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와, 전쟁의 기억 속으로.
전쟁박물관(Canadian War Museum)을 방문하는 아침. 부푼 기대를 부추기는 듯 여우비 사이로 햇살이 춤추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내 신생아 때의 조국. 그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왜 벽안의 캐나다 젊은이들이 죽음을 마다하고 태평양을 건너 작은 한국땅에 왔을 까?
비단 전쟁동이(1950년생)로서만의 관심은 아니었다. 밴쿠버 이주 초기, 센트럴 공원 "평화의 사도" 상 뒷면에 새겨진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 출신으로서 한국전에서 전사한 참전용사들의 이름을 보는 순간 온 몸을 휘감던 전율이 나로 하여금 기를 쓰고 오타와의 전쟁박물관을 가 보라고 세뇌해 왔기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한국전. 나라 밖에서야 한국전이라고 지칭하였지만 어린 시절의 우리에게는 줄곧 6.25전쟁이었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날을-- 해마다 전쟁기념일에 부르는 6.25 노래 속에 있었고, 빨간 마후라, 돌아오지 않는 해병, 피아골 등 영화 속에서만 있었다. 내 유년 시절의 한국전은.
아. 또 있다. 팔다리가 없거나 애꾸눈인 상이용사들이 집집마다 다니며 구걸하다가 성에 차지 않으면 행패를 부리던 기억들. 어린 시절에는 그저 상이용사들이 무서워 피하기만 했다. 누가 전쟁에 나가라고 했나? 왜 저렇게 다쳐 가지고 애꿏은 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리나? 나라가 가난하여 전쟁 후에 상이용사들을 제대로 대우해 주지 못했기 때문에 먹고 살기 급급한 그들은 결국 구걸로 연명할 수 밖에 없었으리라. 조국과 민족을 위해 용감히 싸웠고, 자유를 얻었지만 전쟁으로 피폐해진 땅에서, 더구나 성하지 못한 몸으로 생존의 전투에 뛰어든 그들은 얼마나 힘들었으랴.
그때는 몰랐다. 용사들의 숭고한 희생을. 옛 전쟁영화 속의 배우들인 황해, 박노식, 최무룡, 장동휘 들만이 멋있는 용사들이었다. 두 다리를 잃어버리고 거북이처럼 엉금엉금 기어가며 구걸하던, 두 팔을 잃고 입으로 동냥바가지를 물고서 가가호호 다니던, 두 눈을 잃고 더듬거리며 의지하던 지팡이로 대문을 탁탁 두드리던 그 용사들은 그저 더럽고, 불쾌하고, 흉칙한 거지에 불과했다.
얼마나 철이 없고, 아둔하고, 이기적이었나. 그시절의 나는. 그들이 아니었더라면 자유대한은 없었을 터이고, 그들이 잃어버린 두눈, 두팔, 두 다리 덕택에 전쟁동이는 보람있는 삶을 설계하고, 이루고, 열매맺어 오면서 60의 허리를 넘을 때 까지 행복하게 살아오고 있지 않은가. 그러던 사이 용사들은 어느새 허리는 구부러지고, 얼굴에는 검버섯, 목소리는 그렁그렁, 머리에는 흰 서리가 뒤덮인 채로 먼저 간 전우들과 만날 날을 생각하는 나이가 되어 버렸다.
전쟁의 기억으로 마음이 서늘한 적이 한번은 있었다. 30대 초반에 내가 결혼할 무렵이었다. 총각시절의 짐을 정리하면서 어머니는 오래된 장농 속에 깊이 숨겨둔 철제 트렁크를 끄집어내 함께 정리하셨다. 거기 배냇저고리와 색동옷이 두벌 정도 있었다. 내것이나 혹은 여동생의 것일수도 있었다. 나는 신기해서 내 어릴적 옷을 아직도 보관하고 있었느냐고 어머니께 물었다.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물끄러미 옷들을 쳐다 보셨다. 한 두번 쓰다듬으시다 또다시 생각에 잠긴듯 창밖을 내다 보셨다. 그리고는 그 옷들을 쓰레기 통에 버리셨다. 내가 기념으로 간직할 터이니 달라고 했다. 그때서야 어머니는 우는 듯 얇게 웃으시며 말했다. 네것이 아니다. 죽은 네 형과 누나 것이다.
30여년 전 내가 태어나기 전에 현재의 장남인 형 말고 누나와 맏형이 있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6.25동란 시 피난길에서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내 얼굴도 모르는 형제자매가 죽었단다. 굶주리던 피난길에 무슨 영양가있는 음식이 있었으며, 어떤 질병치료제가 흔했으랴. 나는 세상 모르고 어머니의 젖으로 배를 불렸지만 어린 형제자매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때 나는 전쟁의 다른 얼굴을 보았다. 그것은 신나는 활극으로만 기억되는 영화속의 전쟁이 아니었다.
캐나다에 살면서 16개 UN 참전국 중의 하나였던 이 나라는 한국전쟁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궁금했다. 우리에게는 6.25가 동족상잔의 비극이었지만 이들에게 한국전은 무었이었을까?
한국의 산들은 피로 물들었다
용맹과 진실의 피
25여단이 홍, 백, 청의 깃발아래 함께 한 전투
그들은 한국의 산을 넘어 행군했었지
적이 포진하고 있는 산을 향하여
그 들은 여단의 명령을 생생히 가슴에 새겼노라
저기 보이는 산들을 오늘 중으로 점령하라는…
전투를 향해 앞으로 앞으로
웃음이 없는 결연한 얼굴들,
산허리를 돌면서 그들은 알았노라
살아 돌아오지 않을 전우도 있겠고
두고 온 처와 노모를 생각하는 전우
애인의 상냥했던 모습을 떠올리는 전우
터벅터벅 넘어질 듯 행군하던 전우의
속삭이듯 하는 경건한 기도소리
한국의 산들은 피로 물들었다
그들이 사랑했던 자유의 선물이 아니던가
그들의 이름이 영원한 영광 속에서
그들의 영혼이 저 높은 하늘에서 안식할 지니…
(시 "한국전 고지에 뿌려진 피;Blood on the hills of Korea" 번역 전문. 저자인 캐나다 참전용사 패트릭 W. 오코너는 이 시를 쓴 다음 날인 1951년 5월 30일 전사함)
<원문>
"Korea"
Patrick W. O'Connor
There is blood on the hills of Korea.
'Tis the blood of the brave and the true.
Where the Twenty-fifth Brigade battled together
Under the banner of the Red, White, and Blue.
As they marched over the fields of Korea,
To the hills where the enemy lay,
They remembered the Brigadier's order:
'These hills must be taken today!"
Forward they marched into the battle,
With faces unsmiling and stern.
They knew as they charged the hillside
There were some that would never return.
Some thought of their wives and mothers,
Some thought of their sweethearts so fair.
And some, as they plodded and stumbled,
Where reverently whispering a prayer.
There is blood on the hills of Korea.
It's the gift of the freedom the love.
May their names live in glory forever,
And their souls rest in heaven above.
Private O'Connor of Sarnia, was a stretcher-bearer with C Company of the Second ( Special Service ) Battalion of The Royal Canadian Regiment, part of the Canadian Twenty-fifth Brigade and attached to thee United States Twenty-fifth Infantry Division.
O'Connor had been in action in Korea only five days when he was killed. He wrote this poem on May 29, 1951- the night before he died. He is buried in the United Nations Cemetery at Pusan, South Korea.
베트남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70년도 초반, 나는 육군본부 사병이었다. 이웃 내무반을 빌어 베트남전 귀환용사들이 대기하도록 했다. 파병되면 월급도 많이 받고, 남국의 색다른 풍경도 즐길수 있다면 소문으로만 알고 있던 전쟁을 그들에게서 확인하고 싶었다. 기회가 되면 나도 갈까 생각했다. 파병이 무슨 해외관광의 기회처럼 여겨졌었다.
그러나 그때 본 그들의 눈빛. 불안과 초조와 긴장이 가시지 않은 눈빛. 밤마다 악몽으로 소리치며 부대 막사를 흔들어 놓던 그 두려움. 전우들이 흘린 피를 본 사람들의 증오와 적개심. 그들은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전장에서 통제불능의 후유증만 가슴에 담은 채 귀국했던 것이다.
그나마 그들은 살아 돌아왔다. 비행기로 공수되어 가족들에게 넘겨지기까지 부대 막사 뒤편에 산처럼 쌓아올려졌던 전사자들의 관. 이를 지키기 위해 밤당번 보초가 되면 그들의 신음소리가 관속에서 퍼져 나오는 것 같아 모골이 송연했다. 결국 나는 베트남전 파병을 포기해버렸다.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곧 그 전쟁은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 되었다. 국방부 시계는 계속 돌아갔고, 나는 제대하여 편안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전쟁박물관 현판
박물관 전경
한국전에 참전하려던 당시 캐나다 용사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박물관 내의 한국전 참전 전시관이 그 답을 줄 수 있을까? 궁금했다. 그래서 오타와의 여러 박물관 중 제일 먼저 전쟁박물관을 찾고 싶었다.
캐나다 전쟁박물관은 내가 사흘간 머물었던 퀘벡주 가티노 시와는 지척에 있었다. 그러나 행정구역상으로는 오타와 강을 사이에 두고 엄연히 온타리오 주에 위치했다. 해외여행을 할 때면 나는 꼭 버스나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해 평범한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눈여겨보곤 했는데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8달러 짜리 종일권(Daypass)을 사면 오타와 도심 어디든 제한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어 숙소에서 도심으로 풀방구리 쥐 드나들듯 했다. 그 길목에 박물관이 있어 어렵지 않게 방문할 수 있었다.
단층으로 이루어진 박물관은 4개의 전시구역(Gallery)으로 나눠져 있었다. 캐나다 전쟁사에 따라 연도별로 구분이 되어 있었다. 즉 전장(Battleground)라고 명명된 제 1전시관은 캐나다라는 국가가 탄생하기 전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시절 원주민들과의 전투, 프랑스와의 영토분쟁, 미국과의 싸움 등에 관한 1885년도까지의 역사적 전쟁유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1812년 미국과의 전쟁은 우리가 보기에는 도저히 분간할 수 없는 같은 영국출신 백인들간의 싸움이었을터인데 지금 캐나다는 정치,경제,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영국보다 미국에 더 가까우니 세상을 바꾸는 세월의 바람을 감지할 수 있었다.
미국이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시작된 전쟁이었으나 승패를 주고받았을 뿐 2년 8개월간의 전쟁은 누구의 승리도 없이 끝났다. 단지 가끔씩 텔레비젼에서만 캐나다는 소수의 정예로 미국의 대군(?)을 물리친 캐나다의 투쟁정신을 자랑하는 선전용 광고를 전쟁발발일인 6월 18일에 내 보낼 뿐이다. 그 때 전투로 워싱턴에 있는 미국 대통령관저에 불이 나서 외벽이 검게 그을린 것을 흰 페인트칠을 하여 이름을 백악관으로 했다나.
여왕과 나라를 위하여(For Crown and Country)라고 구분된 제2전시장은 1885년부터 1931년사이의 전쟁유물을 전시해 두었다. 입구에 들어서면 먼저 남아프리카 전쟁(일명 보어전쟁)에 관한 기록물이 눈에 띈다. 여왕의 몸으로 당차게 영국의 국토를 확장해 나가던 빅토리아 시절에 당시 남아프리카에 먼저 와 있던 네델란드 계 보어족과의 전투는 결국 영국이 이 지역에 세워진 트랜스발 공화국과 오랜지 자유국의 독립을 인정하면서 일단락 되었지만 동 지역에서 금과 다이아몬드가 대량으로 생산되자 다시 욕심이 생겨 재침공함으로써 두 독립국을 식민지로 삼았다. 오늘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다.
신사의 나라라지만 그 당시 영국도 재물 앞에서는 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무주공산은 먼저 차지하는 자가 임자. 그러나 광개토대왕 시절을 제외하고는 남의 나라를 침략하여 본 적이 없는 대한민국이야 말로 진짜 신사의 나라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보어전쟁, 그리고 1차대전에 이르기까지 캐나다 젊은이들은 영국군 소속으로 참전하였다. 여왕의 왕관과 나라를 위해서라지만 결국 영국을 위해서였을터. 그래도 그들은 열심히 싸웠다. 그들의 용맹함을 자랑하는 전투 중의 하나가 비미리지(Vimy Ridge) 전투이다.
캐나다 군의 명성을 드높였던 1차대전사상 위대한 승리를 거둔 비미리지 전투. 프랑스에 위치한 소도시 비미는 연합군에 대항하는 독일군의 강력한 방어 거점. 영국도 프랑스도 거점탈환에 실패했는데 영연방군으로 참여한 캐나다부대가 해냈다.
1917년 4월 12일 비미리지 전역을 장악했을때 독일군 사상자는 2만명, 4천명이 포로로 잡혔다. 그러나 캐나다군 사상자는 사망 3,598명, 부상 7,104명이었다. 이 전투에서 그 유명한 캐나다 전쟁시 '플랜더즈 들판에서'(위의 시 참조)가 탄생되었다.
그래서인지 비미리지 전투 기념관은 보어전투관과 1차대전관을 합친 것보다 면적이 더 넓다. 전쟁박물관이 있는 거리 이름도 비미거리이다. 캐나다 현충일 행사때가 되면 어김없이 비미리지 전투를 떠올린다. 캐나다인들의 자긍심을 한층 고취하는 전투로 길이 남았다.
포화 속의 단조(Forged in Fire)라고 명명된 제3전시관은 모두 1931년도부터 1945년까지의 제2차 세계대전에 관한 전시물로 채워져 있다. 독재자 히틀러의 독일군에 대항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여하였지만 육, 해, 공에 걸쳐 캐나다 국군의 기틀이 마련되었고, 전쟁물자를 공급하는 과정에서 전시산업에서 비롯된 각종 산업시스템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로서 캐나다는 영국의 그늘에서 벗어나 세계적으로 우뚝 서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선동적인 힛틀러의 육성이 아직도 생생한 화면 앞에는 그가 타고다녔던 차량 중 한대가 전시되어 있었다. 습격을 받은 듯, 총탄자국이 좌측 유리창에 생생했다. 지금이라도 어디선가 총알이 날아올 듯해서 고개가 움찔했다. 위대한 독일제국을 건설한다면서 인종개량을 위해 약 6백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면서 전쟁에 광분했던 미치광이 독재자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음을 그 차량이 증명하는 듯 했다.
히틀러가 타던 승용차,
캐나다 군수산업 제조물자
마침내 한국전 기념관이 있는 제4전시관에 도달했다. 폭력적인 평화(A Violent Peace). 4전시관의 영어이름을 직역하면 그런데 좀 말이 되지 않는다. 폭력적인 평화라니? 아마도 '평화를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폭력'으로 이해하는 편이 낫겠다.
2차대전 이후의 냉전(Cold War) 체제에서 발발한 한국전, 평화유지군, 나토(NATO)군을 위시하여 최근의 아프카니스탄 참여 전쟁에 관련된 기록 및 유물들을 전시해 두었다. 박물관 전시 구조가 제1전시관부터 봐야 제4전시관에 도달할 수 있도록 유도해 놓았기 때문에 별 관심도 없는 캐나다의 전쟁사를 주마간산 격으로 흟으며 왔건만 고대하던 한국전 기념관은 왜 그리 초라한지. 실망을 금치 못했다. 남하하던 중공군의 서울공략을 저지하기 위해 가평의 고지에서 호주군과 함께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전장터의 축소된 실물모형과 무기 몇점, 그리고 사진과 기록을 담은 패널들. 그게 전부였다.
26,000명의 캐나다 병사들이 낯선 나라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참전하여 516명이 전사하고 1,255명이 부상한 한국전. 그러나 캐나다에서는 한참을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으로 여겨져 왔다. 그 전쟁은 여왕(Crown)을 위해서도, 국가(Country)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2차대전이 끝나고 불과 5년만에 세계평화를 위협하는-사실 이 전쟁은 구 소련과 미국의 대리전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는 견해가 있다-공산주의 국가의 침략에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연합군이 맞서 싸운 것이다.
불행히도 당시 한국, 우리의 조국은 해방이후 좌익갈등에 휩싸여 헤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미처 대비할 틈도 없었으리라. 그래서 민주주의의 종주국인 미국은 공산주의의 도미노현상을 막기 위해 자국 뿐 아니라 UN에서 다른 민주 열방에 참전을 호소했고 이웃인 캐나다는 기꺼이 응했다.
그러나 전쟁은 어느 한 쪽의 승리로 인해 종전(終戰)을 맞은 것이 아니라 이제 그만 싸우자는 협의하에 이뤄진 휴전(休戰)이 되어버렸다. 남의 땅에서 이루어진 무승부로 끝난 전쟁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당시 텔레비젼의 보급도 귀했고, 인터넷은 상상도 할 수 없던 시절에 몇번의 신문보도만으로 한국전쟁에 대한 소식은 끝이었다.
한국전 전시관 입구
가평 전투 그림과 전장의 축소된 실물모형
"내 경우는 그냥 정의감이었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작은 나라라지만 전쟁으로 자유와 평화를 잃어버리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우고 싶었어. 그게 명분이었지. 그러나 전쟁은 달랐어. 그건 운동경기 같은 것이 아니었지. 살을 에는 듯한 추위속에 몰려오는 적군들. 포화소리. 총탄에 쓰러지는 동료들의 가슴에서 뿜어나오던 피. 비명소리. 죽음에 대한 두려움.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 이런 것들이 오랫동안 내 기억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어. 두차례 세계대전처럼 승리한 전쟁도 아니었고 공연히 젊음만 희생하였다는 생각에 마음 아팠지.
그러나 몇년 전 한국정부의 초청으로 60여년만에 다시 옛 전쟁터를 방문한 적이 있었지. 그때 보았지. 눈부시게 성장 발전한 폐허를. 약동적이고 활기찬 한국인들의 모습을. 그래서 생각했지. 이 전쟁은 무승부가 아니었다고. 우리는 명분을 되찾았다고. 이 전쟁은 잊혀진 전쟁이 아니며, 한국인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살아 남을 것이라고. 그것으로 만족해. 이제 내 나이 83. 전사한 옛 전우들을 만나러 갈 때가 가까워지고 있어. 하지만 그들에게 이야기하려고 해. 우리들의 젊음은, 우리들의 희생은 정말 가치있고 보람있는 일이었다고."
몇년전 밴쿠버에서 한국전 참전 기념관 건립을 위한 예산 후원 요청을 위해 연방정부, 주정부 및 한국정부에 보낼 청원서를 각계각층으로부터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캐나다 참전용사클럽의 모임에 참석했다가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한국전 참전용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가 전쟁동이(Korean War baby)라고 하자 눈물을 글썽거렸다. 나는 그 눈물을 잊지 않으려 한다. 한국전의 기억은 분명 내 기억에 남아 있을 수 없겠지만 한국전에 대한 생생한 기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참전용사들을 위해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것이다. 그 눈물에 아롱진 전쟁의 기억은 나의 기억으로 남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