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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땡스기빙 식탁

by 고들정희

매년 10월, 캐나다는 미국보다 한 달 먼저 땡스기빙데이를 맞는다. 겨울이 일찍 오는 나라답게 명절도 서둘러 찾아오는 셈이다. 시기로 보자면 한국의 추석과 비슷해서인지, 내겐 여전히 추석 같은 명절이다.


이민 초반엔 추석이 오면 전을 부치고, 나물을 무쳐 아이들과 소소한 명절상을 차리곤 했다. 한국에서는 "며느리의 의무"처럼 느껴졌던 일을, 아무도 시키지 않는데 자진해서 하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아이들에게 '추석'이라는 단어를 낯설지 않게 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세월이 흐르고 아이들이 자라면서, 자연스레 땡스기빙 디너에 무게를 실어갔다. 이젠 캐나다에서 살아가는 시간이 훨씬 길어지고 캐나다 사회에 더 깊숙이 들어가고 있는 아이들에게, 그들의 문화도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단 한 번도 캐다나인 가정의 땡스기빙에 초대된 적이 없어서 실제로 어떻게 보내는지, 어떤 음식을 먹는지 본 적은 없지만, 간접적으로 보았던 대로 따라 하며 나름의 우리식 디너를 차렸다.


칠면조를 굽고, 그레이비소스를 만들고, 몇 가지 구운 야채로 가니쉬를 내고, 매시드 포테이토와 크렌베리 소스를 곁들인다. (크리스마스 디너와 크게 다른 건 없는 듯하다. 한국 명절에 비하면 소소한 메뉴이긴 하지만, 이 정도만 해도 우리에겐 아주 풍성한 땡스기빙디너가 된다.)

직접 만든 펌킨 파이도 디저트로 빠질 수 없다. 휘핑크림을 파이 조각에 살짝 올려 한입 떠먹으면 그날의 디너는 만족스럽게 마무리된다.


매년 해왔던 우리 집 전통이지만, 올해는 좀 달랐다. 퍼피를 키우다 보니 내 에너지가 바닥나 있었고, 손가락 통증도 점점 심해져서 이번 땡스기빙 디너는 그냥 넘기고 싶었다. 게다가 터키는 최소 5일 전에는 장을 봐서 미리 해동해야 하는데, 그럴 여력도 없었다.

그래서 남편에게 "올해 땡스기빙 디너는 그냥 넘어가자"라고 말했다.

남편은 "자기 손도 아프잖아. 그냥 올해는 쉬어"라고 했다.


연휴가 시작되기 며칠 전, 첫째 준혁이가 물었다.


"이번 땡스기빙 디너는 언제 하세요?"


늘 자기 생일파티나 크리스마스 디너 일정 정도만 물어보던 녀석이었는데, 이번엔 땡스기빙 디너를 챙기는 걸 보고 웬일인가 싶었다.


"왜? 무슨 약속 있어?"

"코워커들이 같이 땡스기빙 파티를 하자고 해서요"

"그래? 그럼, 잘됐네. 엄만 이번엔 땡스기빙 디너는 안 할 거 같으니까 맘 편히 다녀와"


그렇게 토요일, 남편과 오랜만에 쇼핑을 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저녁 무렵 막내 동욱이가 또 묻는다.


"그런데, 우리 땡스기빙 디너는 언제 해요?"


아뿔싸... 아이들이 말을 안 했지만, 매년 해오던 땡스기빙 디너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늘 엄마가 알아서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 올해도 역시 디너를 차려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동욱아, 이번엔 엄마 손도 많이 아프고, 데이지도 있어서 좀 힘들 것 같아."

"아... 오케이! 괜찮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얼굴을 보니 내심 실망한 표정이었다.


"근데 있잖아.. 일요일에라도 할까? 오늘은 승환이가 일을 하는 날이라 어차피 안 되겠더라. 준혁이 형아는 월요일에 약속 있다고 하니까 일요일에 하면 다 모일 수 있겠다. 칠면조는 지금 사면 해동할 시간이 없어, 그냥 치킨으로 해야 할거 같아. 육즙으로 그레이비소스도 같이 만들어줄게"

"네네!!! 해주세요! 매시드 포테이토랑 크렌베리 소스도 꼭요!"


그제야 동욱이 얼굴이 환해졌다.

이런... 안 하고 넘겼으면 어쩔 뻔..


일요일 아침, 코스코를 가서 칠면조 대신 닭과 필요한 야채 그리고 크렌베리도 한봉 사 왔다. 올해는 닭으로 요리하게 되어 터키를 구울 때보다는 훨씬 간단하게 느껴지지만, 사실 시간이 짧게 걸린다는 점 외에는 과정은 똑같다.


<펌킨 파이 준비>

미리 펌킨 파이를 만들어 두는 게 좋다. 파이 도우를 만들 시간이 없을 때는 냉동 파이 쉘을 사용해도 된다. 필링만 넣고 바로 구울 수 있으니 시간이 절약된다. 물론 직접 만든 파이 크러스트에 비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만족스럽다. 마침 냉동실에 사놓은 파이쉘이 남아 있어서 펌킨 파이용 필링만 사서 오븐에 구워 식혀 두었다. 디저트로 먹을 때 휘핑크림이나 아이스크림을 올리면 완벽한 마무리가 된다.


<허브버터 닭과 그레이비 소스 만들기>

먼저 닭에 바를 허브버터를 만든다. 타임 로즈메리 등을 잘게 다져 상온 버터에 섞고, 소금, 후추로 간한다.

허브버터를 닭가슴 껍질 안쪽에 충분히 바르고, 남은 버터는 겉에도 골고루 바른다.

등 쪽이 위로 오게 놓고 180도에서 1시간 굽는다. 한 시간 뒤 한번 뒤집어 준다. 이건 제이미 올리버가 알려줬던 레시피인데 껍질이 바삭하고 살은 보드랍게 구워지는 팁이다.

중간에 닭을 뒤집을 때 팬에 물을 보충하고, 양파, 당근, 샐러리를 넣어 1시간 정도 더 굽는다.

닭이 다 익으면 팬에 남은 육즙과 야채를 냄비에 옮기고, 밀가루와 치킨 브로스를 넣어 걸쭉한 그레이비소스를 만든다.


<크렌베리 소스 만들기>

닭이 익는 동안에는 크렌베리 소스를 미리 만들어 둔다.

크렌베리 2컵, 설탕 1컵, 오렌지 주스 1컵을 냄비에 넣고 끓인다. 약 10분 정도면 크렌베리 껍질이 톡톡 터지고, 어느 정도 걸쭉해졌다 싶으면 불을 끄면 된다.

치킨과 함께 먹을 때 그레이비소스와 크렌베리의 새콤 달콤한 소스가 어우러져서 맛을 더한다.


<매시드 포테이토와 가니쉬>

아이들이 특히 좋아하는 매쉬드 포테이토는 빠질 수 없다. 감자를 푹 삶아 버터, 우유, 소금, 후추로 부드럽게 으깬다. 미리 만들어 식어버리면 맛이 없으니까, 중탕으로 데워서 상에 내기 전까지 따뜻함을 유지한다. 이건 타샤 튜더 할머니의 팁이다.

올해는 버터 호박과 브뤼셀 스프라우트를 구워 곁들였다. 소금, 후추, 올리브 오일을 뿌리고 오븐 아래칸에 넣어 20분 정도 굽는다.



땡스 기빙 저녁, 다섯 식구가 빙 둘러앉아 잘라 놓은 닭고기와 소스를 곁들인 매시드 포테이토, 구운 야채를 맛있게 먹으며 땡스기빙을 축하한다.

남편이 말했다.

"올해 그냥 넘어갔으면 아쉬울뻔했네. 치킨이 너무 맛있게 구워졌어"


아내를 위하느라 하지 말라고 말렸던 남편도 사실은 내심 바라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늘 집에서 요리를 하지만, 수준급의 실력은 아니다. 요리 부심이 넘쳐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이렇게 늘 요리를 하는 이유는, 가게에서 사 온 음식과 달리 시간을 들여 무언가를 정성껏 만들어 내는 기쁨에 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손끝에서 만들어진 음식에는 그 과정이 담기고, 요리할 때 생기는 집중력과 성취감은 돈으로는 살 수 없는 확실한 만족감을 준다.


어릴 때 명절이 다가오면 엄마가 며칠 전부터 시장을 다녀오고, 부엌에서 재료를 손질하는 모습을 자주 봤다. 콩나물 다듬기는 늘 언니와 내가 도맡아 했고, 전 부칠 때 옆에 앉아 기름 묻혀가며 하나씩 주워 먹던 맛이 잊히지 않는다. 단순히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본 것뿐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안에 많은 배움이 있었다. 정해진 시간에 맞춰 준비하고, 여러 가지 음식을 동시에 챙기면서도 늘 가족들이 맛있게 먹을 걸 먼저 생각하던 마음. 그게 요리를 넘어서 '돌봄'과 '책임'의 모습이었다.

지금 내가 아이들에게 직접 음식을 만들어 주는 것도, 아마 그때 본 엄마의 모습이 몸에 남아 있어서일 것이다. 아이들이 요리를 유심히 보지 않아도, 언젠간 그 기억이 남을 거라 믿는다.


가족들이 내가 차린 땡스기빙 디너를 맛있게 먹는 그 모습이 누가 보기엔 별거 아닐지 몰라도,

우리에겐 전통이 되고, 추억이 되며, 또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올해 땡스기빙엔 닭을 구웠으니, 크리스마스엔 제대로 칠면조를 구워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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