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에세이 (2)
노 시인의 시집
복잡한 도심
살기에 바쁜 얼굴들이 긴장하며 오가는
광화문 네거리
버스를 기다리며 나는
8순 노 시인의 시집 한권 사들고
첫 장 들쳐 읽을 기대에
가벼운 흥분을 느꼈다.
이 도심에 속하지 않는 이처럼
여유로워졌다.
“성공학 개론” 을 찾던 20대
“돈버는 비결” 을 찾던 30대
어느새 세월의 빠른 바람 속에
날려 보내고
“중년의 건강관리” 를 찾게 된 40대 중반에
어인 일인가
노 시인의 시집 한권에 이리도
가슴 뛰고 있음은
인생살이 험한 고개 넘다가
넘어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 넘다가
뉘 부르는 소리에 문득
뒤돌아 보니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봄부터 그렇게 울던 소쩍새“
내 영혼 순수하던 10대
그때 울던 소쩍새 거기 있었네
돌아오지 않는 세월의 뒤안길
그 향수에 눈물 젖어
아, 나도 모르게
소쩍새를 노래하던,
지금은 세월의 빠른 바람 속에서 곱게 풍화된
노 시인의 시집에
손이 갔었나 보다
봄 더디 오는 도심의 4월 초순
봄꽃은 내 마음속에 벌써
화알짝 피어난다. (96. 4. 20)
초등학교 5학년 때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대통령 할아버지 생신 축하 편지쓰기에 내 편지가 뽑혔다. 경무대로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4.19 혁명이 일어나 무산되었다.
대구 계성중학교 때 글쓰기를 했는데 국어선생님이 잘 쓴다고 교내 백일장에 참여하라고 하셨다. 지금 문단에서 활약하는 중견시인 정호승과 나, 그리고 소식을 알 수 없는 박명호란 친구가 서로 번갈아 가면서 입상을 했었다. 부상으로 구내매점에서 학용품이나 과자 등과 바꿀 수 있는 상품권을 받는 재미로 백일장이 있을 때마다 참여했다. 힘들었던 고교시절, 대학시절에도 글을 썼고 직장에 들어와서도 사내보에 계속 글을 썼다.
그러다가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다. 돈 벌고 출세하는데 글쓰기가 무슨 보탬이 되는가? 그래서 펜을 꺾었다. 그리고는 혼탁한 삶 속으로 영혼을 던졌다.
40대 중반을 넘어서며 뒤를 돌아볼 기회가 주어졌다. 앞만 보고 달리다가 그만 미끄러지면서부터였다. 내가 추구하던 것들이 사라지고 나니 내 가슴에 남은 것은 바람 뿐 이었다. 그래서였다. 나는 잠시 멈추어서 돌이키지 못하는 세월을 뒤 돌아 보았다.
실용서적을 즐겨 찾던 서점에서 문학서적 쪽으로 발걸음이 옮겨졌다.
나는 생전 돈 주고 사 본 적이 없었던 시집 한 권 사 들었다. 그리고는 읽고 또 읽었다. 서 정주 시인의 인생이 그 시 구절 마디마디에 담겨 있었다.
나는 다시 펜을 들기 시작했다. 1996년 그 해 나는 문학공간에 시로 등단하였다. 늦었지만 순수했던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밴쿠버에서도 신춘문예가 있어 수필로 등단하였다. 글쓰기가 분명 돈 되는 일은 아니지만 이국에 살다 보니 짙어지는 외로움을 모국어로 토해내는 후련함이 좋아서 계속 글을 쓰게 된다.
50대 중반을 넘어 가고 있는 요즘, 그리운 추억들은 한 두 조각씩 흩어져 버리고 육신은 점차 늙어 가지만 펜만 들면 영혼은 점점 젊어져 가는 느낌이 든다.
외로운 타국에서의 삶, 새로이 불씨 일구는 문학으로 하여 풍성하다.
<되돌아보니>
40대 중반에 다니던 직장에서 명예퇴직을 권고 받았다. 인생 다 살은 느낌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새파랗게 젊은 시절. 그때는 ‘이 나이에 무엇을 해 먹고 사나’ 하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힘든 낮과 밤. 문학으로 위로 받았다. 그냥 삶의 넋두리 같은 시가 양산되었다. 그러나 남긴 족적이 있어 마음 흐뭇하다. 내가 나에게 축하한다. 잘 버티었다. 잘 견디었다. 이제는 마음의 평안을 누리며 남은 인생 잘 살아라. (2024년 7월 21일. 일요일. 밴쿠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