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작가의 "단 한 번의 삶"을 읽다가
김영하 작가의 에세이 신작이 나왔다. "단 한 번의 삶"
나는 김영하 작가의 소설보다 에세이를 더 좋아하는 팬이다. 그래서 오랜만에 나온 그의 신작이 더욱 반가웠고, 얼른 이북으로 다운로드해 읽기 시작했다. 빨리 읽어버리는 게 싫어서 아주 천천히 아껴가면서.
작가는 책에서 "인생은 일회용으로 주어진다"라고 표현한다. 두 번 세 번 살 수가 없다. 모두에게 한 번씩만 주어진 기회다. 이렇게 생각하면 왠지 경건해지기까지 하다.
책은 작가 자신의 삶을 그리기도 하지만, 부모님과의 관계, 그분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담백한 문체로 풀어낸다.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그의 이야기와 시선은 늘 독특하고 재미있다.
그중 그가 겪은 대학 동아리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읽다가 잠깐이지만 그때의 나를 회상하게 되었다.
3월의 대학교는 순진한 새내기들을 모집하기 위해 동아리방 경쟁이 치열해진다. 대학 신입생이던 91년, 나는 동아리 활동에 대한 큰 꿈을 안고 캠퍼스를 배회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게 많았던, 여고를 갓 졸업한 새내기 대학생.
잠깐 나의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보면, 내 옆에는 늘 통기타가 있었고, 집에는 가요 대백과사전이라는 성경보다 굵은 노래 악보책이 가보처럼 몇 권씩 꽂혀 있었다.
그 당시는 인터넷이란 것은 없을 때였으니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려면, 코드와 주법, 가사까지 있는 가요책을 사야 했다. 새로운 곡이 추가되면 또 새 책을 사러 서점에 들르는 게 너무 설레었던 시절이었다. 그 가요책에 있는 곡들을 처음부터 하나하나 도장 깨기 하듯이 언니와 함께 부르면서 기타 실력을 키웠다.
내가 고2 때인 1989년에 언니는 대학을 들어갔고, 그때는 87년 민주화운동의 열기가 아직 가시지 않아 대학 내의 운동권 활동이 활발하던 때였다. 언니는 학교 방송부에서 방송을 하면서 1학년때는 꽤나 열성적으로 운동권 활동을 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 늘 부르던 민중가요집 팸플릿 등을 자주 집으로 가져와서 나에게 기타로 반주를 쳐달라고 하고 민중가요를 불렀었다. 나는 언니 덕분에 의도치 않게 대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민중가요를 거의 다 꿰찬 고등학생이 돼버렸다.
다시 3월의 어느 날, 대학에서 동아리 회관을 배회 중이던 신입생인 나로 돌아가서.
그날은 친구 2명과 함께 작정하고 동아리방 순회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나는 원래 노래하는 걸 좋아했기에 통기타 서클에 들어가고 싶어 했고, 친구들은 아직 하고 싶은 걸 못 정한 상태였다. 신입생 환영회 행사를 할 때 "안단테"라는 통기타 동아리 선배들이 공연도 잘하고 실력이 좋아서 제일 먼저 가보고 싶었다. 동아리 건물 꼭대기층에 있던 안단테를 찾아가던 중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곳을 지나쳐서 옆방을 먼저 들어가게 되었다. 우연히 들린 기타 소리 때문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옆 방은 "소슬 울림"이라는 민중가요를 부르는 동아리방이었다.
소슬 울림 동아리 선배들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새내기들의 방문에 엄청난 관심과 신경을 써주시며 민중가요란 이런 거야 라며 기타를 치며 노래 몇 곡을 들려주셨다. 키보드 반주하시는 선배까지 후배맞이를 위해 힘을 보태주고 계셨다. 그 당시 불렀던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 등이었다. 거의 내가 아는 곡들이라 선배들을 따라 부르고 있으니, "이 곡을 아니?" 하며 놀라워했다. 기타 치면서 언니랑 많이 불러봐서 안다고 했더니 기타까지 쳐보라며 건네주셨다. 언니와 평소에 그러고 놀 듯이 내가 기타를 치면 선배들이 노래를 불렀다. 운동권 선배들은 데모 잘 할거 같은 후배들을 어떻게든 데려 오고 싶어 했을 테고, 나는 거기에 너무나 적합한 인물이었던 거다. 그렇게 선배들의 눈에 들게 된 나는 동아리방 순회를 하겠다는 처음 생각은 깡그리 잊어버린 채 내 마음을 처음 내준 그곳에 4년간 뼈를 묻고 말았다. 그 옆방 통기타 서클에는 아예 들어가 보지도 못한 채.
87년 6월 항쟁 이후 본격적으로 불붙은 학생운동은 내가 대학생활을 시작한 1991년에 가장 뜨겁게 타올랐고, 그 해는 학생운동의 정점이자 격정기의 시기였다. 시대가 그랬으니 어쩔 수 없었던 것도 있었고, 뭔가에 꽂히면 열심히 하는 성격인 내가 공부가 아닌 학생 운동에 열심이었으니 당연히 성적은 좋을 리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과 친구들이 목표로 해서 들어갔던 병원에는 근처도 가보지 못했다. (보건행정학과라는 특성상 병원에 많이 취업했다.) 그리고는 졸업 후의 인생에 대해 준비나 고민도 전혀 없이 졸업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지만, 그 시절 운동권에게 공부는 사치였고, 나의 미래를 따로 준비하는 건 이기적인 일같이 여겨져 마치 그들을 배반하는 부르주아처럼 보이던 시대였다.
그때 그 시절 선배들은 다 무엇을 하고 있을까? 갑자기 사회로 나와 어떻게든 현실에 부응하며 살아가려 발버둥 치는 선배도, 후배들에게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며 갑자기 유학을 가버리던 선배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운동권에 몸담고 있는 선배 모두, 어딘가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며 잘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도 그러하니 말이다. 모두 각자의 삶이고, 인생인 거다.
그때는 누구보다 치열했고, 무엇보다 진심이었으니까 후회는 없다.
가끔 그때 내가 안단테를 먼저 들어갔으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까 생각해보곤 한다. 통기타 서클에서 민중이나 투쟁 같은 거창한 구호 대신, 사랑과 이별을 노래하는 말랑말랑한 가요나 팝송을 부르며 대학가요제를 준비하고 있을지 누가 알겠나? (내가 2학년 때, 실제로 안단테 출신팀이 대학가요제에 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 인생은 일회용. 한 번밖에 살지 못하는 20대의 대학생활을 치열하게 길 위에서 싸우는 운동권 학생으로 보냈다. 뭔가 다른 인생을 생각해 보아도 생각할 수 없다. 다시 돌아가도 그때의 나로 살아갈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도 만약 20대의 나로 돌아간다면 그때보다 훨씬 재미있고, 풋풋한 캠퍼스 생활을 누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음악활동도 좀 더 다양하게 경험하고 싶고, 하고 싶은 공부도 실컷 하고, 50이 넘어서야 배우고 있는 테니스도 젊었던 그때 잘 배워두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학생 운동이 아니라 진짜 운동을 더 많이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ㅎㅎ 학생회관에서 수업 빼먹고 땡땡이치며 선배들과 나누던 잡담들 대신 도서관에서 책을 좀 더 많이 쌓아두고 읽었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든다.
사실, 지금에야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고 있는 중이다. 내가 살아갈 단 한 번의 삶인데, 20대의 대학 캠퍼스에서는 못했지만, 하고 싶은 것을 지금이라도 하고 있으니, 이 또한 충분히 행복한 삶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그 모든 지나간 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이야기였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여전히, 매일 조금씩 쓰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