 사라지지 않아야 할 이유도 없다.


얼마 전에 있던 독서모임에서 각자 생각하는 혁신 템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었다. 나는 <잊었던 꿈을 찾았다>에서 소개했던 주차 번호판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어떤 분이 내게 작은 것 하나에도 다 선택의 이유가 있는 사람 같다고 해주셨는데, 너무 기분이 좋은 칭찬이었다. 실제로 남들은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에 괜히 의미를 부여하고 혼자 만족하곤 한다. 최근에 이와 관련된 소품으로는 구둣주걱이 있다. 신발 신는 게 불편해서 구둣주걱을 사려 했는데, 그렇다고 대충 아무거나 막 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눈에 들어온 게 신발장 위에 둔 디퓨저였다. 검은 디퓨저 병에 좀 더 gorgeous한 느낌을 주기 위해 깃털 모양 리드 스틱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와 어울리는 구둣주걱을 쓰면 현관 인테리어로 딱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새 모양 구둣주걱을 찾아내고 말았다.

세상 우주 어디에도 구둣주걱이 새 모양이어야 하는 진리는 없다. 하지만 그는 새 모양으로 만들어졌고, 나는 그 모양에 의미를 부여했고, 결국 선택받았다. 살아가는 의미도 이런 게 아닐까. 결국 진리는 엔트로피 외에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의 삶이 있고, 이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의미의 존재 의미는 없다. 하지만 의미가 가진 의미는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의미를 만들어내고 이를 쫓으며 살아가는 동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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