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국제도서전에 다녀왔다. 사실 갈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었다. 요즘 바쁜 일이 많기도 하고 작년에 도서전에서 샀던 책들도 아직 다 못 읽었기 때문이다. 가기로 일찍 결정했다면 미리 휴가를 쓰고 평일에 다녀왔을 텐데 이제는 가려면 사람이 많은 주말에 가야 한다는 것도 고민이 늘어지는 데 한몫했다. 그러다 며칠 전 이번 서울국제도서전이 처음으로 정부 예산 지원 없이 열린다는 이야기를 봤다. 그 순간 바로 예약을 했다.
어제 잠에 들면서도 오늘 출발하면서도 다짐을 했다. 이번에는 정말로 엄선해서 딱 몇 권만 사야지. 말하면서도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고 역시나 어림도 없었다. 책을 집어 들면서 스스로에게 '에휴 차라리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지'라는 생각이 흘러나왔다. 밤에 누워서 유튜브를 보면서 '자야 되는데'라고 하던 모습이 겹쳐지면서 헛웃음이 났다. 심지어 올해는 작년보다도 마음을 울리는 책 소개들이 많았다. 결국 가져갔던 에코백을 가득 채워서 종이 가방을 받았는데 그 가방도 가득 채워서 양손 가득 돌아왔다. 양손이 무거워지자 아직 사두고 읽지 못한 책들이 생각나면서 마음도 무거워졌다. 그러다 알쓸신잡에서 김영하 작가님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책은요, 읽을 책을 사는 게 아니고 산 책 중에서 읽는 거예요
단 한 문장에 무거웠던 마음이 순식간에 씻겨나갔다. 동시에, 도서전에 다녀와서 더더욱 그랬을 수도 있지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문장의 힘이고 문학의 힘일까.
얼마 전 유퀴즈에 허준이 교수님이 출연하셨다. 교수님은 '난제를 왜 풀어야 하나요?'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셨다.
난제들은 오랫동안 여러 사람이 시도했는데 아직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난제라고 불리는 거잖아요? 겉보기에는 접근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상당히 자연스럽고 단순한 명제도 우리가 그게 왜 그런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에 근본적인 결함, 결함이라기 보다는 더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가 난제들에 집중을 하는 거거든요.
(중략)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명제들이 있고,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명제들이 있고,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라던가 어떤 것들은 요기(우리가 이해하는 명제)에서 요기(난제)까지의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은 것 같은데, 우리가 이렇게(간단하게) 갈 수 없다는 것은 우리 눈에는 지금 잘 보이지 않지만 논리의 관점에서 이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어떤 산맥 같은 것들이 있다는 거니깐, 우리의 두뇌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난제를 해결해 나감으로써 조금씩 조금씩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거죠.
허준이, <유 퀴즈 온 더 블럭> 249화
살다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 감정의 방향은 상대방을 향해야 할까 나를 향해야 할까. 오늘 도서전에서 길게 늘어선 입장 줄을 보면서 숨이 턱 막히면서도 뿌듯함이 느껴졌다. 나는 아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활발한 어린이 코너들은 나도 모르게 웃음을 자아냈다. 도서전에 나온 뒤 가배도 신논현점으로 가서 내일 독서모임 책을 다시 읽었다. 이 카페는 인테리어는 평화롭지만 번화가에 있는 만큼 사람들 떠드는 소리가 정말 시끄러운데 신기하게도 글이 잘 읽히고 잘 써져서 쓰던 글이 막히면 방문하곤 한다. 나는 이렇게 나 자신도 아직 이해하기 어렵다. 하물며 타인은 오죽할까. 가끔씩 어떤 사람이나 상황은 난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나와 타인 간의 산맥을 넘도록 도와주는 게 문학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을 통해 내가 아닌 사람들 만나고, 그들의 생각을 듣고, 그들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명제의 공간이 넓어진다.
지난 주말에 지인이 만든 네트워킹 모임인 <책으로 만난 사람들, 포바포>에 다녀왔다. 뒤풀이에서 지인은, 좋은 사람들이 모이고 교류하는 것에 관심이 많은데 자기 경험상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좋은 사람들이었어서 이렇게 책을 주제로 하는 모임을 만들었다고 했다. 편견은 안 좋다고 되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체감되는 통계들이 있을 때가 있다. 나는 자취방을 구할 때 고려 대상에 넣었을 정도로 코엑스의 다양한 행사에 가는 걸 좋아한다. 좋은 행사들은 언제나 사람들이 많고 서로 부딪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나게 된다. 부딪혀도 그냥 말없이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고 죄송합니다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다. 내 아주 적은 경험상 서울국제도서전에서는 후자의 비율이 다른 행사들보다 유의미하게 높았다. 내민해 작가님의 글 <사라지지 마, 문학>에서 '나로부터 타인을 지키기 위한 공부'라는 표현이 있었다. 어쩌면 이 성급하게 일반화된 통계 수치는 이러한 공부의 편린을 엿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 나는 산새의 노래가 제 어미의 그것인 것을
귀뚜라미의 울음이 늘 같은 박자인 것을
아카시아가 매년 매해 어김없이 흰 꽃만 피우는 일을
염치없고 식상타고 비난했으나 이제와 변명컨대
애초 하늘의 지시가 그러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바
모든 사랑의 시가 진부한 것에 이제 나는 한사코
아무런 불만이 없어라
허준이
유퀴즈에서 소개된 허준이 교수님의 자작 시. 마음이 잔잔한 들판에 드러누워지는 것 같은 좋은 시라 느끼면서도 항상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고 해결해야 하는 수학자에게 어울리는 시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답은 질문에 들어있었다. 수학자들은 발명하는 직업이 아니라 발견하는 직업이다. 새로운 것들이 아니라 이미 세상에 놓여있는 진리를 탐구하고 발견하는 것이다. 어쩌면 문학도 창작의 영역이면서 창작의 영역이 아닐 수 있다. 새로 만들어진 인물을 통해 우리 옆의 사람을 발견하고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요즘 사회를 보면 4차 산업혁명과 혁신의 시대지만 아직 우리에겐 새로운 발명보다 이미 놓여있는 주변의 것들을 발견하는 게 더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나는 행운아일 수도 있다. 타고나길 타인의 감정을 느끼는 게 어려워서, 사회에 살아가기 위해 인지적으로라도 타인을 이해하는 공부의 필요성을 남들보다 일찍 느꼈다. 그렇게 문학을 통해 타인의 감정을 배우고 이해하는 데 익숙해졌다. '요즘 같은 시대에 아직도 문학을 읽어요?'같은 말들이 가끔씩 보인다. 나라면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저는 아직 당신을 이해할 수 없어서, 남들을 잘 몰라서, 그래서 문학을 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