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시대가 다 그러하듯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청춘에 6.25전쟁을 겪으셨다. 경북 영천의 부유한 한의사 댁에서 남매 중 외딸로 태어나 손에 물 한번 묻히지 않고 꿈 많은 처녀시절을 보내셨다. 그러나 전쟁 통에 큰아들과 큰딸을 잃어버리면서 어머니 가슴에는 삶의 멍울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내가 20대 후반이 될 때까지 나는 큰 형과 누나의 존재를 몰랐었다. 내가 피난동이이니 근 20여 년을 어머니 가슴에 묻어 두었다가 어느 날 생각난 듯 내게 말씀하셨다.
“네 큰 형 대영이, 네 누나 군자, 살아 있었으면 모두 시집 장가 갈 나인데―”
어머니는 한참 동안 내가 얼굴도 모르는 형과 누나의 사진이며 옷가지 들을 보관하신 듯하였다. 아주 오래된 낡은 가죽트렁크에 그것들을 보관하셨는데 가끔씩 꺼내보시며 슬픔에 잠기곤 하셨다. 내가 열 살 무렵인가 트렁크를 몰래 뒤져보다가 사진을 보고 누구냐고 물으니 그냥 옛날에 알던 아이들이라고 하셨다. 그 후로는 사진과 옷가지들을 발견할 수 없었다. 언제 그것들을 치우셨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살아있는 자식들에게 더 마음을 주기로 작정하셨던 모양이었다.
내가 대구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 어머니는 ‘남문시장’에서 포목전을 여셨다. 아버지가 농협에 다니셨으나 아들 셋, 딸 둘, 다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모두 공부시키려면 아버지의 봉급으로는 모자랄 터이니 부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그러나 집에서 살림만 하던 어머니의 장사수완은 신통치 않았던 모양이다. 몇 개월 하다가 그만 두셨는데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어머니는 다른 장사도 몇 번 했으나 손해만 보았다. 그래도 어머니는 자식들 앞에서 크게 낙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지난 일을 두고두고 후회하는 대신 앞일을 더 생각하라는 교훈을 손수 자식들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어느 날 TV 방송국 노래자랑에 출연하셨다. 아나운서가 ‘돌아가신 영감님이 보고 싶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보고 싶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처녀시절에 외할아버지의 한방병원에 근무하던 잘생긴 젊은 한의사를 좋아하셨던 것 같다. 마음속으로 사모하고 있었는데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중매로 아버지와 혼인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당시 금융조합에 다니셨기 때문에 직장은 탄탄했지만 집안이 가난해서 거의 큰아버지 부부가 막내인 아버지를 키우다시피 했다. 그런 연고로 큰아버지 대신 한참 동안 막내이면서 할머니를 모시게 되어 시집살이까지 하게 되니 아버지에게 고분고분하셨을 리가 없고 종래는 아버지와 마찰도 잦았다.
어머니의 성격은 불같이 화르르 일어났다가 이내 사그라지는 데 반해 아버지의 성격은 물처럼 조용하지만 끓어오르면 좀처럼 식지 않아 한번 부부싸움이 있으면 쉽게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아버지와 그렇게 애틋하고 살뜰한 감정이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외롭고 쓸쓸했던 어머니는 틈 있을 때마다 노래를 불렀고 어느새 가수 뺨치는 실력을 쌓게 되었다.
그러나 그날은 노래 부르면서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에 감정이 격하신지 눈물이 글썽한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평소에 노래방에 가서 부르면 100점을 받던 실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다. 결국은 등외로 밀려 상품은 못 받으셨지만 자식들이 그것을 녹화해 두었기 때문에 보고 싶을 때 마다 틀고 어머니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어머니에게는 큰 상이 되었으려니 싶다.
내가 밴쿠버로 오기 2개월 전에 어머니가 사시던 대림동 집이 재개발에 들어갔다. 그때 나는 출국일자만 남겨두고 있었다. 천리타향 머나먼 길 오르기 전에 한번이라도 더 효도하고 싶어 나는 어머니와 함께 대림동 인근에 재개발이 완료될 때까지 기거하실 전세방을 구하러 다녔다. 나는 외국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식당에서 갈비탕을 먹었는데 당신은 이가 안 좋아서 못 먹는다고 자꾸만 고기 덩어리를 내 그릇에 담으셨다.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져 어머니가 잠깐 화장실 가는 사이에 펑펑 울었다. 그리고 이내 돌아오시기 전에 눈물을 닦았다. 그러나 사실을 이야기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회사 지사원으로 나가는데 2년 있다가 오고 1년 후에 출장도 나올 수 있다고 했다.
공항에서 인사하기 싫어서 형 집에 온 가족이 모여서 마지막 인사를 하기로 했다. 애써 즐거운 분위기 만들며 어머니의 노래를 다시 한 번 듣기로 했다. 둘째 아들이 힘든 타국 살이 길에 오른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어머니는 애써 이별의 슬픔을 기교 섞인 노래로 들려 주셨다.
꽃이 피며~언 같이 웃고오~ 꽃이 지이 같이 울던
알뜨을한 그 매애앵~세에에 보옴나아알은 가안다
잔정 많은 서울 토박이 아내가 내게 시집와서 어머니를 잘 보살펴 드렸다. 게다가 아내의 서울말씨는 나긋나긋하고 정감이 있어 두 딸의 투박한 경상도 말씨만 들어오던 어머니로서는 아내가 애교 많은 막내딸처럼 여겨졌던 모양이었다. 덕택에 어머니는 어느 자식보다도 우리 내외를 더 애틋하게 생각했다. 여러 자식들이 모인 환송회자리에서는 내색을 않으시려고 애 썼지만 밴쿠버에서 전화할 때 두 달 동안은 제대로 통화할 수 없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울먹이시는데 예전의 불같이 화르륵 피어 올랐다가 금세 사그라지는 어머니의 성격은 어디에도 없었다. 매주 한 두 번씩 몇 달을 통화하고 나서야 어머니는 자식의 몸은 멀어졌지만 마음만은 항상 가까이 있다고 믿으셨다. 그리고 타국에서 생활하는 우리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일흔 중반까지도 어머니는 기운이 펄펄하셔서 구청에서 운영하는 노인학교에 다니며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곤 하셨다. 그때 어머니는 SBS TV방송국 아침 프로그램인 ‘젊은 인생’에 출연하셔서 노래를 부르셨던 것이다. 그러나 8순이 지나면서 어머니의 기력은 급격히 쇠하셨다. 입맛이 없어 식사를 제대로 못한다는 말에 밴쿠버에서 한국인터넷 홈쇼핑 사이트로 들어가서 정육세트랑 생선세트 등을 구매해서 배달시켜드렸다.
그러나 드시지 않고 남겨 두었다가 다른 아들, 딸 가족이 손자들 데리고 오면 요리해 주셨다. 어머니만 드시라고 보낸 건데 왜 그렇게 했느냐고 화를 내면 자식하고 손자들하고 나누어 먹어야 훨씬 맛이 있다고 하셨다. 하다못해 그럼 돈을 보내 드릴 테니 보약을 좀 지어 드시라고 했지만 ‘한의사가 8순 지난 노인은 보약 효험이 없다고 하더라.’고 굳이 사양하셨다. 고객에게 연세가 많으니 돈 많이 들여 보약 드시지 말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그렇게 정직한 한의사가 있더란 말인가? 어머니의 말을 곧이 믿을 수 없었다. 자식이 힘들고 어려운 타국생활에서 버는 피 같은 돈을 어머니는 차마 당신의 기력회복을 위해 쓰실 수 없었던 것이다.
무더운 여름 에어컨이 나오는 시원한 교외에 있는 여동생 집에 가신다고 하신 것이 나와 어머니 사이의 마지막 통화였다. 매주 마다 통화 했지만 돌아가시고 나니 왜 매일 이라도 통화하지 못했는지 아쉽다. 그러나 매일의 힘든 타국생활을 자주 통화하다가 혹시 눈치 빠른 어머니에게 들킬까 해서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부터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했다. 형으로부터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말을 들은 터여서 인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생기면 전화하겠다고 형이 말했기 때문에 서울 행 비행기 표를 섣불리 사지도 못하고 그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도 두어 번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이내 괜찮아져서 퇴원했기 때문에 혹 이번에도 훌훌 털고 일어나실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밤의 전화 한 통화는 그런 기대를 산산이 무너트렸다. 형의 전화였다. 어머니가 숨을 거두셨다는 것이다. 순간 오십 수년을 함께 했던 어머니와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애써 침착해지려고 했지만 사정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며칠 혼수상태로 계시다가 갑자기 정신을 차리셨다고 한다. 주변의 형과 동생들을 보시고는 한참을 우셨다고 한다. 임박한 당신의 마지막이 서러워서가 아니라 막내만 빼고 모두 IMF 이후 직장을 잃은 아들, 사위자식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어주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슬퍼서였다. 그러나 우연의 일치일지는 모르지만 해외지사설립을 위한 영주권 조건이 해지되었다는 통보를 받은 그 시각이 한국에서 어머니가 숨을 거두셨다는 시간과 엇비슷하여 지금도 ‘아. 그때 어머니가 둘째 아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가셨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어머니는 우리 곁을 떠나셨다. 우리도 그렇게 가겠지. 어머니 가시고 나는 뽕짝음악(한국고유가요)이라고 잘 부르지도 않았던 어머니가 즐겨 부르시던 노래를 무심코 흥얼거린다. 어머니가 외롭고 힘들 때 그렸던 것처럼 나도 이국생활에서 외롭고 힘들 때면 어머니의 애창곡을 따라 부르게 된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어머니와 함께 한 시절의 추억들. 그리고 호강시켜 드리겠다고, 편히 모시겠다고, 다짐하던 어릴 적 맹세는 어디로 가버렸는지----봄이 다 지나고 여름이 기승인 7월 막바지에 나는 먼 이역하늘 아래서 어머니가 남긴 노래를 소리 없이 불러 본다.
이 나이에도 어머니 생각에 눈시울이 젖는 것을 보면 나는 영원히 어머니의 ‘아이’인가보다. 환갑을 훌쩍 넘긴 내 인생의 계절은 초가을. 나의 봄날은 저만치 떠나 가버렸다. 그러나 시간적 개념이 아닌 ‘꽃 피고 새 우는’ 관념적 의미의 봄날은 언제든지 다시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설사 우리들의 봄날은 가버렸는지도 모르겠으나 이제는 우리 후손들의 봄날을 기대하며 우리는 부모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어머니가 자식들의 봄날을 기대하며 평생을 살아오셨듯이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