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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anca Dec 29. 2023

사라진다 해도 결국 남는 것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마쓰이에 마사시

대학을 졸업하고 저는 결론적으로 전공과 전혀 다른 분야의 신입사원이 됐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처음부터 배워야 했지만, 회사가 한창 바쁜 시기라 하나하나 물어가며 일을 배울 만한 상황이 아니었죠. 선배 직원들도 상관들도, 심지어 사수도 말 한 마디 붙이기 힘들 정도로 일이 사방에서 밀려들었습니다. 격무에 지쳐 퇴근하면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잠들곤 했지만 새벽이면 깨곤 했습니다.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회사에 커다란 손실을 입히는 악몽에 시달렸기 때문이죠. 당시에 저는 진심으로 빨리 늙어서 선배들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제 눈에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큰 산처럼 보였으니까요. 나처럼 초조해하거나 서툴거나 두려워하는 모습과 달리요. 직장에서 나이 드는 일은 단단해지고 거대해지는 일인줄 알았어요.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대학을 갓 졸업하고 노건축가의 건축 사무소에 입사한 청춘의 그 한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노건축가를 선생님이라 칭합니다. 나이 든 사수격인 셈이었죠. 이미 칠십대 중반에 들어선 건축가와 함께 주인공은 회사의 여름 별장에서 국립도서관 설계 경합에 낼 설계도를 만들게 됩니다. 작가 마쓰이에 마사시의 문장은 아사마 산 자락의 '무라이 건축 설계사무소'의 여름 한철을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독자 모두 함께 그 현장에 초대되는 것이죠. 이를테면 아침 나절, 모두 작업을 준비하는 제의처럼 시작한 연필깎기 같은 장면이요. 사라락, 사라락,  연필을 깎는데 열중한 사람들, 은은히 퍼지는 나무 향기에 대한 묘사를 읽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그들과 함께 연필을 깎으며 하루의 작업을 준비하는 마음이 됩니다. 작은 루틴 하나하나가 더없이 엄숙합니다. 거대한 프로젝트를 향해 하나하나 밟아 나가는 그 절차들을 하나하나 경험하며 주인공은 비로소 건축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저는 열심히 일을 배워 더 이상 큰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겠다 싶을 때 회사를 나오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경력을 살리지도 못하게 됐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그 일을 배우며 흘렸던 눈물, 선배 직원들에게 배웠던 그 모든 실무 지식들이 무용한 것이 되어버린 걸까요? 그렇게 생각했을 때도 있었습니다. 하나하나 열심히 노력하며 쌓아올린 것들이 일순간 허무하게 무너지는 듯한 허무감에 휩싸였던 시간이요.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의 주인공은 다른 의미에서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건축 설계사무소의 직원들이 다 같이 함께 열정적으로 노력하며 만든 설계도가 생각했던 일이 그의 생각과는 다른 결말을 맞게 됩니다. 주인공은 세월이 아주 많이 흐르고 나서야 그것이 가지는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알아차리게 됩니다.





각인된 것은 상실되지 않았다.



위로가 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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