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비에 옷 젖듯 익숙해진다는 것에 대하여
우리 가족은 매년 캐나다 데이에 캠핑을 간다. 올해도 어김없이 2박 3일 캠핑장을 미리 예약해 놓았는데, 날씨 앱을 확인해 보니 3일 내내 비 예보가 있어서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출발하는 날에 햇빛이 쨍쨍 내리쬐고, 맑은 날씨여서 마음이 놓였다. 텐트를 치고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로 덕분에 캠핑 첫날을 아주 평화롭게 잘 보냈다.
둘째 날은 점심 먹고 투잭 레이크에서 보트를 타며, 레이크에 쏟아지는 여름 햇살을 맞으며 최고의 날씨를 만끽했다. 저녁 전엔 가까운 미네왕카 레이크까지 들러, 하이킹 트레일 입구까지 걸어 보았다. 해안을 따라 걷다 마주하는 깎아지른 절벽과 옥빛 호수의 절묘한 조화는 볼 때마다 한 폭의 그림 같다.
저녁때가 다 되긴 했지만 이왕 온 김에 하이킹 트레일을 1km 정도만 걸어볼까 싶어 오솔길로 접어들었는데, 갑자기 비가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좁고 미끄러운 길은 샌들을 신은 아이들에게 무리일 거 같아 곧장 돌아 나왔다. 주차장까지는 15분 남짓. 옷이 흠뻑 젖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금세 날이 어두워질 거 같아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래도 오랜만에 여름비를 맞는 기분이 그리 나쁘진 않다. 아이들은 오히려 더 즐거워했다.
저녁 준비 중에는 다행히 비가 멈췄다. 흐린 날씨에 딱 어울리는 홍합탕을 한가득 끓이고, 홍합을 까먹고 남은 국물에 야채와 육수를 더 넣어 칼국수를 만들었다. 남편은 이번 캠핑 요리 중 홍합 칼국수가 가장 맛있었다고 말한다. 식사 후, 타프 밑에 도란도란 앉아 있는데 누군가 마일즈 데이비스의 재즈 연주곡을 틀었다. 디저트로 아이들에게 호떡을 구워주고, 어른들은 와인에 크래커, 부르상(Boursin) 크림치즈까지 테이블에 세팅하고 나니 다시 후드득 비가 내린다. 이런 날 타프 아래 앉아 있으면,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와 멀리서 타오르는 장작불의 타닥거림이 화음처럼 어우러진다. 그 위로 재즈 음악이 흐르고, 와인 한잔까지 더해지니, 그 순간만큼은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이런 게 캠핑의 낭만 아닌가..
캠핑장에서의 잠깐의 비가 오히려 반가웠던 하루였다.
다음날 집에 돌아와 짐을 정리하고, 간단히 한 끼를 해결한 뒤, 밀린 빨래를 돌리고 나니 밖에서 쏴쏴~ 하는 소리를 내며 굵은 비가 내린다. 막내는 벌써 동네 아이들과 농구하러 나간 상태였다. 빗소리가 점점 거세지는데 왜 아직도 안 들어오나 싶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이들은 비가 오는 것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신나게 길거리 농구를 하고 있었다. 아니, 아까보다 더 행복하게 웃으며, 비가 쏟아져 머리랑 옷이 다 젖었는데도 멈출 기색이 없다. 그렇게 30분은 더 빗속에서 농구를 하고 환한 얼굴로 들어오는 막내다.
맞아.. 우리 아이들은 원래 비를 좋아했었지.. 비가 오면 밖으로 달려 나가 일부러 비를 맞던 아이들..
참 신기하다.
생각해 보니 이민 초반의 나는 한국 정서를 그대로 가지고 있던 터라 지금의 나와 참 많이 달랐다.
캐나다에 이민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인 6월의 어느 날이었다. 타운하우스에 짐은 풀었지만, 아직 차가 없었다. 남편이 일하러 간 사이에 비어있는 냉장고를 채우기 위해 아이들과 마트를 가기로 했다. 25개월 된 막내는 유모차에 태우고, 첫째와 둘째 아들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우리 집 앞에는 축구장만 한 잔디밭이 있었고, 그 잔디밭을 쭉 돌아 오솔길을 따라가면 주택가가 이어진다. 주택이 끝날 무렵, 넓은 주차장과 함께 몇몇 상점이 모여 있는 몰이 나오고, 그 안에 Walmart가 있었다. 걸어서 가기엔 꽤 먼 거리였지만, 대중교통이 편리하지 않아 그냥 산책 삼아 걷기로 했다. 필요한 물건을 사고, 채소와 고기를 담아 나오는 길. 아이들은 화창한 날씨와 잔디밭의 풍경에 들떠 있었다.
한참을 걸어 우리 집 근처 잔디 공원이 가까워질 무렵, 갑자기 그 맑던 하늘에서 장대비가 쏟아졌다. 주택과 잔디밭 밖에 보이지 않는 거리 한복판에서 말이다. 한국 같으면 어디든 상점 하나쯤은 있을 법한데, 여긴 정말 아무것도 없다.
유모차에 탄 동욱이에게 얼른 비닐 커버를 씌워주고, 두 아이와 나는 속수무책으로 쏟아지는 비를 피할 길 없이 그대로 비를 맞으며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새로 산 탐스 신발에서는 푹푹 물소리가 났다.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물줄기가 머리에서 계속 흘러내렸고, 나는 정신없이 유모차를 밀며 빗속을 헤쳐 나갔다. 비를 두려워하는 내가 이상한 건지, 잠깐 피할 처마 하나 없는 이 나라가 이상한 건지, 마음이 싱숭생숭 혼란스러운 하루였다.
집에 돌아오니 다들 꼴이 말이 아니었다. 아이들을 얼른 욕조에 담가 따뜻한 물로 씻기고, 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젖은 옷들을 세탁기에 돌렸다. 그날 얼마나 정신이 없었던지 내 탐스 신발까지 넣어버려 그 뒤로 신발을 못쓰게 되었다. 이제와 생각하면, 비가 뭐라고 그렇게 당황했을까 싶다.
한국에서 살 때는 비가 오면 정말 한 방울이라도 맞을까 봐 난리가 났다. 잠깐 후드득 하다 마는 비에도 건물 안으로 피신해야 안심이 됐고, 흐린 날에는 꼭 접이식 우산이라도 가방에 챙겨 넣었다. 혹여 우산 없이 비 내리는 거리를 걷게 되면, 그보다 초라해 보이는 일도 없다고 느끼며 허둥댔다.
나는 비 맞는 게 왜 그렇게 두려웠을까? 산성비 맞으면 안 된다는 뉴스들, 비 맞으면 큰일 날 것처럼 하굣길 학교 앞에서 우산을 챙겨 기다리는 엄마들.. 그런 문화 때문에 나도 모르게 잠재의식 속에 그런 이미지가 강하게 스며들어 있어서였을까..
지금은 그다지 비 맞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나를 보면 신기하기까지 하다.
이민 생활도 비슷한 것 같다.
처음엔 불편하고 낯설고, 때로는 대비할 수 없는 순간의 연속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피하려 애쓰기보다 그 속을 천천히 지나가는 법을 배우게 된다.
생각해 보면, 이제 비를 무서워하지 않게 된 건 캐나다에 살며 내가 바뀐 수많은 것 중 하나일 뿐이다.
이민 초기에 느꼈던 낯섦과 불편함은 이제 익숙함으로 바뀌었고,
흐린 날이면 우산부터 챙기던 나는 이젠 그냥 레인 재킷 하나 걸치고 걷는 사람이 되었다.
비에 젖는다고, 길이 조금 미끄럽다고 무언가를 미루지 않게 된 것도 이곳에서 배운 태도다.
빗속에서도 아이들은 놀고, 어른들은 개들과의 산책을 멈추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조금씩 달라졌나 보다.
비를 두려워하던 나에서,
비 속에서도 여유를 느끼는 나로.
어쩌면 캐나다에서 살아간다는 건
예상치 못한 날씨처럼,
예상치 못한 일들과도 그냥 함께 걷는 법을 배우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캐나다에서 내가 배운 가장 큰 변화는 거창한 깨달음이 아니라
가랑비에 옷 젖듯 천천히, 기다림을 알게 되었고, 여유 있는 사람으로 변한 것이다.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날씨처럼 변하는 삶 속에서도
내가 나를 덜 탓하고, 조금은 너그러워졌다는 사실이다.
- 비 오는 캠핑장에서 비를 바라보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