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6월 말에는 오랫동안 몸담았던 직장을 떠나야 한다. 그동안 이별 연습을 많이 준비해 왔음에도 점점 시간이 다가오니 슬슬 생각이 복잡해진다. 정들었던 사람들과 식사 약속도 잡아야 하고, 업무 인수 등 그동안 해왔던 일들을 다른 사람이 내일을 하더라도 잘 적응할 수 있게 준비해 놓아야 한다.
오랜 직장 생활 동안 육아휴직 2년 이외에는 한 번도 쉰 적은 없다. 육아휴직을 할 때는 출산과 아이 양육이라는 전제가 있었고, 다시 돌아올 직장이라 떠남에 대한 감흥이 없었다. 오히려 새로운 생명과의 만남에 대한 기대로 들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그래서인지 모든 것이 다 소중하고 감사하다.
직장에 출근하면 하루 종일 큰 공간 속 작은 내 자리에 앉아 컴퓨터만 바라보고 있다. 잠을 깨려고 진한 커피를 마셨고, 일로 사람들을 만났다. 그때는 이 삶이 영원할 줄 알았다. 일이 주는 기쁨, 사람과의 만남은 내 삶의 선물이다. 내 책상에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창문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오늘따라 너무 투명해서 나도 모르게 사무실을 나와 건물 밖에 잘 다듬어진, 소박한 정원 길을 걸었다.
작년에 보지 못했던 꽃길이 생겼다. 움츠렸던 마음에 따뜻한 봄의 생명력이 전달된다. 주위에 소중한 것을 잊고 살았구나! 사진을 찍으려 보니, 하늘과 건물, 울긋불긋 피어난 꽃의 색채가 조화를 이룬다. 꽃들이 내게 말을 건다. “당신을 환영해요. 당신의 마음에 평안이 깃들기를.”
길을 걷다 보니 벚꽃이 날린다. 이름 모를 진분홍색 꽃들도 심어져 있다. 아직 내 옷과 마음은 봄을 다 담지도 못했는데, 자연은 움츠린 어깨를 펴고 이제 초여름 준비를 하라고 한다. 잠시 눈을 감으면 눈부신 햇빛, 미온한 바람, 소박하지만 다채로운 꽃들이 내 마음을 살갑게 두드린다. 노란 꽃 색깔에 내 마음도 노랑으로 물들었다. 점점 더 피어나겠지~ 지금의 수줍음을 벗어내고 자신만의 색깔과 향기를 드러내겠지. 뜻밖에 내게 준 너의 선물을 한 아름 받아들고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왔다.
직장 내 공간, 각 부처와 부처를 연결하는 걸을 수 있는 빈 공간이 많다. 온 사방이 유리로 되어 있어 건물 안인데도 바깥 어느 산책길을 걷는 착각을 준다. 오후에는 따뜻한 허브차를 들고 그 복도를 걸으며 해지는 모습을 봐야겠다. 세종시에 내려온 지 10년이 넘었다. 처음 내려왔을 때는 주위에 정부세종청사 건물만 우뚝 서있었다. 새 건물 냄새를 없앤다고 공기를 청정할 수 있는 숯과 화분이 동원되었다. 미로 찾기 하듯 사람을 찾으러 헤매던 시간들, 어느새 이 공간에 정이 들었다. 이제 추억을 모아 모아 눈과 마음에 담아 가야겠다.
예전에 보았던 영화 '초원의 빛'에서 나탈리 우드가 읊조리던 워즈워드의 마지막 시가 생각난다
여기 적힌 먹빛이 희미해질수록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 희미해진다면
여기 적힌 먹빛이 마름해 버리는 날
나 그대를 까맣게 잊을 수 있을 수 있겠습니다.
불멸의 송사 중에서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그것이 돌아오지 않음을 서러워 말아라
차라리 가슴속 깊이 간직한 오묘한 힘을 찾을지라
초원의 빛이여
그 빛이 빛날 때
그대 영광 찬란한 빛을 얻으소서 -
나이가 들어갈수록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이 더 많이 보게 되는 것 같다. 노인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분의 삶이 어떠한지 생각해 보게 된다. 재산의 많고 적음을 떠나 지위의 높고 낮음을 떠나 한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아오셨다는 것만으로 노인의 백발에서 깊은 위로와 힘을 얻는다. 세대 간에 서로를 바로 보는 우리의 시선이 따뜻해진다면 삶은 더욱 지혜롭고 풍성해지지 않을까!
시인이 말하듯이 젊을 때의 눈부심은 사라졌지만, 긴 세월을 살아내온 삶의 지혜와 통찰, 그리고 인간의 유한함을 깨닫게 한다. 아름다움을 마음에 품고 사는 자는 그 자체로 황홀합니다. 당신은 어떤 아름다움은 기억 속에 담고 계시나요? 추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