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회사에서 동료 직원들, 상관을 대하는 나와 친구들과 만날 때의 나, 가족을 대할 때의 나는 같은 사람일까요? 심지어 친구 관계 안에서도 어떤 친구는 나를 극I로 또 다른 친구는 E로 인식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동일한 내가 왜 이렇게 타인에게는 각각 다르게 보일까요? 그건 아마도 우리의 페르소나 때문일 겁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나의 푼수 같은 면이 노출되고, 부하 직원 앞에서는 뭔가 근엄한 모습이 강조될지도 모르지만, 가족에게는 신경질이 많고 직설적인 사람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각자의 그림자를 가지고 사회 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그 모습이 나의 실재와 동의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런 그림자를 떼어 버릴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후련할까요, 아니면 허전할까요? 모든 허위 의식과의 결별, 모든 강압, 제도와의 결별, 심지어 시간 관념도 버리게 된다면요?
여기 그런 도시가 있습니다. 거기에 들어가려면 나의 그림자와 기꺼이 이별해야 합니다. 그 도시는 한 소년이 소녀와 함께 만든 이야기 속에서 진짜처럼 존재합니다. 환상적인 일각수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바로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소년과 소녀의 사랑으로 시작하는 듯했던 이야기는 이 신비로운 가상의 도시와 주인공이 중년으로 나이 들어가는 현실의 이야기들 사이를 종횡무진 넘나듭니다. 하루키 특유의 강점은 환상과 현실의 벽을 거침없이 무너뜨리고 독자를 그 공간에 초대하는 것이죠. 언뜻 들으면 황당무계하게 들려도 그의 이야기에 몰입해 있으면, 어느 순간 읽는 이 모두를 이 공간으로 이동시켜 버리는 하루키만의 마법에 걸려들게 되죠.
그건 누구나 그런 공간을 한번쯤 생각해 본 적이 있기 때문이죠. 하루키가 만든 도시처럼 일각수가 뛰어다니는 곳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정말 내 진짜가 영원히 보존될 수 있는 환상의 도시 하나에 대한 환상은 누구나의 내면 깊숙히 있을 겁니다. 그건 추억이 될 수도 있고 미래의 공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진짜 나를 만날 수 있는 곳, 내가 나를 연기하지 않아도 되는 장소, 나의 그림자를 기꺼이 떼어놓고 살 수 있는 공간에 대한 기대 말이죠
그러나 하루키는 이 사회적 자아에 대해서도 함부로 폄하하지 않습니다. "무언가를 흉내내는 일도, 무언가인 척하는 일도 때로 중요할지 모릅니다."라면서요. 우리는 진짜라고 생각하는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평상시 데리고 다니는 사회적 페르소나 또한 우리 자신을 구성하는 하나의 중요한 요소죠. 아빠의 역할, 엄마의 역할, 사회인으로서의 역할에 다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 사람 한결 같아, 라는 말은 그래서 어쩌면 좀 불안하게 들릴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은 갱신되고 다시 쓰이기 마련이고 그게 또 인생의 묘미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 변화무쌍해, 라는 말이 무작정 비난의 의미로 쓰이지 않는 것처럼요. 즉 우리는 우리의 그림자가 우리가 아니라는 것에도 동의해야 하지만, 그 그림자를 무정하게 떼어버리거나 부정하는 극단에도 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 모든 것이 우리를 이루는 일부분이니까요.
모든 것은 덮어쓰이고 갱신됩니다.
저도 다시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