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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ah J Mar 05. 2024

[소설] 동희의 꿈

처음 써보는 단편소설

동희에게는 대학 4학년 때 만난 남자친구가 있다.

그날은 늦게까지 전공 시험준비를 하던 때였다. 통계학과를 다니던 동희는 졸업 후 원하는 곳에 취직하기 위한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어서 공부에만 전념하기 위해 혼자서 학교 도서관을 찾았다.

10시가 넘어서는 밤... 한참을 공부하다 커피 한잔을 마실까 하며 머리를 들었는데, 맞은편에 앉아서 공부하던 다른 과 선배와 눈이 마주쳤다. 언제부터 동희를 보고 있었는지 알 순 없지만 눈이 마주치자마자 선배는 동희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선배를 전에도 학교 캠퍼스에서 본 적이 있었다. 가수 김원준을 빼닮은 잘 생긴 외모에 검은색 뿔테 안경을 끼고 머리는 단정하게 뒤로 넘긴, 누가 봐도 세련되고 잘생긴 선배여서 눈이 갔었다. 미술과라는 것까지는 몰랐지만 그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동희는 그렇게 잘 생긴 선배가 자기를 쳐다보는 게 싫지는 않았고 그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마치 오랜 기다림 같은 운명처럼... 둘은 그렇게 도서관 반대편에서 서로를 응시하다 동시에 웃었다. 그리곤 도서관 자판기 커피 한잔을 뽑아 마시며, 복도에서 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렇게 동희는 선배와 캠퍼스 커플이 되었다.

졸업 후 지금까지도 둘 사이는 현재진행형이며, 함께 같은 곳을 향해 걸어갈 수 있는 암묵적인 믿음이 생겼다. 단 하나.. 둘은 너무 가난했다.


동희는 아주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이혼하신 이후로 엄마와 연년생인 언니 이렇게 세 가족이 방 2개짜리 낡은 아파트에서 쭉 살았다. 엄마는 혼자 두 딸을 키우며 보험회사에 다니시면서 정말 열심히 사셨다. 엄마는 딸들 앞에서는 늘 에너지가 넘치셨지만, 가끔 집에서 술을 마시는 날이면 "나쁜 새끼"하며 여전히 아빠를 원망하며 한없이 무너져 버리신다. 그래서 젊을 때 바람피워 엄마와 헤어졌던 아빠를 생각하면, 동희가 힘든 게 모두 아빠 책임 같았고, 그런 날엔 동희 역시 송아지처럼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졸업을 해서 취직하면 엄마에게 보탬이 되야겠다는 생각도 물론 있었지만, 동희 스스로 딛고 일어서서 누구보다 잘 살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엄마는 딸의 남자친구가 자기 남편처럼 얼굴만 번듯하고 전공이 미술과인 거도 못마땅한데, 뭐 하나 가진 게 없는 가난한 집안이라 애초에 결혼을 반대했다. 본인이 가진 것 하나 없이, 혼자 힘들게 아이들을 키웠던 터라, 딸들만큼은 집이라도 한채 사줄 수 있는 넉넉한 집안에 시집보내겠다고 늘 생각해 왔다.

마침 아시는 분의 소개로 괜찮은 선 자리 하나를 받아놓고, 동희에게 한 번만 만나 보라고 몇 번을 부탁했다. 부모님들이 자기 자식들이 신혼 때 짚고 일어날 디딤돌 정도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은, 동희의 가난했던 유년기를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이런 불편한 자리는 도저히 내키지 않았다.

동희 대학교를 다니면서부터 대전에서 상경해 혼자 자취 생활을 하고 있었다. 엄마 입장에서는 졸업하고 제법 큰 대기업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동희가 나이가 차도록 그놈의 선배란 작자와 연애만 하고 결혼도 하지 않는 것이 내내 못마땅했다.

동희는 엄마에게 줄기차게 걸려오는 전화에, 어쩔 수 없이 호텔 커피숍에 선을 보러 나갔다.

물론, 선배에게도 미리 알렸다. 엄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가는 거니 속상해하지 마라고..


선 자리에 나올 남자는 재첩국집 사장 아들이라고 했다.

동희보다 늦게 나타난 그 남자는 부모가 운영하는 재첩국집에 슬리퍼 차림으로 느지막이 카운터로 출근해 손님에게 돈이나 받고, 손님이 없을 때는 애니팡 게임 따위를 할 것 같은 지루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떠벌리기를 좋아하는지 오자마자 본인을 피력하느라고 말이 많았다. 동희가 더없이 참을 수 없었던 건 그 재미없는 대화 내용보다 입을 벌리고 말할 때마다 입 가장자리에 생기는 비눗방울 같은 하얀색 침이었다. 거미줄 치듯 말할 때마다 자꾸자꾸 더 많이 생겨나 포물선을 그리는 침 때문에 너무 신경이 쓰였고, 결국 한 시간도 채 안 돼서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모든 것이 불편하고 부자연스러웠다.

선배에게 미안했다. 백도 없고 돈도 없이 가난했으며 미술을 전공한 미래도 불투명한 남자였기에 엄마는 선배를 만나 보기도 전에 이야기만 듣고 반대했었다. 동희는 엄마의 성화에 효도차원에딱 한 번만 선을 보겠다고.. 그래도 맘에 드는 사람이 없다면 선배랑 결혼할 거라고 선전포고를 했었다.

불편한 자리를 겨우 파하며, 이젠 자연스럽게 선배에게 돌아갈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아무 말하지 않아도 편안한 그 익숙함에 숨통이 트였다.


동희가 선을 보고 돌아온 다음날 일요일 아침.. 일어날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이불속에서 뭉기적 거리며 오랜만에 늦잠의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문밖에서 나는 쿵 소리에 놀라 잠을 깼다. 누군가 유리 현관문을 쾅쾅 소리 내면서 두드렸다. 택배 아저씨인가? 도대체 무슨 택배길래 이렇게 땅이 다 꺼질듯한 소리가 난단 말인가.

동희는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잠옷바람으로 밖을 뛰쳐나갔다.

선배였다.

뚜벅이었던 선배가 새로 뽑은 듯 광이 나는 하얀 세단차를 몰고 와서, 동희 혼자 자취를 하고 있던 옥탑방 현관문을 요란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선배가 가지고 온 차 옆에 엄청나게 많은 가구와 가전제품들을 가득 실은 커다란 트럭이 좁은 골목길을 꽉 메우고 세워져 있었다. 살짝만 봐도 값이 나가는 새 가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야 선배? 도대체 이건 다 뭐구?"

"동희야, 놀랐지? 아니, 사실 너 좀 놀라게 해주고 싶었어! 평생 못 그래봤잖아. 남자가 돼서 자기 여자친구가 선을 보고 있는데, 바보처럼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심정이 어떤지 아니? 이젠 그럴 일 없을 거야. 다음 주에 대전 내려가서 어머니께 결혼 승낙받으러 가자. 어머님께 인사드리러 가는데 차 한 대는 있어야 할 거 아냐?"

"뭐라고? 선배 지금 제정신이야? 돈도 없으면서 갑자기 무슨 차야. 게다가 저 트럭은 또 뭐야? 웬 가구들이 이렇게 많아? 우리 당장 결혼이라도 하는 거야?"

"내가 너 대신 혼수도 미리 다 준비했어. 니 취향을 아니까 깜짝 선물로 해주고 싶었어. 동희야. 그동안 널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우리 결혼하자"

"선배, 갑자기 돈이 어디서 나서 이 많은 가구까지 다 사고, 저기 있는 건 가전제품인 거 같은데 집도 없는데 이런 거부터 사는 사람이 어딨어?"

"이미 한강뷰 새 아파트로 마련해 놨어. 아파트 들어갈 때는 너랑 꼭 같이 가고 싶어서 가구랑 가전제품 들어가는 날 너 데리러 온 거야. 지금 당장 가야 하니까 어서 준비해."

"이거 꿈인거지? 선배.. 그동안 왜 나한테 한마디도 이야기 안 했어?"

"집에서 그림만 그리느라 제대로 된 직장에 취직도 못하고 돈 안 되는 강사 생활만 하고 너한테 신세 지는 게 참 미안했는데.. 이제 안 그래도 돼. 사실 그동안 내가 집에만 있었던 건 아니야. 좀 오래 걸리긴 했지만, NFT로 내 그림을 팔게 되었어. 내가 캐릭터 하나를 계속 창작 중이었는데, 그게 얼마 전에 대박이 나 버렸어. 그 그림이 600억에 팔렸다고! 믿어지니? 우리 결혼할 집과 혼수품 살 돈 만 제하고, 다시 투자금으로 넣어뒀어"

"뭐? NFT라고? 나 얼마 전에 그 뉴스 본 적 있어. 그 뉴스에 나왔던 사람이 설마.. 선배라고? 정말이야?"

"너 그동안 고생 많았어. 어머니께도 알리고, 너네 집도 살림 좀 펴게 해주고 싶다. 그리고 이젠 너 진짜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거 같아."


동희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런데, 너무 기쁘면 눈물이 나오지 않나 보다.

나에게도 이런 행운이 올 수 있나?

마른 장작깨비 같은 유년시절의 건조한 일상들이 떠올랐다.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티던 그날들을 죄다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동희는 앞으로의 미래를 잠시나마 그려보았다.

한강뷰가 보이는 아파트, 최고급 가구들과 가전제품.. 그리고 멋진 선배..

나도 이제 이 구질구질한 옥탑방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는구나.

엄마는 그동안 결혼 반대하신 거 엄청 미안해하시겠지?

선배가 저렇게 실행력이 있고, 똑똑한 사람이란 걸 몰랐다니 동희도 마음 한구석에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사실 선배에게 말은 안 했지만, 불만이 많았다. 이제 다른 사람을 사귀는 건 불편하고, 익숙한 선배가 좋아서 어느 순간부터는 정으로 연인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선을 보는 것이 효도 차원이라고는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혹시도 모를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날 수 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도 있었던 것이다.

선배는 소심한 사람이었다. 늘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살았고, 자신의 불안한 현재 상황으로 자존감도 많이 낮아져서 동희의 표정 하나하나를 신경 쓰는 걱정 많고 예민한 사람이었다. 동희를 위해 희망찬 미래를 보여주기는 고사하고, 방에 틀어박혀 늘 고민만 하는 선배가 못마땅했지만, 평소에 선배에게 그런 내색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혼자 조용히 이런 일들을 하고 있었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오늘처럼 당당하고 멋진 선배를 보며, 동희의 미래도 함께 멋있게 펼쳐지는 느낌이 들었다.


띠리리링~~~ 시끄러운 벨소리에 선배는 중요한 전화라며 자리를 떴다.

동희는 이제는 뒷모습마저 멋져 보이는 선배를 바라보며 여전히 꿈인 듯 황홀한 기분을 느꼈다.

대기업에 취직했다는 이유로 가난한 선배를 몇 년 동안 밥 사 먹인 게 얼마야. 미술강사하느라 얼마 되지도 않는 월급으로 적금도 못 넣고 있는 거 뻔히 아는데 이렇게 갑자기 대박이 나다니.

사람은 역시 오래 살고 볼일이야..


띠리링~~ 띠리링~~

전화벨 소리가 계속 울려댔다.

'뭐 하는 거야.. 선배는 전화를 안 받고 뭐 해?'

근데.. 뭐지? 이 불안한 마음은?


시끄러운 전화벨 소리에 동희는 순간 눈을 떴다

그곳은 여전히 조그마한 옥탑방 동희의 자취방이었다.  

제길... 역시 꿈이었던 거야?

꿈이라면 좀 더 오래 꾸고 싶은데...

동희는 여전히 꿈에 홀린 듯 전화를 받았다.

선배였다.


"동희야.. 어제 선은 잘 보고 왔어?"

"어? 응... 뭐 잘 안 됐지, 될 리가 있어? 걱정하지 마"

"그래? 내가 빨리 잘 돼야 하는데... 많이 모자라서 미안해"

"뭐가.. 괜찮아.."

"점심때 그쪽으로 갈게."

"응... 알았어.. 근데, 혹시.. 선배... 그.. NFT... 알아?"

"뭐? BTS라고? 아니.. 뭐라 그랬어?"

"아씨... 됐어.. 모르면 모른다 해라 그냥"

"내가 또 몰라서 화났어? 내가 너보다 모르는 게 많잖아. 미안해.. 내가 좀 유식해야 하는데 말이야"

"아 짜증 나.. 맨날 미안하대. 자꾸 미안하다 소리 할 거면 끊어!"


동희는 누운 채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하얀색 전구 안으로 까만색 생명체들이 죽어 있었다. 늘 붙어 있었던 그 죽은 벌레들이 오늘따라 역겨워 머리를 옆으로 돌렸다. 벽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까맣게 손때가 묻은 누런 벽지가 보인다. 동희는 꿈속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아름다운 한강뷰의 환한 천장과 스테인리스의 새 부엌 가전들이 반질반질 윤기가 나는, 잠시 설레었던 꿈 속으로...

오늘따라 유난히 소심하고, 용기 없는 선배가 미워지는 동희의 마음을 아는지, 밤새 켜둔 선풍기가 펄럭펄럭 소리를 내는 것이 마치 화를 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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