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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stral Jul 14. 2024

그림책으로 밥 먹고 삽니다 12

어서 와요, 식세기 씨

요리의 시작과 끝은 설거지다. 설거짓거리를 없애야 음식을 할 물리적 심리적 공간이 생긴다. 양념 한 번만 넣어도, 국물 한 번만 맛 봐도 생기는 게 설거짓거리다. 그릇 좋아하는 내가 3인 가족 한 끼 식사를 온전히 차려내면 어마어마한 양의 설거지가 나온다. 밥공기와 국공기, 앞접시가 세 개씩 아홉 개, 숟가락 젓가락이 한 벌씩 세 벌, 함께 먹는 반찬 담은 접시 가 서너 개, 물컵이 세 개라고 치면 상에 놓이는 그릇만 벌써 스무 개다. 반주라도 곁들이면 술잔이 추가되고, 찌개라도 끓이면 그릇 서너 개 또 추가. 음식을 조리한 밥솥과 냄비, 프라이팬, 주걱과 국자, 집게와 가위, 칼과 도마, 볼과 쟁반, 보관용기까지 개수대에 다 담으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망연자실해지는 게 일반적이다. 이 상태를 우리는 ‘설거지옥’이라 부른다.


그런데 내 경우 망연자실하기보다는 오히려 전투력이 상승한다. 나는 설거지에 쾌감을 느끼는 ‘설거지 변태’이기 때문이다. 설거짓거리가 많고 더럽고 다양할수록 나는 남편에게 그 즐거움을 양보하지 않는다. (이건 아마 주말에만 설거지를 하는 나의 생활 패턴 때문일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 전업 주부들처럼 일주일 내내 삼시세끼 설거지를 해대야 한다면 나도 설거지 변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불어 자의로 설거지를 한다고 해서 남편에게 잔소리를 안 하는 것은 아니다.)


변태의 즐거운 설거지는 끝을 상상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설거지가 끝났을 때의 건조대 에 정리된 모습을 상상하며 씻을 그릇을 종류별 크기별로 분류한다는 뜻이다. 접시끼리 공기끼리 컵끼리 수저끼리 모으되, 가장 작고 좁은 것을 아래에 놓고 가장 크고 넓적한 것이 위에 놓이도록 쌓는다. 그래야 비누질을 했을 때 큰 것부터 작은 것 순으로 할 수 있고, 헹궈서 건조대에 쌓을 때 작은 것부터 큰 것 순으로 가지런히 엎을 수 있다. 도자기, 유리, 플라스틱, 쇠나 스텐인리스순으로 비누질을 하고 같은 순서로 헹군다. 상에 올린 그릇들을 먼저 하고, 조리용 그릇은 나중에 한다. 이때 특별히 모시는 그릇들과 와인잔, 주물 솥은 예외로 둔다. 이분들은 다른 설거지가 끝난 뒤 단독으로 중성 세제와 초극세사 수세미로 닦고 부드러운 마른 행주로 물기를 제거해 바로 그릇장에 넣어드린다.


변태의 즐거운 설거지는 맨손이 기본값이다. 그래야 미지근한 물의 온도와 부드러운 비누거품의 질감과 뽀득거리는 그릇의 감촉을 느낄 수 있다. 특히 뽀득거리는 그릇의 감촉은 설거지가 잘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이므로 절대 놓칠 수 없다. 작은 손에서 늘 헐렁거리는 다홍색 고무장갑은 이런 감각을 모조리 앗아간다. 그나마 손에 꼭 맞는 작은 사이즈와 취향을 저격하는 뉴트럴 컬러 고무장갑이 나오고, 피부가 젊음의 생기와 회복력을 잃어가면서부터는 가급적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려고 노력한다.


설거지 변태에게 설거지는 마음이 복잡하고 가슴이 답답하고 머릿속이 얽히고설켰을 때 명상의 시간이요, 효과 빠른 진통제다. 정신없이 해치우다보면 내가 그릇인지 그릇이 나인지 물아일체, 무아지경의 경지가 되면서 잡생각과 시름을 잠시나마 잊곤 한다.

그.런.데!

설거지를 향한 단단한 사랑에 의심의 싹이 트고 있다. 이것은 소위 ‘우렁각시 삼대장’으로 불리는 생활 가전  ‘건조기, 로봇 청소기, 식기세척기’ 때문이다. 아니, 덕분인가? 건조기의 존재를 몰랐을 때는 세탁기에서 탈수된 빨래를 탁탁 털어 착착 널던 것을 즐기던  나였다. 한데 건조기 각시의 놀라운 솜씨를 경험하고 나니 빨래 널기와 털기가 세상 힘든 일이 되어 버렸다. 로봇 청소기의 존재를 몰랐을 때는 진공청소기 밀고 걸레질 하는 일이 당연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로봇청소기 각시의 요사스런 솜씨를 경험하고 나니 걸레질과 비질이 세상 시간 아까운 일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 마지막 각시인 식기세척기까지  모셔온다면?!


그림책 <어서 와요, 달평 씨!> 의 콩이네 가족은 밤마다 몰래 와서 집안일을 하는 우렁 각시 달평 씨의 일방적인 희생과 봉사에 미안함을 느낀다. 결국 그 안락함을 포기함과 동시에 그동안 몰랐던 집안일의 즐거움을 배운다. 이 얼마나 바람직한 결말인가.

하지만 인간의 습관은 비가역적이라 편한 것을 맛보게 되면 좀처럼 되돌아가기 힘들다. 식기세척기를 들이면 다시는 손 설거지를 하는 일은 없겠지. 설거지의 즐거움도 사라지겠지. 내 손으로 설거지하면서 얻는 즐거움과 기계에게 설거지를 맡기면서 얻는 여유로움 둘 중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이들이 덜어 준 노동과 벌어 준 시간에 남편과 차 한 잔 더 마실 수 있다면, 아이와 눈맞춤 한 번 더할 수 있다면, 책도 한 권 더 읽고 넷플릭스 시리즈도 한 편 더 볼 수 있다면?

어서 와요, 식세기 씨.

잘 가요, 설거지 변태.


하지만 나는 변태라 아직 설거지의 즐거움을 식세기에게 양보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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