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개월 전에 이민왔다는 40대 중반의 한인 남성을 다민족 행사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한국에서 유명대학 영문학과를 나왔고 20여년을 무역회사에서 바이어들과 영어로 상담을 했단다. 영어 하나는 자신있다고 하는 이 남자의 말을 타민족 사람들이 잘 알아 듣지 못했다. 어디서 배웠는지 영어는 혓바닥을 굴려야 한다며 뭐라고 하는데 같은 한국인인 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예컨대 남의 말을 잘 못알아 들었을때 "Excuse me?", 또는 "I am sorry?"라고 보통 되묻는데 문장의 끝을 올려야 한다. 그의 억양과 발음을 그대로 옮기자면 "엑스미!", "암쏠!"하면서 따지듯이 끝을 내린다. 혀를 굴리면서 빠르게 말하는 것이 어쩐지 멋지게 보인다고 생각하는 지 모르겠지만 40년동안 한국말로 굳어진 혀를 버터먹고 살아온 백인들처럼 굴리려니 이상한 소리가 나올 수 밖에.
남 이야기 할 것 없다. 10여년 전 내가 그러하였으니. 백인들의 발음속도와 억양을 흉내내려다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만 두세번 되풀이 한 기억이 있어 지금은 또박또박 영어를 발음한다. "아이 해브 섬씽 임포턴트 투 텔 유(I have something important to tell you"라고 하지 더이상 "아이브섬씬포턴투테류"라고 하지 않는다. 그래야 내가 무언가 중요하게 할 말이 있구나 하고 상대방이 이해한다.
또 하나. 영어라는 것이 원래 백인들이 쓰는 말이라는 인식이 어릴 적 부터 뇌리에 새겨져 있어서인지 누런 피부를 가진 아시아인, 특히 한국인들이 유창하게 혀 굴리며 영어하는 것에 약간의 거부감과 함께 질투심마저 든다.
이경우 대부분 어릴때 이민왔거나 캐나다에서 태어난 아시아인일터인데 그런 사정은 아랑곳 않고 나와 같은 피부색을 가졌는데, 내 나이와 엇비슷한데 원어민수준의 영어를 하는 사람을 보면 샘이 난다. 어쩌라고? 그사람은 나처럼 한국말 유창하게 못하잖아! 억지를 부려 보지만 여기는 '양(洋)'말을 하는 '양(洋)' 나라. 손자 대에서나 그 한을 풀어 보는 수 밖에.
말하는 것도 어렵지만 듣는 것이 더 어렵다. 한국에서 원어민 강사로부터 영어를 배웠고, 영어방송을 들으며 청취력을 길렀지만 발음이 좋은 영어강사나 영어방송인만 영어를 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데 밴쿠버 와서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특히 중국인, 인도인들의 영어발음을 알아듣기 까지는 적지않은 세월이 걸렸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결국 영어권에서의 소통문제 해결은 밥그릇 수에 달렸음을 세삼 깨닫는다.
각설하고 처음 '포트랭리'라는 지명을 들었을 때 나는 어느 항구(Port) 인줄 알았다. 지도상으로 보니 광역 밴쿠버 동쪽 귀퉁이 프레이저 강 부근에 위치해 있길래 여기서는 강도 바다처럼 큰 곳이 많으니 강나루 주변을 '항구'라고 명명한 것이라 생각했다. 요새(Fort)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불과 1,2년 전 일이다. F자나 P자나 똑같이 들렸기 때문이다. 우선 포트랭리에 대해서 관심도 없었다.
광역밴쿠버만 해도 갈곳이 지천인데 한적한 시골마을이 안중에 들리 없었다. 그런데 들리게 된 이유는 지난 해(2013년) 9월 캐나다 시민권을 획득하면서 받은 '신규캐나다 시민권자 문화체험권(Canadian Citizenship Cultural Access Pass)'의 유효기간이 거의 만료가 되어가기 때문이었다.
캐나다에서 시민권을 취득하면 새내기 시민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박물관, 공원, 역사기념관, 미술관 등의 입장료를 1년간 면제해 주는 증표(Pass)를 받게 된다. 대개 6달러에서 12달러 사이의 입장권을 면제받으니 부부가 부지런히 발품을 팔면 과거의 캐나다인들이 살아왔던 삶의 흔적을 짚어볼 수 있어서 금상첨화다. 마다할 수 있으랴. 광역밴쿠버는 물론 캐나다 전역을 다닐 수 있었으나 원거리는 교통비가 많이 들어가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클 터. 하루에 다녀올 수 있는 곳은 빠짐없이 다녔다. 마지막 남은 곳이 포트랭리였다.
왜 랭리요새라고 명명했는지 이유를 알았다. 포트랭리 역사유적지(Fort Langley National History Site)를 방문하고 나서이다. 1827년 영국의 허드슨베이회사(Hudson's Bay Company; 현재 캐나다 대형 백화점인 베이(Bay) 백화점의 전신)가 캐나다 원주민과의 모피교역을 활발하게 하기 위해 지은 요새가 포트랭리이다.
아득한 옛날부터 이 지역 터줏대감이었던 코스트살리시(Coast Salish) 원주민들로 부터 구입한 모피는 프레이저 강에서 작은 카누로 빅토리아 항으로 옮겨지고 거기서 큰 배로 갈아타고 하와이를 경유, 남아메리카를 끼고 돌아 영국 항구에 도착해서 하역되었다.
비싼 값에 모피를 팔고는 요새 또는 내륙 깊숙이 프레이저강을 타고 올라가 원주민들과 교역을 하는 허드슨베이 회사직원들을 위한 식료품, 생필품 등을 싣고 같은 경로를 되짚어 요새에 도착했고, 그 물품들은 창고에 보관되어 다음 배가 올 때 까지 주민들에게 공급되었다. 그러니 창고에는 항상 수출용 모피 등과 수입된 생필품 등이 가득 차 있었을터. 곡식 창고에 쥐 꼬이듯 훔치려는 도둑들이 호시탐탐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들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사방 통나무로 둘러싸인 요새가 지어진 것이다.
<통나무 요새 안쪽>
<통나무 장벽 통로>
교역대상 물품은 비단 모피뿐만이 아니었다. 요새 주변을 흐르는 프레이져 강에는 물 반, 고기 반이라고 할 정도로 연어가 많았다. 토지가 비옥해서 크랜베리 등 각종 나무열매가 많이 소출 되었다. 뿐만 아니다. 강에서 사금이 채취되어 세계각지에서 노다지를 꿈꾸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원주민들이 곰 사냥이나 하고 물고기나 잡아먹던 이 한적한 마을은 곧 사람들로 벅적거렸고 이곳은 현재의 캐나다 서부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가 생성되고 발전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 사는 곳의 흥망성쇠는 피할 수 없는 법. 신라 천 년의 고도(古都) 경주가 고려의 탄생과 함께 쇄락하여 지금은 역사유적지로 남아 있듯이, 사금 채취가 끝나고 교역의 중심이 밴쿠버 항으로 옮겨지면서 포트랭리는 젊은이들이 떠난 시골농촌처럼 활기를 잃었다. 4.6m 높이의 통나무로 울타리를 친 가로 41.1m, 세로 36.6m의 이 손바닥만한 요새는 지금은 민속촌처럼 남아 옛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 주고 있다.
<모피창고>
<요새 통제본부로 쓰였던 빅하우스>
허드슨 베이 회사가 운영하던 모피창고에는 아직도 비버, 수달 등의 모피가 전시되어 있다. 한국의 대형 백화점에 가면 귀하신 몸(?) 상품으로 분류되어 눈에 잘 띄는 곳에 멋지게 진열되어 있을 터인데 이곳은 마치 남대문 시장 가판대에서 파는 재고정리 할인가의 옷처럼 아무렇게나 지천으로 널부러져 있다.
하나 슬쩍 해도 모를 정도라 그럴 의도도 없으면서 좌우를 살피는데 19세기 복장을 한 안내인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듯이 응시하고 있다. 아니오. 아니오. 나는 누가 지키지 않으면 이 비싼 물건들을 누가 훔쳐가지 않을까 염려가 되어서 주변을 둘러 본 것 뿐이오 하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니 그는 성큼성큼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바짝 긴장이 되었다. 왜? 어쩔려고? 나는 털끗하나 건드리지 않았어. 하는 말을 영어로 어떻게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그는 포트랭리 요새가 왜 생겼는지 아느냐 하면서 창고를 한바퀴 돌아보며 이런저런 옛이야기들을 들려 주었다.
우선 요새 윗부분의 흰색 2층건물은 허드슨베이에서 파견된 직원들의 숙소, 사무실 및 외부손님 접견장으로 쓰인 건물이라고 한다. 이름하여 빅하우스(big house), 그냥 큰집. 지금 보기에는 별로 크지 않은 것 같은데 옛사람들의 눈에는 크게 보였나 보다. 아무튼 집의 크기때문이 아니라 거기서 큰 사업상 결정이 내려지고 했으니 큰집이라 불러도 무방하겠다.
빅하우스 주변으로 모피창고, 곡식창고, 자재창고 등이 있었으며 생필품 가게에서는 주변 개척민이나 원주민들에게 하와이를 경유해 영국 등 유럽에서 들여온 일상용품을 팔곤 했었다. 방 두개와 부엌을 갖춘 상태가 괜찮은 집과 좀 더 작은 집들이 있었는데 요새 내의 거주자들을 위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초창기의 요새에 근무했던 총각들은-물론 백인들이다-원주민 처녀들과 결혼해서 가정을 꾸렸다. 미국같았으면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었겠으나 캐나다는 비교적 원주민들과 잘 지내온 셈이라 살아가는 데 큰 무리가 없었다. 더구나 영어와 원주민 언어를 동시에 할 수 있게 되자 요새의 원주민 부인들은 허드슨베이 회사가 원주민들과 교역을 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회사도 이러한 결혼을 장려했고, 원주민들도 마다하지 않았다. 영어를 아는 원주민 부인들이 중개인이 되면 백인들과 교역시 바가지 쓸 일이 없을 테니 오히려 캐나다 최초의 국제결혼(?)을 장려하는 편이었다. 한국 농촌에 시집온 동남아시아 처녀들이 연상되었다.
모피창고 안내인의 입에 발동기를 달았는지 설명을 그칠 줄 모른다. 그의 말을 100퍼센트 완벽하게 알아들었더라면 요새의 내력에 대해 좀 더 흥미를 느꼈을지는 모르겠으나 30-40퍼센트는 한귀로 들어갔다가 의미없이 다른 귀로 흘러나간다. 요는 20여분 이상 잘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들으니 지루하고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풍신좋은 백인이 열심히 설명하는데 그만두라고 할 수 없어 듣고 있는데 아내가 다른곳도 구경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니 그제야 우리를 해방시켜준다. 과공비례(過恭非禮). 친절도 지나치면 예의가 아니라는 말을 그는 잘 모를 것이다.
사람이 몰리는 곳에는 무언가 볼거리가 있는 법. 모피창고를 나와 좌측 대장간에 가니 역시 19세기 복장의 대장장이가 호미, 낫 등 농사용 도구, 못 등 건축용 철물을 만드는 시범을 보여 준다.
<대장간의 시범>
<임대용 방갈로>
풀무질로 화기를 돋운 화로에서 물렁물렁해진 주물을 꺼내어 망치로 두드려 못, 수저, 칼 등을 만드는 시범을 보여주자 구경하던 관람객중 일고여덟살 되어 보이는 금발의 백인소녀가 쉴새없이 질문을 한다. 뜨겁지 않아요? 장난감도 만들 수 있어요? 망치로 때리다 부러지면 어떻게 하나요? 하루에 몇개씩이나 만들어요? 아저씨는 여기서 사나요? 등등.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고 궁금한 것이 많아 쉴 새 없이 질문을 던지는 그 소녀는 한 20년 쯤 후에 좋은 과학자가 되어있지 않을까? 반면 단체관람을 온 듯한 유학생으로 보이는 일단의 아시아(주로 일본, 중국, 한국말이 많이 들렸다.) 젊은이들은 슬적 한번 대장간을 기웃더리더니 이내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며 요새가운데의 공터에서 배구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역사유적지를 탐방하러 왔다기 보다 관광지화된 요새의 임대용 주택에서 하룻밤 지내며 밤에는 캠프파이어를 하면서 놀려고 온 듯 했다. 보기 민망했다. 그들은 낯선 곳에 와서 낯선 삶을 살펴보는 색다른 체험을 하기 보다 그냥 하루 즐기고 가자는 모양새였다. 그럴러면 어디 공원이나 바닷가를 가서 놀지 남의 나라 역사유적지에서 시끌벅적할 건 무언가. 같은 피부색을 한 것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모피창고 안내인에게 내가 한국의 유명 문학지(?)에 캐나다의 이곳저곳을 소개하는 글을 연재하는데 이번에는 포트랭리편이라고 무슨 특파원처럼 폼을 잡은 것이 화근이었다. 대장간을 벗어나 예전 사금채취 시범장 구조물 주변에서 쉬고 있는데 어느새 멀리서 나를 발견하고 슬금슬금 다가와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역사유적지 입장료 만으로는 관리가 어려워서 방갈로를 여러채 지어 임대를 한다고 했다. 그리고는 화제를 바꿔 다시 역사이야기를 시작했다.
프레이저 강 상류에서 사금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1858년 샌프랜시스코까지 번지자 당시로는 엄청난 인구인 3만여명이 프트랭리로 몰렸다. 사람이 몰리면 먹고, 입고, 잠자는 문제를 해결해야 할 가게들이 번성하는 법. 식당, 잡화점, 여관 등이 요새 주변으로 차츰 들어서면서 하나의 촌락을 이뤘다. 지금도 역사유적지인 요새 밖 주변 거리는 당시 세워진 건물들이 고풍스러움을 간직한체 피자집, 술집, 커피집, 옷가게 등의 영업활동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골드러시 기간에 밴쿠버섬의 행정책임자이자 허드슨베이 회사의 태평양지역 사업부 책임자인 제임스 더글라스는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가 영국의 식민지임을 선포한다. 1858년 11월 19일, 원주민을 비롯한 100여명의 인사들이 모여 빅하우스에서 기념식을 갖게된다. 이제 캐나다 서부지역은 더이상 무주공산이 아니라 영국의 땅이 된 것이다.
원주민들의 생각은 어땠을까. 조상대대로 살아오면서 땅은 그냥 삶의 터전이고 누구의 것도 아닌 신의 선물이라고 생각했는데 백인들이 삼분오열 갈라 이곳은 내땅, 이곳은 네땅 구분지었으니 억하심정이 어떠하였으랴. 그래도 다행인것은 미국 서부개척사에서 보듯이 기병대에게 무참히 학살당하는 일이 없이 불만족스러운 대로 개척민들과 상생의 관계를 잘 유지하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주민 문화예술이 어느곳보다 서부캐나다가 잘 보전되어 오는 듯 하다.
1886년 허드슨베이가 교역상점을 요새 외곽으로 옮기면서 이곳은 서서히 침체되어 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때쯤 프레이저 강의 사금도 거의 바닥을 드러내었고, 교역중심지의 이동에 따라 관련 종사자들도 포트랭리를 떠나게 되니 요새는 방초만 프르른 '황성옛터'처럼 변했다.
1923년 5월 캐나다 유적지 보전위원회가 버려진 포트랭리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고 요새건물 주변에 기념비를 만들어 새웠다. 이어 1955년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 태동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요새주변을 국립역사공원으로 지정하면서 오늘날의 역사유적지 관광명소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이름이 마이크라고 밝힌 그는 밴쿠버를 방문하는 한국분들이 포트랭리 유적지를 많이 찾아오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대가를 받는지 자원봉사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이크 덕택에 프레이저 강가에서 이루어진 포트랭리의 역사를 어느정도 알게 되었다.
<포트랭리 안내인 마이크와 필자>
<영국식민지 선포 기념식 정경그림>
처음에 자꾸 나만 따라다니며 원치도 않는 요새안내 설명을 하기에 이거 혹시 팁(tip)이라도 바라고 그러는 것이 아닌가 슬그머니 걱정을 했는데 약간 늙은 죤웨인처럼 폼나는 풍채를 가진 그는 자기의 말을 귀담아 들어준 나에 대한 '으리(의리)'때문에 그렇게 열심이었다. 나의 오해가 부끄러웠다.
요새 밖을 나서는데 말을 조금 보태어 아기 잠자리만한 모기가 나와 아내의 주변을 어른거렸다. 내 피부가 두텁고 질겼던지 아내만 공략했다. 옷을 뚫고 들어갈 정도로 강력한 모기의 바늘입이 아내의 장단지를 부풀어 오르게 했다. 사람이나 동물의 피를 흡입하는 모기는 주로 암놈이라는데 왜 나를 물지 않고 동성(同性)을 공략했을까. 얼마나 지독하게 물렸는지 며칠을 아내는 가려움에 뒤어은 통증으로 고생했다.
이런 모기에 물리고, 도둑들과 싸우며, 아무런 편의시설도 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살아온 사람들이 개척정신이 있었기에 오늘날 낯선 곳에서 온 이방인들도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지 않나 생각하니 타민족들의 조상이라도 고개가 숙여진다. 외롭고 힘들더라도 극복하면서 현재의 삶을 보람있게 산다면 후세 사람들도 이를 잊지 않으리라.
지구는 하나. 인종과 피부와 언어는 다르더라도 보다나은 인류의 삶을 위해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인류는 보다 희망찬 미래를 맞으리라고 벌겋게 부풀어 오른 아내의 모기물린 자국을 바라보며 한 도(道)를 터득한다. 도가 뭐 별것인가? 올바른 삶의 길을 아는 것이 도 인것을. 독자 여러분들. 혹시 도에 관심 있으신지. 포트랭리 모기에 한 번 물려보심이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