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부의 아들
그의 친구들 네 명은 자기 아버지가 현재 광부들이다. 그들 모두는 태백시 철암동에 있는 하천 위 까치발집에서 세 들어 살고 있다. 그들은 가난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철부지 아이로서 그냥 재미있게 지내고 있다. 이제 초등학교에 갓 들어왔으니 자기들이 사는 산천이 세상 그 자체인 것으로 알고 있다. 부모들이 어럽게 돈을 버는 것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그런데는 관심이 가지 않는다. 오직 천진난만하게 세상을 밝게 보며 장난도 치고 놀기에만 바쁘다. 그들의 아버지들은 모두 다 외지에서 이곳으로 흘러들어왔다는 것조차도 모르고 지금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무슨 고민도 없고 그냥 하루하루 친구들을 만나 장난치는 게 즐겁기만 하다.
세월은 흘러 그들은 이제 태백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들이 먼저 나눈 이야기이다.
“수건아, 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갈 것이제. 그리고 명호 너는 당연히 우리 중에서 제일 살기가 좋고 공부도 잘하니 대학에 갈 것이고, 영태는 좀 어떻노,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고 인생을 고민만 하던데 말이야.”하고 제민이가 불쑥 말을 끄집어낸다.
“나는 별로 대학을 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냥 어머니 모시고 살고 싶다. 아버지가 안 계시니 어떻게 등록금을 마련할 수가 있겠나. 우리 아버지가 탄광 매몰사고로 돌아가신 후 안전하게 살아가는 게 최고라고 느낀다.”하고 수건이가 말한다.
“나는 우리 아버지가 의사가 되어보라고 하데. 그 의사 되기에 너무 어려운데 무슨 큰 욕심을 내시는지 모르겠데. 아마 할아버지가 탄광일 하면서 진폐증으로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신 게 마음에 걸려서 그런가 생각이 되데.”하고 명호가 말한다.
“나는 집에서 내가 대학을 가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고 하네. 내가 생각해도 대학 가는 게 어려울 것 같아, 나는 그냥 영화배우가 되고 싶다. 나의 아버지 인생을 닮은 영화배우 말이야. 꼭 대학을 갈 필요가 있을까.”하고 형제들이 많아 형편이 어려운 제민이가 말한다.
“나는 부모님이 공부만 잘하면 땡빚을 내어서라도 보내준다 카네. 나는 시골의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고 싶다. 내가 심훈의 상록수를 읽었는데 그분을 따르고 싶어진다. 집에서는 공대에 가서
기술을 배우라고 하는데 나는 기술자의 소질이 전혀 없어 그 말은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렸다.”하고 마지막으로 영태가 말하였다.
이와 같이 네 명의 친구들은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자신들의 진로에 대해 진솔하기도 농담 같기도 한 포부를 말하고 있다.
그 네 명 친구들의 부모들 고향은 서로 달랐다. 수건이는 할아버지가 동해에서 어부를 하다가 자식들을 데리고 태백으로 왔었고, 명호는 충청도 소백산 자락의 화전민촌에서 부모들이 이곳으로 왔다. 제민이는 경상도 소백산 풍기 근처에서 대대로 심마니를 하던 집안이었고, 영태 가족은 봉화 춘양에서 머슴살이가 싫어 큰돈을 벌어보려고 탄광으로 왔다. 그들이 태백으로 온 이유는 탄광에서 돈벌이 때문이다. 인생의 막장이라고 하는 탄광에 취직하면 그 위험에 비례하여 큰돈을 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강원도에는 막장 외에도 떼꾼이라는 강물 위의 막장도 있으니 광부와 떼꾼은 배운 것이 없는 사람들이 목숨을 담보로 하여 모여드는 직업이다.
그 친구 네 명은 각자가 갈길을 정하여 공부도 하고 놀기도 하였다. 수건이는 아마 탄광매몰사고로 구조를 못해 아버지를 잃었기에 소방관이 되고 싶다는 뜻을 은연중에 내비치었다. 그 길은 경찰과 같은 권력을 갖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기 아버지처럼 불과 몇 미터 남겨놓고 구조를 못한 걸 안타까워하였기에 그런 마음을 가질만하다. 이렇게 하여 네 명의 진로는 정해졌지만 과연 대학에 합격할 수가 있을지 의문이다. 제일 공부를 잘하는 명호가 의사가 되고 싶다고 하였으니 과연 성적이 나올지 모르고, 공부를 하지 않고 놀기를 좋아하는 수건이는 어떻게 진학을 할지 염려가 된다. 교사가 되겠다는 영태나 배우가 되겠다는 제민이는 그런대로 안정권이니까 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특히 배우가 되겠다는 제민이는 성적보다는 자질이 중요한 평가요소이니 그런 점에서는 경쟁력이 충분히 있었다.
제민이는 초등학교 때부터 태백시내로 나가 영화를 자주 보곤 하고 한 번씩 친구들 앞에서 자연스레 연기연습도 하였으니 걱정할 것은 없었다. 아마 종합대학교가 아닌 예술전문대학에 들어가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경험에서 비롯한 연기가 자연스럽고 호소력이 있으니 탄광광부들의 애환 어린 이야기에 대한 연기를 하는 게 점수를 따기가 쉽다고 여겼다. 그는 실기시험이 당락의 결정적인 요소이니까, 친구들과 자주 만나 연기력을 키워나갔다. 학교 공부는 기본만 하고 오직 연기연습에 몰입하였다. 다른 친구들은 대학교 입학시험을 위한 공부에 정신이 없었으나 제민이는 산에 가서 발성 연습도 하고 거울도 보고 인상을 쓰는 다양한 연기연습을 하였다. 그는 서라벌예술대학에 원서를 내었고 한 달 후면 면접과 연기력 테스트가 있다.
어느 날 제민이는 친구들을 불러서 도움을 청한다.
“야, 친구들아. 내가 오늘 연기연습을 좀 하려는데 도와줄 수 있겠제. 얼마 않으면 연기력 테스트가 있는데, 인상 연기, 발성 연기 등 여러 가지를 본다고 입시요강에 들어 있더라. 그냥 내가 어떤 상황을 던질 테니 그에 맞게 자연스럽게 몸짓과 말로써 상대해 주면 된다. 알긋제.”
“그야 당연히 도와주어야지. 끝나고 나서 팥빙수 하나씩 돌리면 된다. 그냥 대가 없이 하면 성의가 안 들어간다. 엑스트라에게 주는 출연료라 생각하고 용돈 모아둔 것 한번 써봐라.”하고 역시 팥빙수가 먹고 싶다고 늘 말하던 수건이가 먼저 반응한다.
“그야 지당한 이야기 이제. 우리 친구들이 안 도와주면 누가 하겠노. 걱정 말고 여기 마을 공터에서 한번 해보지 그래. 그런데 주제를 무엇으로 하려고 하노. 그것도 재미있어야 우리도 즐겁고 대학 심사위원도 관심을 가질게 아닌가.”하고 명호가 경상도 사투리가 배인 말을 쓰며 말한다.
“내 생각에는 우리들 집안이 모두 광부출신이니까. 탄광에서 매몰된 상황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장면을 연기하면 어떨까. 그렇게 하는 게 다른 응시자들보다 차별화도 되고 제민이 너가 자신 있게 연기할 수가 안 있겠나.”하고 역시 세밀하고 한 번씩 소설 같은 이야기를 하는 영태가 말한다.
“야호, 드디어 내가 생각하던 시나리오가 어느 정도 완성되었네. 탄광에서 매몰되어 구조를 기다리며 희망을 잃지 않고 기다리는 장면의 연기를 해보자. 그것도 어떤 때는 비장하게 한 번씩은 웃음거리도 들어가고 하는 갇힌 광부의 내면까지 들여다보는 상황극이 되면 좋겠다.”하고 제민이가 친구들의 동조에 만족한다.
드디어 그들은 탄광촌의 어느 무너져 가는 흙집으로 기어들어가서 그 상황에 맞게 연기를 하기로 하였다. 먼저 소품으로 집에서 아버지들이 쓰던 헌 안전모와 랜턴은 물론이고 구조밧줄과 생수통을 준비하였다.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제민이 집에서 먹다가 남은 커피믹스 박스를 가져왔다. 그 소품들은 어두운 흙집 골방에 진열되고 그들은 석탄재를 가져와서 얼굴에 칠했다. 빛이 없는 갱내를 연출하기 위해 흙집의 창문을 검은 비닐로 막았다. 이렇게 하여 준비가 다되니 각자의 배역을 맡겼다. 제일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제민이는 작업조장으로 나머지는 인부로 정했다. 드디어 연출 사인이 떨어지자 상황이 전개된다. 그들 네 명은 지하 500미터의 탄광 갱내에 매몰사고로 고립된 상황이다.
“이보게들 작업반장으로서 한마디 하겠네. 서로 얼굴도 안 보이니 말로써 전달하겠네. 지금 우리는 깊은 곳 갱도에 매몰되어 있어 구조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네. 일단 마음을 최대한 진정시키고 살아나가야 한다는 믿음을 가져야 하네. 지금 바로 천정에서도 계속해서 탄가루가 쏟아지고 있지를 않은가. 구조대가 오기까지 희망을 가지고 끈기 있게 기다리는 것이 유일한 방도이네.”
“먼저 식수가 제일 중요하니 갖고 있는 생수통의 물을 최대한 아껴 마시고, 지금 수맥을 찾아서 시커먼 물이나마 빈 페트병에 담아 두세. 그것을 오래 가라 앉히면 먹을 수 있을 것이네. 다음으로 우선 자신의 힘을 소모하지 말고 최소한으로만 움직이게. 내가 짐작하건대 최소 열흘은 걸릴 거고 최악의 경우 한 달이 될지도 모르니까 말일세. 말도 되도록이면 줄이고 몸의 체력을 아껴야 하네.”하고 작업조장역을 맡은 제민이가 엄숙하면서도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한다.
“아이구, 참으로 우리 집안은 왜 이렇단 말인고. 우리 아버지가 십 년 전에 매몰사고로 돌아가셨는데 나까지 그런 운명에 처했으니 하늘도 무심하네. 늙으신 우리 어머니가 절대로 광부의 길로 가지 말라고 하였는데 이제 나도 죽게 생겼네.”하고 아버지를 잃은 수건이가 애절하게 연기한다.
“아 그 참, 지금 울고 있을 때가 아니네. 당장 물길을 찾아보시요들. 물이 떨어지면 며칠을 못 버티니 오직 물을 찾는 게 살길이요. 물이 없으면 자신의 소변도 마셨다는 선배들의 이야기도 안 들어 보았는가. 물만 있으면 안 먹고도 일주일을 버티니까 어두운 곳을 더듬어서 축축한 느낌이 들면 손으로 살살 파보시요들.”
“그다음으로 당부를 하겠소. 지금 우리 조가 공동으로 갖고 있는 커피믹스는 당분간 절대 손을 대면 안 되네. 내가 조원들의 체질에 따라 때가 되면 분배할 테니 그리 알고 있게나. 지금 우리는 연락도 끊기고 있기에 무슨 쿵쿵하는 소리가 들리면 즉시 돌덩어리로 갱목을 탕탕 쳐서 울리게 하시게. 아마 구조를 하는데 생존 여부를 확인할 것이니 그 신호에 응답을 하라는 것이요.”
“아이구, 조장님. 지금 나는 물은 목이 말라 다 마셔버렸고. 이제는 허기가 져서 견딜 수가 없네요. 여기에 있는 커피믹스를 가루채로 한 봉지 마시면 안 될까요.”하고 식성이 좋고 덩치가 큰 명호가 말을 한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게요. 이 한 박스의 커피믹스가 우리를 살리는 유일한 비상식량인 것을 어찌 모른단 말이요. 가만히 있지 말고 바닥을 뒤적거리며 물길이나 찾으시오. 명호조원은 살이 쪄서 한 달간 안 먹어도 죽지는 않을 것이오. 커피믹스 선순위는 살이 없어 빼빼한 영태조원이 될 것이오.”하고 조장인 제민이가 나무라듯 큰 소리로 말한다.
“아이구, 조장님 말씀이나 따나 감사합니다. 저가 좀 빼빼하지만 허기는 잘 안 지니까 공평하게 나누어 주시지요. 나만 살라고 허기가 져서 쓰러져가는 조원들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을까요. 지금 내 궁둥이 밑이 축축하니 여기에 물길이 흐르는 모양입니다.”
“오우, 뭐시라고요. 물길이 잡힐 것 같다는 말씀이요. 그러면 그곳을 여기 있는 곡괭이로 살살 파서 조그마한 웅덩이를 만들어 보시요. 이제 살길이 조금 열리는 것 같네요. 물만 있으면 살아날 수 있을 것이요. 정말 하늘이 도우시는 것 같네요.”하고 조장인 제민이가 들뜬 듯이 말을 한다.
이렇게 하여 구조의 손길은 아직 도착하지 않고 계속하여 신호가 오기에 그들을 찾아서 오고 있는 것은 확실한 듯 보였다. 그 기다림의 시간이 얼마나 길지는 알 수가 없고 희망이라는 끈을 놓지 않고 배고픔과 싸워나갔다. 이제 갇힌 지가 일주일이 다되어 간다. 그간 물만 마시고 헛배만 두드렸는데 모두들 허기가 져서 말소리도 모기소리 만하다. 그러자 조장인 제민이가 말을 한다.
“지금부터 비상식량인 커피믹스를 분배하겠소. 그냥 주면 배고픔을 못 참아 한번에 몇 개를 먹을지도 모르니 내가 그날그날 체력을 보고 분배하겠소. 제 일 순위는 빼빼한 영태조원이고, 제일 후순위는 살이 찐 명호조원이라는 것만 아시게. 옛날 선배인 김창선광부가 물만 마시고 근 한 달을 버티지 않았소. 그가 한 말이 조난당하면 지방이 풍부한 사람이 오래 견딘다고 말이오. 곰도 겨울잠을 자기 전에 나무에 올라가 퉁 떨어지면서 체중을 충분히 불렸는지 시험을 안 하던가요.”하고 조장은 냉정하면서도 과학적인 근거를 대면서 말을 한다.
“조장님, 그 말씀을 잘 알겠는데 무슨 밥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커피믹스 몇 개를 달라는데 체중을 따지고 그러십니까. 지금 내 궁둥이를 만지니 그 통통하던 살이 다 빠져 버린 것 같습니다. 지금 어두워서 그렇지 내 얼굴을 랜턴으로 한번 비추어 보십시요.”
“허허, 지금 우리에게 빛이 정말 필요한데 그 얼굴 상태를 보려고 랜턴을 캔다는 말씀이오. 명호조원은 생각보다 엄살이 심하고 동료를 아끼는 마음이 많이 부족한 것 같네요. 물이나 계속해서 마시고 내가 때가 되면 줄 테니 애들처럼 보채지 마시오. 나이가 사십이 넘은 어른이 무슨 죽는소리를 하고 있소. 조장인 나도 지금껏 커피믹스 한 개도 먹지를 않았다는 것을 아시오.”하고 조장이 엄중하게 말하니 조용해진다.
이제 매몰된 지도 보름이 흘러갔고 아직도 신호만 오지 가까이 왔는지 알 수가 없다. 석탄재가 섞인 물을 마셔서 그런지 모두는 헛기침을 계속하고 힘이 없는지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이미 탈진하여 움직일 힘조차 없었고 오직 구조의 손길이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지만 뚜렷한 기별은 없다. 이제 갖고 있던 유일한 식량인 커피믹스도 바닥을 보이고 있었기에 생존의 한계점이 임박한 것이 확실하다. 그들은 제일 체력이 떨어진 영태조원에게 커피믹스를 우선 제공하고 나머지는 조장이 각 조원들의 뱃가죽을 만져보고 결정하였다. 그 풍만하던 명호의 궁둥이는 이미 탄력을 잃었고 간간히 말하는 목소리도 모기소리만하다. 조장인 제민이는 그에게 그 귀한 커피믹스를 한 개 내준다. 그러니 명호는 받기는커녕 자기는 더 견딜만하니 영태에게 주라고 양보한다. 그런데 영태는 극구 사양하면서 자기가 먹지 않고 남겨놓은 것까지 명호에게 주려고 한다. 정말로 보이지 않은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동료애가 보이지는 않지만 마음으로 전해온다.
근 한 달이 다되어 가니 조장도 힘이 없는지 말을 하지 않고 들리는 것은 칼칼한 기침소리만이 살아있다는 증거인 듯 들릴뿐이다.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들어 갈 것만 같았다. 잠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며, 깨어나지 못하면 끝이기에 서로는 한 번씩 흔들면서 의식을 차리도록 한다. 어느 날인지 모를 그날에 막힌 갱도에서 퉁퉁 소리가 나더니 굵은 쇠로 된 파이프가 쑤욱 들어오는 게 아닌가. 구조대가 가까이 와서 그 파이프관을 통하여 물과 죽을 밀어내지 않은가. 이제는 살았다고 모두들은 있는 힘을 다하여 소리 지르고 서로를 껴안았다. 그렇지만 파이프는 들어왔지만 그 어머어마한 석탄덩어리를 치워야만 구조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보내온 포장용기에 든 죽을 받아 들었다. 그때 조장이 아주 엄중하게 말을 한다.
“조원들은 들어시오, 구조대가 다가오고 있소. 이제는 살아 나갈 수가 있을 것 같기에 내 말을 잘 들어시오. 지금 보내온 죽을 반숟가락씩 입에 넣어 오물오물거려 물처럼 될 때까지 씹어시오. 배가 고프다고 그냥 막 먹으면 큰 사고가 나요. 소화기관이 작동 안 하는데 먹으면 체해서 그냥 숨이 넘어간다는 걸 명심히시오.”
“그리고 구조대가 도착한다면 분명 랜턴 불빛이 강렬하게 눈을 자극할 터이니 그때 가서는 헝겊조각으로 눈을 감싸고 보호하시오.”하고 조장인 제민이가 아주 과학적 근거에 의해 말을 하니 조원들은 그대로 따랐다.
그들은 매몰된 지 한 달 만에 구조되었다. 밖으로 실려 나온 조원들은 생명은 붙어 있었지만 그냥 미이라같은 형색이었다. 특히 그 풍만한 궁둥이를 자랑하던 명호는 이미 피골이 상접하였고, 그나마 빼빼하던 영태는 조금 살이 더 빠진 듯 별로 큰 차이는 없었으니 명호의 살이 영태에게로 전해져서 그런 현상이 발생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상황극은 근 반나절에만 끝나고 그들이 참았던 말들을 한 마디씩 내뱉는다.
“아이구, 친구들이 다 구조되어서 다행이다. 모두들 연기를 잘하데. 특히 조장인 제민이는 제일 말도 많이 했지만 연기력이 대단하더구만. 보나 마나 예술대학에 톱으로 합격하는 것은 따놓은 당상일 것 같다.”하고 배가 고파서 커피믹스를 달라고 보채던 명호가 한마디 한다.
“나도 제민이의 대사와 묵직하면서도 절실한 목소리를 듣고 이미 배우가 된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이데. 내가 빼빼하다고 커피믹스를 더 주는 그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하였다네.”하고 제일 약하다고 배려를 많이 받은 영태가 말을 한다.
“나는 대사가 몇 번이 안되기에 듣고 있었는데 우스워서 미칠 뻔했다. 그래도 분위기를 생각해서 입을 막고 있었제. 특히 곰이 지방을 많이 쌓았는지 확인할라고 나무 위에서 떨어져 본다는 것도 그렇고 제민이의 연기력은 타고난 것처럼 보이데.”하고 아직도 웃음을 입가에서 지우지 못하고 있는 수건이가 한마디 한다.
그 친구들 네 명 중 실기시험을 본 제민이의 합격소식이 먼저 들어왔고, 다음으로는 사범대학에 지원한 영태에게서, 그다음에는 의과대학을 지원한 명호가, 마지막으로는 전문대학에 지원한 수건이까지 모두 합격통보를 받았다. 모두들 대학에 들어갔으니 앞으로의 꿈을 이루는 게 문제이고 잘 해결될 것으로 보이는데, 예술전문대학에 들어간 제민이가 만만치는 않은 것 같았다. 대학을 졸업하더라도 배워야 하는 배고픈 직업이 아니던가. 긴 세월 동안 기다려도 영화에 배역을 맡아 캐스팅되기도 힘들고 유명배우 반열에 올라야 밥을 먹고 사니 친구들도 걱정을 많이 해준다.
어느 날 선배 배우가 그를 좀 보자고 한다.
“제민아, 네가 이제 곧 졸업이니 예술대학은 취업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입학시험인 연기테스트 때 보니 광부에 관한 연기를 선 보이데. 내가 너를 특별히 생각하여 실험극장에 올릴 연극의 주제를 탄광매몰사고로 하려고 한다. 주연은 아니지만 단역이라도 한번 맡아볼래.”
“아이구, 선배님이 고맙게도 저를 챙겨주시는군요. 광부의 역할이라면 자신이 있습니다. 듣고 보는 게 광부들의 일상이 아니겠습니까. 부디 그렇게 하여 주십시요. 저도 무슨 배역이라도 주어지면 진심으로 연기를 펼쳐 보이겠습니다.”하고 선배 배우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 실험극장에 올린 연극은 광부의 삶을 다룬 것으로 자기 친구들과 약속한 미래와 연결이 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서울의 유명한 극장에서 기획된 연극에 조연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비중 있는 배역에 캐스팅되었다. 그 연극은 대성황을 이루었고 출연한 제민이는 관객들에게 주목을 받았다. 이제 그는 데뷔작이 있었고 하나씩 새로운 연극에 출연하면서 명성을 쌓아갔다. 연기를 배우고 실력을 늘리는 것은 연극에서 출발하므로 그는 기본기를 확실히 다녀나갔다. 어느 듯 세월이 많이 흘러 그의 친구들도 이제 제자리를 잡았다. 수건이는 졸업 후에 소방관이 되어 사고 현장에 출동하고, 명호는 태백의 장성병원에 근무하고 있고, 영태는 태백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친다. 모두들 처음 계획대로의 직업을 가졌고 고향에 봉사한다는 약속 또한 지켰다.
어느 날 제민에게 모방송국 드라마제작 PD로부터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김제민 배우님, 우리 방송국에서 탄광촌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를 만들려고 하는데 출연이 가능하십니까. 잘 아는 원로 연극배우로부터 추천을 받았으니 가급적이면 참여하여 주십시요. 저가 생각하는 배역에 딱 맞는 분이시니까요.”
“아이구, 박 PD 님께서 저를 높이 평가하시구만요. 저는 의욕이 앞서다 뿐이지 제대로 연기를 하지를 못한답니다. 그래도 허락해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다음에 대본을 한번 받아서 읽어 보고 싶군요.”하고 제민이게 반가운 소식이 들어와서 PD와 함께 나눈 이야기이다.
그는 모방송국의 강원도 탄광촌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에 그의 주연급으로 출연하게 되었다. 그가 맡은 배역은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의 아들로서 자기 형제들을 키우고 가르친 한 아버지의 일생을 담은 드라마의 탄광작업반장의 역할이다. 그 역할은 마침 예술대학의 연기력 테스트에 대비하여 친구들과 상황극을 한번 해보았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고 꼭 한번 맡고 싶은 배역이었다. 그는 박PD을 찾아 드라마의 구성에 대한 제안을 한번 해보기로 한다. 어릴 적 친구들 네 명이 모여 꿈꾸던 직업을 다 갖게 되었으니 그 스토리를 드라마에 조금 담아 보면 어떠냐 하고 하는 의견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던 PD는 무릎을 탁 치면서 대단히 좋은 아이디어라고 반영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는 친구들에게 연락하여 특별출연의 사실을 알렸다.
“야, 명호야. 내가 이번에 모방송국의 드라마에 출연하게 되는데 탄광 작업반장 배역을 맡았다네. 내가 담당 PD에게 우리 친구들 이야기를 하니 특별출연을 해주기로 약속하였다네. 그러니 너는 장성병원에서 드라마를 찍어라. 그리고 너는 진폐증, 구폐증을 앓는 퇴직 광부들의 집을 왕진하여 무료진료를 해주는 것을 대본에 넣었다.”
“잘 있었나, 영태야. 너가 명호한테 들었겠지만 드라마에 특별출연하여 탄광촌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교사로의 장면을 자연스럽게 연기해 주게나. 또 너가 영향을 받은 것은 심훈의 상록수이었다는 것도 말해주고 말이제.”
“수건아, 소방관으로서 구조활동에 나간다고 정말 고생이 많다. 이번 드라마에 너는 탄광 매몰현장에 출동하여 갱도를 뚫고 고립된 광부들을 구하려 들어가는 역을 맡게 되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상황극을 할 때 고립된 갱도에서 구조를 기다리며 조원들을 안심시키고 무사히 견디어 내도록 이끈 작업반장을 맡게 되었다.”하고 제민이는 친구들에게 연락을 하나하나 다하였다.
드디어 드라마가 방영되기 시작하였다. 특별출연을 하는 그의 친구들도 자연스럽게 연기를 펼쳐 보이고, 특히 소방관 구조대원인 수건이와 작업반장이 배역인 제민이와의 호흡을 맞춰가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그 드라마는 단번에 시청률 1위가 되었고 종영될 때까지 그 인기를 누렸다. 그 드라마의 이름은 ‘광부의 아들’로 탄광촌 출신 청년들의 우정과 사랑을 다룬 이야기이었기에 수많은 광부들 및 그 가족들의 눈물을 흘리게 한, 명드라마가 되었다. 장장 6개월 동안 연속극으로 상영되었기에 그 드라마를 보기 위해 일찍 귀가하는 현상이 벌어졌고 광산촌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폭발하였다. 그 촬영현장인 태백과 철암, 사북은 물론이고 동해안의 정동진까지 많은 관광객이 들이 닥쳤으니 그 드라마 한 편이 지역경제를 일으키는 촉매역할을 하였다. 드라마 마지막에 어린 시절 꿈을 실현시킨 네 명의 친구들이 다시 모여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은 다시 보고 싶고, 각색을 하였지만 그 친구들이 사랑을 찾아가는 스토리 또한 보는 이들의 감성을 젖게 만들었다.
그로부터 세월은 다시 흘렀다. 이제는 그 친구들도 50대가 되었고 나름대로 사회적 기반을 잡아나갔다. 어느 해 연말 모방송국의 연예대상 시상식이 있었는데, 그들의 친구인 제민이가 TV드라마 부문 연기대상을 수상한 게 아닌가. 그 작품의 이름은 ‘아버지의 길’이었고 그 주연에는 광부인 아버지를 회상하고 태백 탄광촌의 추억을 되돌려 보는 어느 청년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었다. 이제 제민이는 연예계에서 강원도를 대표하는 중견 배우가 되었고, 그에 비례하여 광고 스폰서 수입으로 돈도 많이 벌었다. 그는 어느 날 의사인 친구 명호에게 전화하여 긴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명호야, 전번에 너한테 슬쩍 말했듯이 태백에 광부들을 위한 병원을 건립하는데 기금을 내고 싶다. 내가 내놓은 돈이 마중물이 되어 진폐증이나 구폐증을 앓는 광부들을 치료하고 요양하는 병원으로 만들고 싶다. 물론 엄청난 돈이 들어가니 좀 시간은 걸리겠지만 너하고 그간 나누었던 꿈을 이루어보고 싶다.”
“아이구, 제민이가 드디어 약속을 지키려고 하네. 안 그래도 태백시의 뜻있는 사람들과 협의하여 요양병원을 만드는 밑그림을 그려놓았네. 문제는 아무래도 자금이 아니겠는가. 너가 보내주려는 돈도 아주 큰돈이지만 좀 더 기금을 조성하여야겠다. 그래서 좋은 아이디어를 한번 만들어 보려고 하는데, 방송국에서 이런 병원건립 구상에 대한 취재를 하여 보도해 주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네.”하고 제민이와 명호가 진지하게 대화를 한다.
어느 날 TV뉴스시간에 ‘친구들의 꿈과 약속’이라는 기획취재 뉴스가 떴다. 가난한 탄광촌 어린이들이 커서 자기들의 꿈을 이루고 병원건립이라는 약속을 지키려고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기에는 인기 배우인 김제민이 등장하니 시청자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고, 각계각층에서 병원건립 성금이 밀려들어왔다. 단시간 내에 건립기금이 마련되어 그 친구들도 놀래버렀다. 이제는 병원을 건립하는 본격적인 절차에 들어가면 된다. 향후에 준공이 되고 나면 해결해야 할 또 다른 문제가 있지만 시간을 두고 하면 될 것 같았다. 그것은 입원하여 요양하는 광부들이 병원비를 낼 형편이 안되기에 정부나 태백시로부터 지원을 받는 방안과 지역출신으로 출향하여 성공한 기업인이나 재력가들로부터 정기적인 성금을 받는 것도 포함되었다. 그들은 그 기금 이름을 가칭 ‘고향기억기금’이라고 붙여 보았다.
어느 추석 명절에 오랜만에 네 명의 친구가 철암시장통에서 만났다.
“야, 제민아. 너가 드디어 배우의 꿈을 이루었네. 고등학교 시절 상황극을 할 때부터 그릇을 알아보았지만 이렇게 성공할 줄은 몰랐다. 그게 다 너 실력 때문만 아니고 우리 친구들 힘도 들어가 있다는 것이 맞제. 오늘 1차 2차 3차는 너가 책임지제.”하고 수건이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한다.
“오, 우리의 호프 제민이가 금의환향하였네 그려. 내가 드라마를 보다가 그 뜨거운 연기력에 눈물도 흘리고 박수도 치고 했다는 걸 모르제. 어떻게 그런 연기가 솟아 나오는지 정말로 대단하더라.”하고 명호가 다분히 띄워주는 말을 한다.
“아이구, 친구야. 우리 태백을 알려주어서 고맙고 드라마에 특별출연도 하게 해 주었으니 나에게도 제자들로부터 전화가 많이 온다. 또 내가 현시대의 살아있는 상록수라고 말해주어 몸 둘 바를 몰랐다.”하고 겸손한 영태가 진심 어린 말을 한다.
“내가 뭐 그렇게 성공했다고 그라노. 명호는 존경받는 호흡기계통 의사이지, 영태는 상록수 같은 교사이지, 수건이는 선친의 기질을 닮아 용감하고 의리 있는 소방관이 아니던가. 나야 그냥 말로써 표정으로서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연기하는 허수아비 같은 사람이 아니던가.”하고 제민이가 좀 민망하다는 듯이 겸손하게 말한다.
이렇게 하여 친구들 간의 대화는 이어지고 철암시장통에서 그들의 아버지가 즐겨 먹던 삼겹살에다 경월소주를 주고받고 하였다. 매일 엄청나게 들이키던 석탄가루를 훑어내기 위해 그들의 아버지는 돼지고기를 많이도 먹었고, 그들도 아버지가 한 근씩 사들고 와서 끓여주던 돼지국밥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연탄불위에서 지글거리면 타는 고기 냄새에서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떠오르고, 소주잔 위에 얼굴이 어리는 것을 느꼈으니 아버지들이 그리워지는 게 맞다. 그들 친구들 모두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소백산 화전민에서, 심마니에서, 또 머슴살이에서 자식들을 잘 키워 보려고 막장을 찾아온 아버지들이 아니던가. 초등교육도 못 받은 그들이 지식들을 대학까지 보내고 큰 출세는 아니지만 진정한 출세를 시킨 그 노고는 항상 가슴속에 새겨져 있을 것이다.
그들이 살아온 태백산 자락은 어머니 품처럼 포근하고 아버지의 기상처럼 늠름하였기에 그들도 산에서 배워서 세상에서 실력을 발휘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들은 탄가루가 대지를 칠흑같이 채색하지만 마음은 눈처럼 하얗고 깨끗하였으니 그들은 태백산의 이름처럼 크고 밝은 마음을 지녔던 것이리라. 그들이 도시에서 자연의 미덕을 모르고 애환을 모르고 자랐다면 어떻게 인생을 연기하는 배우가 되었겠으며, 인술을 베풀어 병을 고치는 의사가 되었겠으며, 자신의 안전을 생각하지 않고 생명을 구하는 소방관이 되었겠으며, 탄광촌 아이들에게 꿈을 키워주며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겠는가. 오늘도 머리에 새하얀 눈을 이고 있는 태백산은 소년들에게 깨끗한 마음을 갖고 아름다운 꿈을 꾸게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