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의 잔상

투명한 사랑으로 빚어진 그릇

by sincerecord


첫사랑
: 가장 순수하고 투명하지만 솔직하지 못했던, 서로의 삶의 아름다운 기반을 잡아준 존재

아플 만큼 시큼하면서도 따듯하고 짙은 Geranium Rose
몽환적인 한 장의 필름처럼 기억에 남은 Musk
깊은 잔향으로 남아 서로의 삶을 향기롭게 응원하는 거름이 되는 Vetiver


겨울에는 유독 날씨가 추워 관광객도 적고 새로운 시도를 굳이 하려고 하지 않는 시기이다. 그래서 그런지 고객이 없을 때면 공방 뒤쪽의 한옥마을을 한 바퀴 돌며 길에서 쿠폰을 나누어드린다. 고객을 끌어올 수 있는 확률은 매우 낮으나, 종종 선뜻 함께해 주시는 분들이 계신다. 그분들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생각하면 일상 속 낭만을 찾아 즐기는 자유롭고 서정적인 영혼들이랄까. 당장의 좌표 찍는 여행 가라기보다는 로컬의 맛집을 찾아다니고 싶어 하는 다소 정겹고 소소한 사람들이다.

마침 아담하고 청순한 모녀가 한옥마을을 돌고 있었다. 대만 분이시라길래 대만의 대표작 ’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영화에 대한 대화를 하며 공방으로 향했다. 한창 한국에 곧 리메이크 영화가 나온다고 광고를 하던 시기여서 그런지 영화의 중요 포인트들이 생생하게 떠올라 대화거리가 많았다. 파란 펜 자국, 학교 복도, 등. 영화 속 주인공 션자이처럼 선하면서 순수한 웃음을 가졌던 손님의 모습은 어머니께 여행을 시켜드릴 만큼 성숙해진 아가씨가 된 성장한 소녀의 모습 같았다.


그녀가 지어간 향수의 이름은 ’첫사랑‘.

함께 이야기를 나누게 된 영화의 이야기가 머릿속에 맴돌아 향수를 만들며 첫사랑의 기억을 담아 만드셨다고 한다. 그녀의 첫사랑 이야기까지 깊게 들었어야 했는데, 조금 아쉽다.




고객님이 떠나신 후 문득 어릴 적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학창 시절에 자유로운 영혼인 마냥 발랄했던 나는 추억을 만들고 노는 것이 좋으면서도, 선 넘는 장난에 질색팔색을 하던 소녀였다. 그래서 늘 모범적이면서도 장난기 없는 친구가 나의 짝사랑 대상이 곤 했다.


나도 그때 널 좋아했던 내가 좋아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천진난만하던 모습을 깊은 곳에 숨기며 사회적인 가면을 쓰고 살아온 지가 거의 10년. 유치해지고 싶고 연약해지고 싶은 나의 내면을 눌러가야 했던 경험들이 나를 성장시키기는 했으나 초연함과 성숙함을 강박적으로 나 자신에게 강요하던 20대가 쉽지만은 않았다. 설명할 수 없는 많은 우여곡절과 경험들 가운데 살아남고자 했던 나만의 최선의 생존의 방식이긴 하다만 유치하고 어리숙한 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창피하던 그저 어른이고 싶던 나의 20대. 글을 써 내려가며 이 모든 순간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며 내 마음이 녹아내렸다.

20대 후반이라는 나이는 어른이란 포장 가운데 나도 모르는 내면의 벽들이 허물어짐을 경험하며 함께 유치하고 해맑을 수 있던 시절이 유독 그리워지고 떠오르는 시기인 것 같다. 세상은 눈치 없이 나의 학창 시절 플리들을 리메이크해서 발매를 한다. 20대 후반 나잇대 사람들의 감성과 타이밍을 정확히 아는…이 세상의… 지배자가 아닐까,, 하하. 감사하면서도, 다시금 다채롭고 낭만적인 삶을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지루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삶 가운데 돌이켜보니 정리되지 않은 다채로운 감정이 있었음을 자각하게 된 공방 근무. 어쩌면 주변 친구들의 감정과 이야기까지도 스펀지처럼 흡수하던 그런 사람이어서 그런지, 내게 피어났던 사랑의 감정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간 나의 삶의 이유조차 정의 내릴 수 없었기에 누군가를 사랑할 준비가 안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사랑은 나에게 그저 숙제로 다가왔다. 하지만 공방 일을 하며 다양한 연인들과 대화를 해보며 배운 것이 있다면, 그 어떤 사랑도 완벽하지 않고 서툴다는 것이다. 꿈을 향하여 서툴지만 담대하게 도전하던 나의 삶처럼 사랑도 이야기 책이 펼쳐지면 좋겠다.




나에게 첫사랑이란 나의 삶을 지키고 싶은 만큼 소중하게 담기는 인연일 것이다. 그 사랑을 지킬 수 있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길 바란다.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서로를 소중하게 지키고 보듬으며 나아갈 수 있는 동역자가 나타나길 바랄 뿐이다.


여행객들을 만나 향수 하나를 함께 만드는 일은 늘 나를 돌아보게 하는 감동적이고도 따듯한 순간이다. 잠재되어 있던 나의 향수, 그리고 감수성까지도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사연 속 잠긴 고객들. 서로의 페이지 가운데 삶을 향기롭게 해 줄 수 있는 순간이 되었길 바란다.


당신의 첫사랑은 어떤 기억을 남겨주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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