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청 식구들의 캐나다 방문
친정 식구들이 우리 가족을 만나기 위해 캐나다 여행을 온 것은 2019년 12월 중순이었다. 2020년 3월.. 전 세계가 코로나로 인해 고통을 겪고 한순간에 일상생활이 통째로 바뀌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던 팬데믹 바로 직전이었다.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을 어느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기에, 팬데믹이 되기 전에 여유롭게 캐나다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이 도운 거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몇 달만 스케줄이 연기되었어도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를 상황이었기에 늘 감사한 마음이 든다.
나는 아이 셋을 낳고 2014년 캐나다로 이민을 오게 되었다. 서스캐처원주 리자이나에서 4년을 살고, 영주권을 받은 후에는 캘거리로 정착을 했는데 이사를 함과 동시에 내 집을 장만했었다. 그동안 친정식구들을 못 본 지도 5년이 흘렀다. 그런 즈음 친정 오빠가 한 달 휴가를 얻어 엄마를 모시고 캘거리로 우리 가족을 만나러 오겠다는 소식은 오기 전까지도 설렘으로 꿈꾸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당시 친정아버지께서는 연세가 많으셔서 도저히 비행기를 탈 자신이 없으시다고 해서 못 오셨는데, 2022년 8월에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어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때 함께 오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친정 엄마, 언니, 오빠 그리고 대학생 조카를 포함한 성인 4명과 십 대 조카 한 명 이렇게 다섯 명이 방문할 계획이었는데 우리 가족을 포함해서 열 명이 우리 집에서 3주를 지내야 했다. 단독 주택이긴 하지만 그다지 크지 않은 평수인 데다, 지하도 개발이 안된 상태라 방이 세 개뿐인데 불편하지 않을까 고민이 많았다. 그래도 어차피 남이 아닌 가족이라 바글바글 모여서 자더라도 어쨌든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명절이면 부모님 댁에 세 가족이 다 모일 때면 발 디딜 틈 없이 복잡해도 이곳저곳에 끼어서 자도 문제없었으니 말이다.
우선 큰 아들방에 친정오빠와 대학생 조카를 위해 침대를 내어주고, 화장실 딸린 안방에는 엄마와 언니, 나 이렇게 여자 셋이서 밤마다 수다 떠는 여성 전용방으로, 작은 아이들 방은 이층 침대여서, 십 대 청소년 두 명이 위층에, 아래층에는 둘째와 막내가 자기로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랑은 불편함을 마다하지 않고 우리 가족들을 위해 거실 소파로 잠자리를 양보해 주었다.
식탁은 워낙 널찍해서 10명이 동시에 식사하는데 문제는 없었고, 차도 두대여서 어디로 가든지 한꺼번에 움직일 수 있었다. 아침마다 10명의 식사를 호텔 조식처럼 서양식으로 준비를 해주었다. 친정 엄마는 내가 내린 커피를 그렇게나 맛있게 드셨고, 간단하게 끓인 수프, 코스코 빵과 소시지만으로도 모두들 호텔식 부럽지 않다고 해주시니, 10인분의 식사 준비여도 즐거웠다. 가족은 오랜만에 봐야 하는 걸까? ㅎㅎ 그냥 하루하루가 행복했던 것 같다.
우리 가족이 다 함께 여행을 한 것은 기억도 나지 않는 옛날 일이다. 내가 어렸을 때도 그렇게 자주 여행을 다니지는 못했는데, 바닷가나 계곡에서 함께 놀았던 기억은 많이 난다. 어른이 되어했던 여행이라 해봤자, 당일치기로 부모님을 모시고 오빠네, 언니네와 함께 캠핑장 가서 고기를 구워 먹는 정도가 전부였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우리 세 남매가 엄마를 모시고 아이들과 함께 밴프를 여행하고, 다운타운을 돌아다니는 일들이 내겐 너무나 새롭고 좋았다. 친정 식구들이 방문했을 때는 캘거리에 이사 온 지 1년밖에 안된 때여서, 나 역시 관광객모드로 캘거리 시내를 재미있게 구경하고 돌아다녔었다. 겨울여행이니만큼 눈구경도 실컷 하게 해 드리고, 야외 스케이트도 타고, 날씨도 춥지 않아서 여기저기 걸어 다니는 여행도 가능했다. 특히나, 크리스마스이브에는 2박 3일로 다 함께 밴프에 가서 설퍼산을 등반하고, 저녁엔 숙소에 딸려있는 노천 온천에 가서 몸을 녹이고, 숙소 거실에 있던 벽난로에 장작불을 피우며 와인을 마셨던 기억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다. 아이들이 지금까지도 그때 여행 이야기를 하며 좋았다고 말한다.
가족들 모두 내가 데리고 가는 곳마다 좋아해 주고, 어떤 음식을 대접해도 잘 먹어주었다. 10명이 함께 다니는 여행이니 갈등도 있을 법한데 한 번도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다. 우리 가족이 이렇게 여행메이트로써 잘 맞는 조합이었는지 미처 몰랐다. 그러니 더더욱 한국에서 오빠, 언니와 부모님 모시고 자주 여행을 가지 못했던 것이 후회가 된다.
행복하게 여행을 마무리해 가던 중 사건은 여행 막바지에 일어났다. 귀국 날을 며칠 앞두고, 나는 컬리지에서 8개월짜리 Bookkeeping 코스가 시작되는 날이어서 어쩔 수 없이 학교를 가야 했고, 남편은 2주 휴가를 끝내고 출근을 해야 했다. 아이들도 방학이 끝나고 학교가 시작되어 친정 식구들만 남게 되었다.
친정 오빠는 테슬라 마니아로 한국에 이미 본인의 테슬라 차량 출고를 앞두고 있던 터라, 캐나다에서 미리 렌트해서 운전해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우리가 없을 때는 테슬라를 렌트해서 다닐 계획을 미리 세워 놓았다.
오빠는 밴프를 한번 더 가고 싶다고 하며, 평소 가보고 싶었던 페이토 레이크를 다녀오겠다고 했다. 우리 없이 친정 식구들만 떠나는 게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워낙 운전도 잘하고, 듬직한 오빠라서 조심히 다녀오라고 당부만 하고 나는 학교 수업을 들으러 갔다.
그런데,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도착했는데도 가족들 소식이 감감무소식이었다. 산에 깊이 들어가면 데이터가 잘 터지지 않기에 그래서 일 거라 생각했지만, 조금씩 불안해졌다.
무슨 일 있냐고 몇 번이나 카톡으로 메시지를 보내도 답이 없다가 한참 후에야 "진짜 여행다운 여행 하고 있다"라는 언니의 짧은 답장이 왔다. 나는 그저 여행이 좋았나 보다 안심이 되어 일찍 돌아오라고 문자를 보내고 가족들을 기다렸다. 그런데 연락이 또 끊기고 저녁이 어둑어둑할 때까지도 소식이 없는 것이다.
맘 졸이고 있던 그 순간 "오늘 진짜 대박이었다. 라면 좀 끓여놔 줘 10분 뒤에 도착"이라는 언니의 메시지 한 통.. 순간 뭔가 일이 생긴 거라는 걸 직감한 나는 살짝 불안해졌다. 무슨 일이지?
나는 라면 다섯 개를 끓일 물을 먼저 올려놓고 기다렸다.
가족들이 드디어 집에 도착한 순간,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상기된 표정으로 우르르 들어오는데,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보통 일은 아니구나 싶었다. 그리고 그제야 다들 이야기보따리를 풀어주었다.
전날은 눈이 많이 왔었다. 오빠가 록키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즐겁게 드라이빙을 즐긴 것까지는 좋았다. 페이토 레이크를 가는 길이었다. 눈이 얼마나 쌓였는지 그 깊이를 미쳐 보지 못한 채 좁은 길목으로 들어서다 앞바퀴가 눈 속에 빠져버려 한순간에 꼼짝달싹 못하게 된 것이었다. (우리 가족은 평생 부산에만 산 토박이라 눈길 운전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차를 아무리 빼려고 해도 헛바퀴만 도는 건 당연한 노릇이다. 액셀을 밟으면 오히려 바퀴가 더 눈 속 깊숙이 파고들게 된다는 것은 캐나다에 오래 살게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상식이지만, 오빠가 살면서 이런 일을 겪었을 리는 없다.
게다가 데이터도 안 터지니 나와 전화 연결도 되지 않았고, 인적이 드물어서 지나가는 차들도 없었다. 가족 중에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사람 또한 없었다. 친정 엄마는 뒷좌석에 앉아서 어떻게 해야 하나 내내 불안해하고 계시고, 오빠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빨리 해결해야 했다. 언니도 뭔가 거들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일은 원래 한꺼번에 몰아치는 법. 엎친데 덮친 격으로,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 테슬라는 풀충전이 안된 상태였다. 전날 집에서 충전을 밤새 했어야 하는데 내가 다른 전기 코드로 착각하고 코드를 뽑아놓은 것이다. 추운 산속에서 일어난 일이니 날이 어두워지면 어쩌나 걱정도 되었다.
마침 지나가던 딜리버리 차량이 한대 있어서 급하게 세워서 물어보니, 견인 차량을 불러 줄 수 있다고 하는데 오빠가 외국 관광객인 것을 알고는 보험이 없으면 아주 비쌀 텐데라고 하며 일단 자기가 알아보겠다면서 자리를 떠났다. 그러나 돌아올 줄 알았던 그 차량은 돌아오지 않았고 한참을 기다렸지만 끝내 소식이 없었다.
그 순간.. 얼마나 무서웠을까... 남의 나라에 여행객으로 와서 눈 쌓인 산속에 고립되어 있는 그 기분이..
아마, 그때 언니는 일이 곧 해결되겠지라고 생각하고 내 메시지에 답을 한 것 같은데, 언니의 "여행다운 여행"이라는 게 이런 일이란 걸 나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그 순간 정말 천사 같은 두 분의 캐네디언을 만나게 되었다.
보통 캐네디언의 착한 심성을 일러 사마리아인이라는 말들을 많이 하는데, 진정한 사마리아인을 거기서 만난 것이다. 건장한 체격의 여성 두 분(몸 좋은 캐나다 여성은 웬만한 남자들보다 더 힘이 세다)이 산에서 차를 몰고 내려오다가 오빠차를 발견하고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직시한 후, 곧바로 차에서 내려서 오빠를 도와주었다. 그 여성들은 너무나도 능숙하게 운전석 차량의 바닥 시트를 빼서 빠진 바퀴 밑에 깐 후, 단번에 차를 눈 속에서 꺼내주었다. 엄마는 하지도 못하는 영어로 땡큐 땡큐를 연발하시고, 모두들 고마워서 어떻게든 보답해주고 싶어 했다. 정작 두 캐네디언 여성은 쿨하게 웃으면서 괜찮다고 인사하고 자리를 떠났다고.
하루종일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과자 부스러기만 먹었던지, 오자마자 내가 끓여준 라면에 몸도 마음도 풀려서 산에서 생고생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함께 따라가지 못한 내가 어찌나 미안하던지...
고생을 한 바가지 한 후 허겁지겁 라면을 먹는 가족들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갑자기 그 몰골이 애처로우면서 어찌나 우습던지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버렸다. 일이 다 해결되고 난 후의 안도감과 함께..
모두들 큰일 날 뻔했던 일들을 함께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그래도 여행하며 이야깃거리 하나 더 생겼다며 맥주 한잔을 더하며 밤을 새웠다.
특히, 두 캐네디언의 고마움을 끝없이 이야기한 것 같다. 그 두 분이 없었다면 어떤 일이 생겼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캐나다 살면서 고마운 사마리아인을 만나는 경우가 나도 꽤 있다. 그럴 땐 나도 누군가가 곤경에 처했을 때는 그런 사마리아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진짜 많이 하게 된다.
꼭 큰 곤경에 처하지 않더라도 여기 살게 되면, 주변의 한국 지인들과 많이 도우면서 살게 된다. 나 역시 도움도 많이 받아보았고, 누가 안 좋은 상황이 생기면 발 벗고 함께 도와주게 된다. 멀리 타국으로 이민을 온 사람들이라 그런지 그런 상황이 생기면 더 똘똘 뭉치게 되는 것 같다.
벌써 친정 식구들이 캐나다에 다녀간 지 5년째가 되었다.
너무 오래지 않아 여름에도 꼭 한번 여행 오게 되는 날을 손꼽아 소원해 본다.
엄마 연세가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 아직 캐나다의 옥색 레이크를 못 보여 드렸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