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은 내 집이 아니라 그들의 집이었다.
싱가포르에 도착한 지 3개월. Service Apartment에서 지내는 것이 답답해지던 무렵 드디어 루프탑 테라스가 있는 집을 구했다. 격리가 풀리자마자 집을 알아보기 시작해서 그동안 20-30여 개의 콘도를 둘러보았다. Property Guru 앱에서 내가 안 본 집은 없겠다 싶을 무렵이었다. 싱가포르의 덥고 습한 날씨 때문에 벌레나 도마뱀에서 자유로워지려면 무조건 신축의 고층으로 구하라는 지인의 조언이 내내 맘에 걸리기는 했지만, 신축의 고층을 포기한 대신 넓은 거실과 안방, 그리고 멋진 오션뷰를 얻었기에 이만하면 괜찮겠다 싶었다. 무엇보다 지난 몇 개월 동안 내 '집'이 아닌 임시 숙소에서 지내다 보니 몸과 마음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집으로 어떻게든 들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집은 없을 거야.'라고 나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 이쯤에서 결론을 내기로 했다.
이 때는 몰랐다. 그 집이 내 집이 아니라 그들의 집이라는 것을.
싱크대 상단을 닦으려고 테라스에 있는 의자를 가져와 부엌 바닥에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수백 마리는 되어 보이는 개미가 흰색 타일 위에서 방사형으로 퍼졌다.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줄 알았다. 재빨리 살충제 스프레이를 뿌려서 상황은 해결했지만 놀란 마음은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마 내가 내 인생을 통틀어 본 개미보다 그날 만난 개미의 수가 더 많을 것이다.
고요한 어느 밤이었다. 거실인지 화장실인지 뭔가 인기척이 들리고 동물의 울음소리가 나는데 가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아는 동물 중 집에서 소리 소문 없이 움직일 수 있을 만큼 작고, 소리를 내는 건 쥐밖에 없다. 으아악! 여기 설... 마... 쥐까지 있는 걸까? 몇 시간이나 그렇게 방과 거실을 오가는 중에 드디어 소리의 근원을 발견했다. 안방 화장실 창문에 붙은 도마뱀(lizard) 한 마리. 쥐가 아닌 건 천만다행이지만 얘도 반갑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근처에 가서 어떻게 할 용기는 도저히 나지 않아 창문을 열어주고 스스로 나가기를 기다려봤지만 꼼짝을 하지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안방 화장실 문을 굳게 닫고 바들바들 떨면서 잠을 청했다. 정말 울고 싶은 밤이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개미랑 도마뱀은 시작에 불과했다는 것을... 청소를 하러 집에 들렀을 때부터 두 마리의 바퀴벌레가 거실에서 죽어있는 걸 발견하고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이대로 단정 짓기엔 그동안의 노력과 설렘이 허무하기에 며칠을 두고 보기로 했다. 하지만,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을까? 그 후로 매일 아침 일어나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집 전체를 돌아다니면서 오늘은 몇 마리의 바퀴벌레가 죽어있는지를 확인하고 그들의 사체를 치우는 일이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너무 싫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들과 같이 살거나 치우거나. 내가 가진 옵션은 딱 그거 두 개였으니까.
재빨리 pest control 회사에 연락해서 서비스를 받았지만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짧은 기간 동안 나는 누구보다도 빨리 바퀴벌레의 생태를 습득하게 되었다. Egg case라는 것이 커피콩처럼 생겼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집에 큰 바퀴벌레가 있다면 밖에서 들어온 손님이지만 아주 작은 바퀴벌레를 자주 본다면 그 집 어딘가에 본거지가 있다는 의미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불행히도 내가 이사 간 집은 그들의 본거지였고, 손님들도 심심치 않게 드나들었다. 참고로, 이때 나는 굳이 몰라도 되는 바퀴벌레의 생태 관련 영어 단어를 잔뜩 습득하게 된다.
내가 그토록 바랬던 my sweet home은 내 집이 아니라 개미, 도마뱀, 바퀴벌레의 집이었던 것이다.
전자제품을 계속 최고 레벨로 쉼 없이 사용하면 제품이 갑자기 멈추거나 전원이 꺼져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때 나는 처음 알았다. 사람도 전원이 꺼질 수 있다는 것을. 쉴 수 있는 용기도 여유도 없이 계속 달리기 하듯 지내오다 갑자기 집에 문제가 생기니 내 몸과 마음의 전원이 꺼져버렸다. 컵에 물이 넘칠 듯이 간당간당하게 담겨있다가 결국 넘쳐버린 것이다.
가끔 우리는 최선을 다하지 않는 연습이 필요하다.
비상 상황에서 쓸 수 있는 에너지를 남겨두고 있어야
더 오래 지치지 않고 나를 사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