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리 공원, 소로(小路)의 낭만
‘군자(君子)는 대로(大路)행.’ 그러나 나는 소로를 즐겨 간다. 군자는 학식과 덕망이 높고 행실이 어진 사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숨길 것 없이 노출되는 큰 길을 즐겨간다. 나는 골목길을 즐긴다. 스스로 군자라고 칭할 자신도 없지만 그렇다고 감출 것이 많아서가 아니다. 세상은 모두가 군자연하고 큰길로만 가려고 하니 다만 번잡하고 시끄러운 큰 길을 피해 좁고 불편하여 아무도 즐겨 가지 않는 작은 길을 선택할 따름이다.
오늘날 도심의 대로는 사람과 차로 넘친다. 밴쿠버도 다를 바 없다. 동서를 관통하는 왕의 길(Kingsway), 넓은 길(Broadway)도 모자라 아예 자동차만 씽씽 거침없이 내닫는 아주아주 큰길(highway)도 있지만 시간이 없고 부득이한 경우에만 든다.
여유가 있으면 걷거나 운전할 때 1차선 또는 2차선 도로만 있는 동네 길을 택한다. 번지가 있어도 미로처럼 찾기 어려운 한국의 도심 골목길과는 달리 구획정리가 잘 되어 골목이라 부를 수는 없지만 차량통행이 적어 걷기도 운전하기도 때로는 편하다. 그런 길을 잘 알고 있으면 러시아워의 교통체증이 점점 심각해지는 큰 길을 피해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특권(?)도 누린다.
무엇보다도 큰 특권은 새로움의 발견이다. 북미에서는 볼 수 없을 줄 알았던 개나리, 진달래, 벚꽃뿐 아니라 무궁화까지 동네 골목길에서 찾았다. 뿐만 아니다. 집주인의 취향을 알 수 있는 잘 가꾼 정원, 창문 틈으로 살짝 들여다 보이는 실내장식-어떤 집들은 지나가는 보행자들에게 과시하듯이 세계를 여행하면서 수집한 기이한 조각품들을 전시하듯 배치해 두었다. 그로 인해 삶의 편린을 엿볼 수 있어 친근감마저 든다.
스탠리공원도 다를 바 없다. 처음에는 자동차를 타고 공원 한 바퀴를 돌고 또 돌았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줄 알았다. 관광안내서에 있는 것은 다 보았으니 더 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허둥대던 타향에서의 첫발자국이 안정을 찾자 이제는 관광이 아니라 심신의 휴식과 단련을 위해 오는 공원으로 스탠리는 내게 다가왔다.
어느 볕 좋은 여름날. 아내와 내가 처음으로 해변산책로(sea wall)를 도보로 완주하려고 결심했을 때 비로서 스탠리는 감추었던 속살을 드려내 보였다. 차가 다니지 않는 작은 길에서였다.
‘씨월(seawall)’이란 원래 방파제, 제방 등을 의미한다. 파도로 해변이 침식되는 것을 막기 위해 돌로 방파제를 쌓았고 그 위로 길을 만든 것이지만 필자는 해변산책로라고 이름 붙였다. 그 편이 더 낭만이 있어 보여서이다. 대학친구들로부터 ‘낭만 원배’라는 별칭을 들은바 있고 평생을 함께 한 아내도 인정하는 낭만덩어리인 필자가 아름다운 해변 길을 산책하면서 “방파제 갔다 왔다”고 남에게 이야기할 수 있으랴. 방파제 길손 보다 ‘해변의 길손’이 내게는 더 어울릴 것 같다. 그래야 케니지(Kenny G)의 트럼펫 연주도 더 오래 여운을 남길 것이 아닌가.
도보자 에게는 산책로이지만 싸이클을 즐기는 사람도 있고, 롤러브레이드를 즐기는 사람도 있다. 죠깅을 즐기는 사람도 있고 더러 낚싯대를 드리우는 사람도 있다. 자동차의 통행이 차단되는 왕복 8.8km의 이 자유공간은 다람쥐 챗바퀴 도는듯한 일상의 탈출구를 사람들에게 제공해 준다. 공원 숲에서 나오는 피톤치트와 태평양 끝자락의 싱그러운 바다내음은 덤이다. 걷거나 뛰거나 타거나 하면서 흘린 땀방울은 육체적 단련과 정신적 만족을 충족시켜 준다.
씨월의 첫 발상은 공원관리감독관인 롤링즈(W.S. Rawlings)로 부터 나왔다. 밀려오는 파도에 공원 삼림까지 망가질 우려가 있으니 돌로 방파제를 쌓고 그 위에 길을 내면 관광명소가 될 수 있으니 꿩 먹고 알 먹는 일이 아니겠느냐는 그의 한마디가 당시 공원소유주인 연방정부를 움직인 것이다.
연방정부의 재정지원으로 석공(石工)의 대가인 제임스 커닝햄의 지휘아래 1914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1971년에 완공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편의에 의해 길은 또 다른 길로 연결되듯, 공원입구인 콜하버에서 시작되었던 씨월은 스탠리공원을 한바퀴 돌고 썬샛해변, 폴스크리크, 버라드해협다리를 지나 키칠라노 해변공원에 이르기까지 장장 22km로 연장되었다.
씨월의 조성은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태풍과 홍수로 피해를 입기도 했고 자금부족으로 공사가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 그러나 튼튼한 방파제와 아름다운 해변 길을 만들겠다는 제임스의 집념은 대단했다. 병석에서 죽기 마지막 직전까지 환자복을 입고 건축현장에 나와 진행사항을 감독 및 독려했다. 완공을 보지 못하고 1963년에 사망한 그의 업적을 기려 화장한 재가 뿌려진 씨워시 바위(Siwash rock; 인디안 또는 원주민 바위라는 뜻) 주변에 기념패가 설치되었다.
사진은 씨워시 바위 전경
씨워시 바위는 스콰미시 원주민의 숨은 전설이 깃들어 있다.
스콰미시 원주민의 구전설화 중 하나는 변형자, 즉 트랜스포머(transformer)라고 불리는 초능력을 가진 신들에 대한 이야기다. 세상의 창조자에 의해 지구로 보내진 이 트랜스포머들은 세 명의 형제였는데 초자연적인 힘을 지니며 사람들을 동물이나 바윗돌, 또는 다른 자연물로 바꾸는 능력을 지녔다.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가 이 바위에 대한 것이다. 옛날 한 스콰미시 용사가 결혼을 앞두고 아내 될 사람과 장차 태어날 아이를 위해 열심히 자기를 단련하였다. 당시는 남자들의 수렵과 사냥으로 먹고 살았으니 잘 먹고 잘살려면 가장의 몸이 튼튼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체력단련을 해야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용사는 현재 엠블사이드공원 주변의 해변에서 스탠리공원까지 수 차례나 오가며 아침수영을 하였다.
그런데 카누에 타고 있던 트랜스포머들이 그의 길을 막았다. 카누를 비켜가라. 이곳을 지나갈 수 없다고 억지를 부렸다. 용사는 그럴 수 없다고 과감하게 저항하였다. 아내와 자식을 위하여 신들에게 도전하는 그의 부정(父情)과 용기를 후세에도 전하기 위해 신들은 그를 바위로 만들었다. 동시에 그의 아내도 부근의 바위로 만들었다.
화산분출로 인한 용암이 빚어낸 바위에다 사람들은 의미를 부여했다. 왜일까? 사람들이 순수한 자연의 일부였을 때의 신은 산이요, 강이요, 바다요, 바위였다. 사람들이 신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발견한 것이다. 자연의 변화무쌍함과 사람들의 운명이 함께 하던 시절에는 자연은 경외와 숭배의 대상이 되었음 직 하다. 생각해 보라. 어두운 밤하늘에 번쩍이는 번개, 세상을 삼킬듯한 폭우, 만물을 태워버릴 듯이 작열하는 태양, 기괴한 모습으로 굳어버린 용암바위---원시 조상들은 이런 것들에 신이 깃든다고 여겼을 것이다.
당연히 스콰미시 원주민들도 신과 신의 사자들인 트랜스포머들이 존재한다고 믿었고, 그들은 끊임없이 인간을 가르치고 훈계하며 때로는 올바른 길을 가도록 징벌도 아끼지 않는다고 믿었을 것이다. 삶에서 고난과 고통이 따르는 것은 큰 인간이 되도록 신이 시험하는 것이다. 스콰미시 용사는 아마도 물살이 거친 해협을 수영하다 익사했을 지도 모른다. 그의 무리한 아침수영은 새로운 가정의 미래를 위해서였고, 사람들은 그의 희생정신을 기려 용암바위에 빗대 그의 이야기를 후세에 전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전설로 남게 되었다.
아내와 내가 처음 씨워시 바위까지 도보로 왔을 때는 무더운 여름철이었다. 애초부터 스탠리를 한 바퀴 일주하려고 온 것이 아니고 다운타운에 볼일이 생겨 왔다가 들린 것이었다. 둘 다 정장에 구두를 신었는데 요트 정박장이 있는 공원입구에서 그곳까지 약 40분이 걸렸다.
출발할 때는 좋았는데 발바닥에 물집이 잡혀갈 쯤에는 땀에 흠뻑 젖었고 다리도 아파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해변산책길 한 바퀴를 가볍게 생각한 것이다. 생각 없이, 계획 없이 무작정 앞으로 나가는 것은 인생길에서나 씨월에서나 무모한 짓이다. 보람 있는 삶을 위해서는 치밀한 계획을 준비해야 하듯, 기분 좋은 산책을 위해서는 적어도 사전 시간계획도 세우고 장소에 걸맞은 복장과 신발을 준비해야 하였다. 다음에 올 때는 가벼운 복장에 운동화를 착용하고 오라고 어디엔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을 트랜스포머가 경고하는 듯 했다. 반듯한 신사숙녀에서 후줄근한 녹초로 우리를 변형시켰으니.
그래서 후일을 기약하고 오던 길을 되돌아 간다. 올 때는 좀 더 멀리까지 가고 싶은 욕심으로 그저 걷기만 했는데 더 갈 길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편안하다. 마치 명예와 지위와 권세의 정상을 향해 돌진하다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인생의 마지막 길을 평안하게 걸어가는 은퇴 후의 삶과 같다. 또한 올 때 놓친 것을 뒤돌아서며 자세히 볼 수 있는 것도 작은 기쁨인 듯 하다.
잠수복을 입은 여인(The girl in a wetsuit)도 그 중의 하나다. 잠깐 스치며 볼 때는 ‘인어공주’상 인줄 알았다. 눈밝은 아내가 아니라고 할 때 까지는. 자세히 보니 자세는 인어공주인데 머리에 물안경을 썼다.
‘잠수복을 입은 여인’(스탠리파크) ‘인어공주’(덴마크 코펜하겐)
실물크기의 잠수복을 입은 여인의 청동상은 오리발을 신고 앞이마에 잠수용 마스크를 쓰고 조수간만 사이의 크고 둥근 바위 위에 앉아 있다. 1968년 9월 밴쿠버 한 변호사인 다글라스 브라운(Douglas Brown)이 조각가 엘렉 임레디(Elek Imredy)에게 덴마크 코펜하겐에 있는 인어상에 영감을 받아 그 비슷한 조각을 스탠리 공원 해수면에 만들고 싶다고 했다.
임레디는 실물크기의 스쿠버다이버 조각상을 제안했다. 브라운의 착상은 그렇지 않아도 밴쿠버 사람들과 관광객들을 위한 독특한 기념물을 항만에 제작할 경우 언제라도 지원을 할 용의가 있던 밴쿠버 항구개선 협회(Vancouver Harbour Improvement Society)를 움직였다.
동 협회의 자금지원에 의해 임레디는 제작에 착수했고 밴쿠버 공원위원회는 스탠리 공원에 인접한 해수면 바위 위에 조각상을 놓도록 허가했다. 큰 둥굴바위는 높은 밀물썰물에 종종 덮이니 주변에 콘크리트 시설물을 구축하고 바위는 원래 있던 위치에서 100피트 위로 들어 올렸다. 임레디는 바위 꼭대기에 몰딩작업을 하고 그 위에 스튜디오에서 만든 조각상을 안치하였다.
“난 코펜하겐 항에 있는 인어공주와 똑 같은 것을 굳이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건 코펜하겐의 심볼이죠. 난 실물크기의 스쿠버다이버가 거기 앉아 있는 것을 제안했어요. 당시 밴쿠버에서는 스쿠버다이빙이 대 유행이었고 내가 알기로는 스쿠버다이빙상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죠. 전혀 새로운 발상이었지요. 왠지 모르지만 반대가 엄청 많았고 논쟁도 그치지 않았어요. 나는 다른 나라의 모조품이 아닌 밴쿠버 고유의 해수면 조각상을 만들고 싶었을 뿐이에요.”
나중에 사람들이 왜 처음에 제안된 인어공주상을 거절하였느냐고 물었을 때 한 대답이다. 임레디는 예술가이다. 예술가는 고유의 사상과 신념으로 독창적인 예술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코펜하겐 것과 똑 같은 인어공주상을 밴쿠버에도 만들어달라고 한 제안을 받아들이기에는 임레디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덕택에 세상 어디에도 없는 ‘잠수복을 입은 여인’이 탄생한 것이다.
나는 문학을 생각한다. 예컨대 톨스토이나 셰익스피어 작품에서 문학적 영감은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내 작품을 쓸 때는 나만의 색깔을 표현해야 한다. 최근 신춘문예작품에서 발표되는 작품경향은, 특히 시(詩)의 경우, 문자의 수수께끼 놀음 같아 이해가 어렵다. 그는 그대로 진부함을 떨어낸 창작이라고 심사위원들이 당선작을 선정하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그 시류에 따라갈 필요가 없다. 평생을 살면서 느낀 감정을 시로 표현하지만 둔재라서 인지 독창적인 언어표현을 구사하지 못한다. ‘내비도(내버려 둬). 난 이대로 끝까지 갈 것이여.’ 내 문학의 신조이다. 당장은 그것으로 나를 위로한다. 독자들이 공감하면 좋고, 아니면 말고. 남의 것이 좋다고 베낄 생각은 없다. 임레디처럼.
임레디의 조각상에서 토템폴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만나는 것이 ‘9시 대포(Nine O’clock Gun)’이다. 이 대포는 태평양연안시간, 즉 밴쿠버 시간으로 오후 9시면 어김없이 발사되는 대포다. 영국 왕 죠지 3세의 전성기에 포병부대장이며 멀그레이브(Mulgrave)가문의 제1백작인 헨리 핍스(Henry Pipps)가 대포제작을 고안했다. 화약을 앞에서 장전하는 전장식(前裝式, Muzzle Loading)해군대포로서 1816년 영국 울위치(Woolwich)에서 제작되었다. 여러 대가 제작되었지만 78년 후인 1894년에 캐나다 해양수산부가 어부들이 일요일 오후 6시까지만 어업을 하라고 경고하기 위해 그중 하나를 영국에서 도입, 스탠리파크에 옮겨 놓았다.
9시 대포의 발사장면
철망으로 둘러 쌓인 몸체
나중에 일반인들에게는 시간표시를, 어부들에게는 어선의 정확한 정박시간을 알리기 위해 사용되었다. 대포가 장착되기 전까지는 브록톤포인트의 등대지기 윌리엄 죤스가 해수면위로 다이나마이트를 폭발시켜 시간을 알렸다고 한다. 예전에는 화약을 장전하여 사람이 발사하였으나 지금은 전자격발장치가 있어 자동으로 발사된다고 한다. 그러니 항상 검정 화약이 대포 안에 장전되어 있다.
이 대포가 무려 다섯 번이나 침묵을 지킨 적이 있다. 2차 대전 중이 첫 번째, 1969년 UBC기계공학과 학생에 의해 잠시 도난 당했다가 그 학생이 대포를 돌려 줄 테니 그 몸값을 BC어린이 병원에 기증하라고 헤프닝을 벌일 때가 두 번째, 그리고 2007년 노동쟁의로 공원업무가 마비되었을 때가 세 번째, 2008년 또 다른 UBC 기계공학생이 포신에다 온통 붉은 색 페인트를 칠했을 때가 네 번째, 2011년 5월 20일 아무런 해명도 없이 중단되었을 때가 다섯 번째였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처럼 1969년 도난사고 이후 대포주변은 돌과 철망으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발사장면을 구경하려면 밤 9시까지 기다려야 하는 데 우연히 지나다 목격하면 몰라도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흔히 썸머타임이라고 불리는 일광절약시간(Day light saving time)에는 해가 늦게 지니 가능하지만 겨울에는 춥고 어둡고 비까지 내려 을씨년스러우니 공원을 드는 사람들도 없다.
낮에는 평화롭게 보이는 공원도 밤이면 부랑자나 노숙자들이 어슬렁거리니 ‘이국(異國) 저녁도심공원의 낭만’을 찾으려는 관광객들은 조심할 일이다. 가끔 해외여행을 하는 경우 아무리 치안이 잘 되어 있는 도시라도 나는 밤 외출을 삼간다. 부득이한 경우는 사람이 많은 곳에, 자동차로 이동하지만 도보외출은 꺼린다. 사건사고는 인간의 부주의에서 비롯됨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주의는 욕심에서 촉발된다.
아직도 아픔이 가시지 않는 지난 4월, 그 잔인했던 달의 ‘세월호 참사’를 되짚어 본다. 남보다 제 목숨 먼저 살리려던 선장과 승무원들, 돈 벌기 위해 무리한 과적을 허용했던 선사와 감독관계자들, 이런 회사에 자금지원을 해 준 금융기관들, 사고의 빌미를 제공한 법안의 완화에 동의했던 국회의원들.
참사는 이 모든 자들의 대가가 수반되는 욕심에서 비롯되었다. 누구 하나 이런 욕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혹자는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인해 부유해진 한국인들은 법과 질서를 준수하고 원리원칙을 지키는 시민의식을 고양하는 것은 뒷전인체 돈 버는 일에만 집중하는 국민성이 만연한 탓이라고 개탄하지만 그런 말 하는 한국인도 그 부류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게 딱히 한국인만의 특질은 아니다. 인간은 국적이나 피부색깔이나 종교를 불문하고 원초적인 욕심을 지니고 있다. 수많은 이민족이 함께 살고 있는 이국 땅에서 10년 이상을 살펴본 결과의 느낌이다.
그러나 이민족들의 욕심은 순수한 꿈이다. 대부분 캐나다보다 삶의 질이 못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혹자는 부지런히 일해서 부양가족을 잘 먹여 살리고, 자녀교육을 잘 시키고, 영어를 빨리 익혀 내 나라에서처럼 이 나라에서 잘 적응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욕심이라면 욕심이다.
이를 위해선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공부한다. 나만의 혜택을 위해 공무원에게 뇌물을 먹이거나 청탁을 하거나 하지 않는다. 선물이 뇌물로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받는 측도 값비싼 물건은 거절한다. 이는 원칙과 합리성을 존중하는 서양사람들이 먼저 이 땅에 와서 정직하게 땀 흘리며 나라를 일구어 왔기 때문이다.
이민자들은 과거의 습성을 버리고 기꺼이 이 나라의 관습과 도덕을 따른다. 그래서 캐나다는 세계각국에서 온 사람들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는 모자이크 문화를 표방하지만 법과 질서에 있어서는 자기들의 잣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한다.
때로 두고 온 고향이 그립지만 마지막을 이곳에서 보내려는 내 결심은 단단하다. 아무런 욕심 부리지 않고 고지식하게 살다가 고지식하게 갈 수 있음을 허락하는 사회환경도 그렇지만, 그 속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는 청정의 자연환경이 있어 더 그러하다. 삶의 여분에 있음도 그러하다. 부릴 욕심은 고국에서 실컷 부려 보았다. 남은 인생을 큰 길보다 작은 길을 걸으며 보이지 않았던 주변의 작은 삶들에 공감하며 함께 가는 것이 내 마지막 욕심, 아니 ‘꿈’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